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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안 궁금해 (134/208)

134화. 안 궁금해2021.08.12.

16562827517852.jpg“사랑할수록 증오하며 한 줌의 온기도 얻지 못하리라.”

칼리고가 그렇게 중얼댈 때, 린은 다시 물결치는 어둠 속으로 돌아와 있었다.

16562827517852.jpg“그게 바로 내가 너희에게 내린 저주다.”

칼리고의 입에서 나온 말이 린의 가슴을 내리쳤다. 그 말은 떠올리게 했다. 린이 가장 외롭던 시절, 애정을 바랄수록 고독해지던 나날을. 린은 이 지긋지긋한 저주가 권능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이토록 원색적인 악의를 품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창백해진 얼굴로 바라보자, 칼리고가 이기죽대며 지껄였다.

16562827517852.jpg“다른 왕들은 목 잘린 계집을 증오하며 저주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나와 같은 이가 생겨 날 이해할 것을 기대했다.”

칼리고가 손끝으로 린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은 분명 허공에 멈췄는데, 어쩐지 린은 가슴을 찔린 기분이었다.

16562827517852.jpg“그러니 너라면 내 심정을 알 것이다.”

16562827517872.jpg“웃기는 소리…….”

16562827517852.jpg“너도 저주하지 않았느냐, 널 거부하며 떠난 계집들을.”

부정하는 린을 향해 칼리고가 은근히 속삭였다. 그 순간 서늘한 기운이 린의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16562827517852.jpg“또 증오하고 원망하지 않았느냐, 네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간 어미를.”

이어진 음성에 힘이 빠져나갔다. 린은 무언가 잘못된 걸 깨닫고 저항하려 했다. 그런데 늪에 빠진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16562827517852.jpg“이 얼마나 가혹한 일이냐. 사내는 여자에게서 태어나 여자를 사랑하지만 여자들은 냉랭하고 잔인하지.”

이어진 칼리고의 목소리는 더 이상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박동이자 신호, 귀를 막아도 전해지는 관념이었다.

16562827517852.jpg“그래서 끝내 우릴 괴물로 만든다.”

칼리고가 웃으며 하는 말에 린은 하마터면 울컥하고 울 뻔했다.

16562827517872.jpg‘뭐지?’

린은 갑작스러운 격정에 당황했다. 가슴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감정이 그를 들끓게 했다. 화가 났다. 모든 것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이걸 어떻게든 쏟아내야 살 것 같았다.

16562827517872.jpg“……헛소리야.”

하지만 린은 넘어가지 않고 버텼다.

16562827517872.jpg“다른 사람이 괴물로 만들어줄 동안 너는 뭘 하고.”

린의 귓전에 울리는 칼리고의 말은 단순한 목소리가 아니라 영혼 단위의 유혹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충 넘어가 주기엔 논리가 너무 빈약했다. 아무리 포장한들 저건 결국 엄마 탓이었다. 그래서 린은 넘어가려던 찰나 정신을 차렸고, 여상히 웃으며 말하던 칼리고는 린의 반문에 불쾌한 듯 중얼댔다.

16562827517852.jpg“치마폭으로 감싸주는 계집이 있다, 이건가?”

칼리고의 혼잣말에 린은 내심 기가 막혔다. 동시에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이분법적인 사고와 강박적인 자기연민을. 칼리고는, 한때 왕이었던 이 사내는 마치 몸만 큰 아이처럼 시야를 좁히고 모든 것에 여자를 끼워 넣고 있었다. 모든 논리가 거기서 시작되니 정상이 아닌 게 당연했다. 그래서 린은 저 허술함을 노려볼까 잠시 생각했다.

16562827517872.jpg‘저렇게 위태로운 상태라면…….’

회유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돌연 눈을 뒤집고 난동을 피운 것처럼 다시 꼬리를 내리게 할 수 있다면……. 하지만 아무리 우스워 보여도 그는 망자의 왕이었다.

16562827517852.jpg“잘난 척은 잘 들었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여자 앞에서 다시 해 보아라.”

칼리고는 린의 속셈을 비웃으며 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율동하던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한 검은 제복이었다. 하지만 그 옷을 입은 여인은 더없이 낯설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과 빛나는 눈을 본 순간 린은 저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차라리 뱀의 모습일 때가 나았다. 그럼 적어도 그때의 기억에 사로잡히진 않을 테니까. 린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생모, 나자 아이테르너를 바라보았다.

16562827517872.jpg‘진짜인가? 아니면 환상?’

