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꽃보라2021.08.16.
마치 밤하늘에 새벽이 번지듯 눈부신 백색이 사위를 채웠다. 눈이 멀 것 같은 빛에 칼리고는 린의 눈을 질끈 감았다. 쏟아지던 광휘가 잦아들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새하얀 백합에 둘러싸여 있었다. 처연히 피어난 백합이 향기를 퍼트렸다. 그 짙은 향기에 칼리고는 저도 모르게 주춤댔다.
“어떻게 내 영역에서 이런…….”
“나도 똑같은 게 궁금했어.”
백합 사이에 선 레나가 담담히 말했다.
“당신이 히엠스 그라샤의 성 앞에서 공간을 전개했을 때, 다른 왕의 영역에서 어떻게 힘을 썼나 싶었거든.”
망자의 왕들은 살아생전에 그런 것처럼 무덤에도 자신의 영역을 세웠다. 그러곤 그곳에선 다른 왕들이 힘을 발휘할 수 없게 자신의 권능을 펴 발라 놓았다. 진정 왕 다운 행동이었다. 그런데 일전에 칼리고는 히엠스의 성 앞에서 레나와 린을 자신의 공간으로 끌어들였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궁금했는데, 린에게 들러붙은 뱀 왕을 보니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알 것 같아. 그 사람이 있어서 가능했던 거지?”
레나가 린의 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답인지 칼리고는 린의 얼굴로 설핏 인상을 썼다.
“……그대의 말이 맞다. 광신도의 영역이지만 내 힘이 닿는 매개가 거기 있었다.”
그러면서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도 레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대에겐 아무 매개도 없는데, 어떻게 내 영역에서 이런 일을 벌였지?”
“없긴 왜 없어.”
가벼운 부정에 칼리고가 인상을 썼다. 하지만 레나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매개라는 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수단이나 권리라면, 내 매개는 당신이야.”
“그게 무슨…….”
“잘 모르겠으면 직접 경험해 봐.”
그 순간 고요하던 대기가 움직여 곧게 피어난 백합을 흔들었다. 심상치 않은 기류에 칼리고가 경계하자 레나가 단조롭게 덧붙였다.
“당신, 아까 동정을 구하려고 했지. 어린 시절까지 보여주면서. 그 대답도 같이 들려줄게. 이제부터.”
흩날리는 꽃잎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큭…….”
막연한 두려움에 칼리고는 출구를 찾아 두리번댔다. 그때 바람 소리에 섞여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하렘에서 태어난 왕자님…….
―아버지는 자식의 이름도 모르는 무심한 왕. 어머니는 망상에 시달리는 가련한 광인.
바람과 함께 속살대는 소리에 칼리고는 더 당황했다.
‘이건…….’
이건 아까 칼리고가 레나에게 들려준 자신의 이야기였다.
―아이는 모친을 찾아갔네. 엄마 품에 꽉 안겨볼 마음뿐이었네.
―하지만 어미는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네.
―왕자의 붉은 눈만 보고 악마라 소리치며 그의 손에 못질을 해버렸다네.
칼리고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따라 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익숙했다. 아니, 목소리가 아니라 목소리들이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인데 그럼에도 왠지 다 귀에 익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칼리고가 목소리의 근원을 찾으려는 듯 주위를 어지럽게 돌아보는데, 한 목소리가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그래서 우릴 죽였나이까?
칼리고는 눈을 홉떴다.
―그래서 까닭 없이 우리를 짓이기셨나이까.
“너희는…….”
칼리고는 비로소 기억해냈다. 이 목소리의 정체를. 그들은 칼리고의 여인들이었다. 하룻밤 만에 찢겨나간 자와 한동안 머물렀던 자, 그를 연민하고 한때나마 연정을 품었던 자들이 모두 함께 있었다. 칼리고가 그들을 떠올리며 덜컥 굳자, 등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어떤 향기도 혼자서는 즐겁지 않으리.”
레나였다.
“사람의 소리에 지쳐 잠시 떠났어도 좋은 것만 보고 맡으며 마음을 달래도 종국엔 그대를 그리며 함께하길 바라리라.”
레나가 돌연 노랫말 같은 것을 읊자 칼리고는 더 당황했다.
“당신에겐 과분한 시지만 빌려줄게.”
시? 빌려줘? 칼리고가 당혹스러워하자 레나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주장하고 싶겠지. 당신이 그렇게 된 게 자기 탓만은 아니라고. 그건 나도 인정해. 당신은 불행하고 불쌍했어.”
레나의 인정에 칼리고의 눈이 크게 뜨였다. 희망을 찾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기대의 빛은 이어진 레나의 반문에 도로 꺼졌다.
“하지만 그래서?”
레나는 아까부터 묻고 싶었다. 그래서, 대체 어쩌길 원하냐고. 외면당해 상처 입은 남자아이라고 반드시 망가져야 하는 건 아니다. 분노에 휩싸여 비탄을 토해낼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되었다면, 도무지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어 망가진 남자나 원한을 품은 복수자가 되었다면, 나아가 사방에 분노를 토해내는 괴물이 되었다면, 그건 자신이 짊어질 몫이다.
“동정을 구하고 싶었어? 아니면 자비? 그것도 아니면, 당신을 이해하고 도울 친구?”
레나는 칼리고의 의도를 신랄히 열거하다가 도로 혀를 찼다.
“힘이 있을 땐 거리낌 없이 주변을 난도질하더니 자기가 불리해지니까 그제야. 너무 뻔뻔하잖아.”
“그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동정은 해줄게. 하지만 용서는 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단 한 번도 용서를 빈 적 없으니까. 이제 와서 기회를 달라고 하기엔…….”
레나는 기회라는 말을 잠시 되뇌다가, 자신의 오랜 악연에게 속삭였다.
“너무 늦었어.”
레나가 말을 맺자 린의 몸이 덜컥 무너졌다. 칼리고는 무언가 당기는 감각에 당황하다가, 몸에 닿은 하얀 손을 발견하고 기함했다.
“이, 이거 놔라!”
칼리고가 그 손들을 뿌리치려 했지만 투명한 손들은 떨쳐 지지 않고 린의 몸을 구속했다. 이윽고 몸을 타고 올라온 손 하나가 린의 뺨을 쓰다듬는 순간, 그 안에 있던 칼리고는 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칼리고는 눈을 홉떴다. 하얀 손길에 담긴 기억이 그에게 흘러 들어갔다. 그들은 모두 한 명의 사람이었고, 하나의 생애를 살아갔다. 하지만 그 생은 한 왕을 만나 끝없이 어그러졌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아파하며 자비를 구하고 기적을 바랐지만 결국 덧없이 생을 빼앗겼다. 그 순간의 고통이 칼리고에게 쏟아졌다.
“그만……!”
칼리고는 그것을 피하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가 과거에 죄 없이 빌던 여인들을 끝내 용서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도 그를 한사코 놓아주지 않았다. 몸부림치던 린의 눈이 붉게 변했다. 칼리고는 힘으로 빠져날 작정인지 제 발밑으로 피 같은 뱀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막상 머리를 치켜드는 순간, 뱀들은 그대로 굳으며 도리어 새로 피는 백합의 양분이 되었다.
“어떻게 이런…….”
“당연한 거야.”
경악하는 칼리고에게 레나가 담담히 말했다.
“당신이 누굴 짓밟아서 그 자리에 있는지 생각해 봐.”
많은 심장을 가진 왕. 마음이 산산히 깨진 자. 그래서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온당히 사랑 받지 못한 왕. 그럼 차라리 혼자가 되었으면 좋을 텐데, 당신도 결국 인간이라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사람을 찾았다. 그 어떤 향기도 혼자서는 즐겁지 않아 악착같이 여인들을 불러들였다. 곁에 누군가 머무르길 바라면서도 그들을 의심하고 미워하더니 종국엔 폭력의 기쁨을 알게 되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잡아먹었다. 그렇게 배불리 먹어치운 여인의 피가 널 무덤의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니까 권리는 충분히 있어. 여긴 당신의 영역이기 전에 우리가 묻힌 곳이니까.”
레나의 말에 린의 얼굴이 절망으로 젖어들었다. 레나는 그 모습이 참 싫다고 생각했다. 린이 아닌 걸 알지만 저래선 마치 린이 괴로워하는 것 같다. 그래서 지켜보기 힘들었지만 레나는 눈을 떼지 않았다. 힘을 쓸 수 없는 걸 확인한 칼리고는 허우적대며 팔을 휘저었다.
“그만 해라, 저리 가!”