어느 쪽이든 두려웠다. 칼리고를 잠시 비웃었지만 아직 모친의 그늘에 사로잡힌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나자의 키가 점점 커졌다. 린은 그가 변신이라도 하는 줄 알고 주춤 물러나다가 곧 깨달았다. 나자가 커진 게 아니라 자신이 작아진 것을. 린은 어느새 소년이 되어 있었다. 그가 죽기를 바라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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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봄 연인이 되었지만 레나와 린은 이제껏 격식 있는 데이트를 한 적이 없었다. 매일 눈 뜨자마자 망자들과 싸워야 하는 마당이니 당연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파견을 마치고 요새로 돌아오면 전장에서의 고된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꼭 함께 있었다. 그런 나날 중 하루였다. 함께 낮잠을 자다가 눈을 떴는데, 레나에게 팔베개를 해주던 린이 어느새 레나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린이 놀라서 일어나려 하자 반쯤 잠들어 있던 레나가 그의 머리를 오히려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긴장한 린은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일어났어? 아직요. 식사 시간이야. 조금만 더요. 레나는 그렇게 중얼대며 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레나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었고, 이윽고 그 안에 숨어 있던 커다란 흉터에 닿았다. 이거 뭐예요? 예전 상처. 어쩌다가? 린은 조금 머뭇대다가 입을 열었다. 레나가 물었으니 그에겐 대답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로써 레나는 알게 되었다. 그의 소년 시절, 그를 죽게 하고 살게 한 이야기를. 그리고 그 이야기 덕분에 레나도 린을 살릴 수 있었다. . . . 레나는 팔에 낸 상처를 누르며 피를 흘려보냈다. 그러곤 자신의 피가 린의 입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신중히 지켜보았다.

16562827547579.jpg‘혈색이 돌아왔어.’

레나는 아까보다 한층 붉어진 린의 얼굴을 보며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아깐 정말 린이 죽는 줄 알았다. 린은 칼리고에게 공격당해 옆구리가 찢기고 그 와중에 칼리고는 자신의 심장을 뽑아버렸다. 생명이 연결되었다는 말이 사실인지, 칼리고의 가슴에서 규가 드러나는 순간 린은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직후 발밑까지 무너질 땐 모든 게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밑으로 추락하기만 할 뿐 위에서 천장이나 벽돌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위를 보니 자욱한 흙먼지 사이로 큰 기둥이 보였다. 무너진 기둥이 운 좋게 위를 떠받친 모양이었다. 지하로 떨어진 레나는 곧장 린을 찾았다. 다행히 린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만 곧 죽을 것처럼 얼굴이 창백했다. 그의 깊은 상처를 보고 레나가 절망하지 않은 건, 예전에 린에게 들은 이야기 덕분이었다.

16562827547579.jpg‘상처도 거의 아물었어.’

반신반의하던 레나는 린의 혈색뿐 아니라 찢어진 상처마저 돌아오자 더 힘줘서 피를 짜냈다.

16562827547579.jpg‘지배와 흡혈이라니.’

그자의 권능답다고 해야 할지. 레나는 칼리고의 권능으로 린을 구하는 이 상황이 퍽 공교로웠다. 레나는 한숨을 깊게 쉬며 주변을 슬쩍 돌아보았다.

16562827547579.jpg‘루비드와 이우라는 어떻게 됐지?’

분명 가까이에 있었는데 발밑이 붕괴하면서 사라졌다. 지금 레나와 린이 있는 바닥도 반쯤 무너져 더 아래층이 보였다. 어쩌면 루비드와 이우라는 저기로 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레나는 주변에 이우라가 없는 것에 안심하며 다시금 린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곤 아까운 줄도 모르고 자신의 피를 계속 흘려보냈다. 상처는 거의 낫고 혈색도 많이 돌아왔지만 레나는 좀처럼 안심하지 못했다. 칼리고와 생명이 연결됐다는 말 때문이었다.

16562827547579.jpg“……너무 걱정시키는 거 아니에요?”

레나가 야속한 마음으로 속삭였다. 지금까지 ‘린 씨!’하고 소리치며 달린 게 몇 번인지 모르겠다. 그때마다 얼마나 절박하게 손을 뻗었는지. 지금도 어찌나 간절한지. 이렇게 손 많이 가는 당신을 내가 과연 두고 갈 수 있는지. 레나는 슬픈 마음을 삼키며 린의 위로 몸을 웅크렸다. 그러곤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16562827547579.jpg“린, 죽으면 안 돼.”

레나가 간절히 속삭인 순간 린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레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고요히 닫혀 있던 린의 두 눈이 천천히 떠지며 레나를 향했다.

16562827547579.jpg“린 씨, 정신이…….”

들어요? 레나의 다급한 물음은 도중에 뚝 끊겼다. 누워 있던 린이 돌연 레나의 뒷머리를 잡아당기며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피비린내 나는 입맞춤에 레나는 린의 손을 뿌리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물었다.

16562827547579.jpg“너 누구야?”

레나가 물러나자 린도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더니 아쉬운 듯 중얼댔다.

16562827517852.jpg“바로 알아보는군. 방식이 달랐나?”

린은 그렇게 말하며 오만하게 웃었다. 평소의 그라면 레나 앞에서 절대 지을 리 없는 표정이었다. 레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린에게, 아니. 린의 몸을 차지한 칼리고에게 되물었다.

16562827547579.jpg“어떻게 한 거지?”

16562827517852.jpg“별로 놀라지도 않으시는군요.”

레나의 침착한 물음에 칼리고가 린의 입술로 대답했다. 그러자 레나는 다시 물었다.

16562827547579.jpg“어떻게 한 거냐고 물었어.”

16562827517852.jpg“보시는 바와 같이. 반쪽이 둘이 되면 그 또한 하나지요.”

16562827547579.jpg“그 사람은?”

16562827517852.jpg“잠들었습니다. 악몽을 꾸면서.”

16562827547579.jpg“그래서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레나의 연이은 물음에 칼리고는 린의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허를 찔렸을 텐데, 칼리고를 대하는 레나의 목소리는 아주 단조로웠다. 억지로 화를 참거나 평정을 가장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그래서 칼리고는 의아해졌다. 레나 루벨의 입장에선 상처를 불사하며 지키던 연인이, 제 피를 먹여가며 살려낸 연인이 육체를 빼앗겨 다른 인물이 된 상황이다. 그런데 저리도 태연한 표정이라니.

16562827517852.jpg“또 연기를 할 셈인가?”

칼리고는 아까 느낀 배신감을 상기하며 린의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칼리고는 원했다. 레나가 자신의 입장을 자각하고 절망하기를. 연인의 목숨줄이 제게 달린 걸 깨닫고 엎드려 애원하기를. 왕이 된 그에게 친모가 그런 것처럼, 왕자 시절 그를 본체만체하던 수많은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야 아까 느낀 박탈감을 적게나마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레나는 여전히 아무 감정이 없는 양 냉랭했고, 부아가 치민 칼리고는 이대로 린의 손가락 하나를 부러트려 볼까 생각했다. 그때 칼리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레나가 입을 열었다.

16562827547579.jpg“애원하길 원해? 하지만 그러면 즐길 거잖아.”

그렇게 말하는 레나의 목소리는 여상히 단조로웠다.

16562827547579.jpg“솔직히 말하면 궁금하지도 않아. 네가 무슨 변덕으로 이 사달을 냈는지. 그리고 뭐든지 너무 오래 하면 진부해. 특히 인질극 같은 건.”

16562827517852.jpg“허세 부리지 마라,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건…….”

16562827547579.jpg“혹시 착각하고 있어?”

레나가 말을 끊고 되묻자 유들유들하게 웃던 린의 얼굴이 돌연 심각해졌다. 레나는 오히려 그 점에 살짝 화가 났다. 내 예쁘게 잘생긴 남자친구의 얼굴을 마음대로 빌려 쓰다니. 짜증이 났지만 레나는 너그럽게 봐주기로 했다. 왜냐하면 레나의 말마따나, 칼리고는 지금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으니까.

16562827547579.jpg“당신, 잘못 판단했어.”

16562827517852.jpg“무슨 뜻이지?”

16562827547579.jpg“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아까 그 몸을 계속 유지했어야지. 이래선 내가 널 지킬 이유가 없어지잖아.”

차라리 도망치게 해줄 때 알아서 도망치지. 도망치기는커녕 내 금쪽같은 애인에게 들러붙었다. 이젠 지키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떼어내서 없애버려야 할 판이다. 그럼에도 칼리고가 저렇게 당당한 건, 린의 몸으로 숨어버린 자신을 레나가 어쩌지 못할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 생각이 빤히 읽혀 가소로웠지만 레나는 웃지 않았다. 칼리고에겐 비웃음조차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그래서 레나는 이전의 태도를 고수하며 담담히 말했다.

16562827547579.jpg“너만 망자의 왕이 아니야.”

아, 사실은 아까부터 이러고 싶었다. 이우라의 루비드 때문에 나설까 말까 어찌나 망설였던지. 그런데 칼리고가 제 궁전을 무너트리며 그들을 알아서 치워주었다. 그로써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진 레나는, 이 촌극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16562827547579.jpg“네가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그 말과 함께 레나의 등 뒤로 새하얀 빛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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