칼리고는 괴로워하며 소리쳤고, 린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졌다. 그는 몸부림치다 못해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땅을 기었다. 손에 잡히는 백합을 쥐어뜯으며 필사적으로 몸을 사렸다. 흩어지는 백합의 꽃잎은 희고 순결했지만, 정작 그의 망막에 비치는 광경은 어둡기만 했다. 그의 눈앞엔 칼리고 자신이 가득했다. 웃으며 주먹을 휘두르고, 무심히 난도질하고, 피를 핥다가 도로 뱉고 누군가의 신음과 울음을 깔깔 비웃는 테메툼 칼리고의 얼굴이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으아아악!”
바닥을 기던 칼리고는 결국 소리를 지르더니 그 자리에 머리를 파묻고 신음했다.
“그만해, 살려줘, 제발 부탁이야…….”
순전한 고통 앞에 칼리고는 결국 무너졌다. 그 비참한 왕에게 손들이 속삭였다.
―왕이여,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는가?
하지만 칼리고는 짐승처럼 울부짖기만 할 뿐이었다. 그게 그의 대답이었다.
―우리는 기억한다.
―너의 이름을.
―그때의 표정을.
―우리에게 했던 모든 말을.
담담히 이어지는 말에 칼리고는 숨을 쉬지 못하는 것처럼 헐떡이며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왕을 중심으로 다시금 꽃보라가 몰아쳤다. 꽃잎이 눈처럼 휘날리며 왕을 뒤덮었고, 왕은 차라리 죽기를 바라며 몸을 덜덜 떨었다. 죄 많은 왕에게 천둥 같은 음성이 떨어졌다.
―기억하라.
―다시 생각하고 떠올려라.
―우리를 기억할 때까지 그대, 결코 용서받지 못하리라.
그리고 벼락이 내린 듯,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 . . 세상은 다시 고요해졌다. 태풍은 멈추고 흔들리던 백합도 다시 고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레나는 높게 피어난 꽃대를 헤치며 저 멀리 쓰러진 린에게 다가갔다. 레나가 다가오자 린을 감싸고 있던 손들이 물러났다.
“고마워요.”
레나의 인사에 손들도 가벼운 손짓으로 화답했다. 레나가 린의 옆에 앉아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차분히 숨을 쉬었지만 어째선지 깨어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레나가 그를 살피는데 손들이 어디선가 반짝이는 것을 가져왔다. 칼리고의 모조 심장인 규였다. 칼리고는 쏟아지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택했다. 일종의 도피였다. 레나는 칼리고와의 악연이 이렇게 끝났다는 생각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때 손들이 물었다.
―이것도 용서받지 못한 왕에게?
“네. 이제 하나 남았네요.”
사자 왕. 이제 남은 왕은 그뿐이다.
“마지막 심장까지 바치면 망자의 왕 전원이 제국에 있는 셈이죠.”
왕은 영역을 만들고 영향을 끼치는 존재. 그러니 이제 제국에도 왕들의 영역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망자의 왕들은 레나 루벨의 매개. 그러니 그 혼란의 순간 오면 온 세상이 알게 될 것이다. 왕이 밟은 땅에 누가 묻혀 있는지. 그대들이 밟고 선 세상이 누구의 피와 살인지. 레나가 조용히 끝을 헤아리는데, 손들이 다시 물었다.
―이 사람은 연인?
―사랑해?
―사랑하고 있, 어?
뜻밖의 물음에 레나는 주저하다 쓰게 웃었다. 연인이다.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있으니 더 생생하게 와 닿는다. 우리가 머지않아 헤어져야 함을. 그래서 레나가 조용히 쓴 물을 삼키는데, 손들이 걱정스레 속삭였다.
―이대론 깨어나지 못해.
―갇혔어.
―악몽에.
―지배에.
―너처럼.
손들의 말에 레나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갇혔다, 나처럼?
‘히엠스 그라샤 때와 비슷한 상황인가?’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문제가 남아 있었다. 레나는 근심 어린 눈으로 린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할 때였다. 굉음과 함께 레나가 펼친 새하얀 하늘이 무너졌다. 그리고 커다란 기둥이 내리꽂혔다. 아까 무너진 천장을 떠받치던 그 기둥이었다. 그런데, 움직인다.
‘뭐지?’
놀라서 눈을 홉 떴던 레나는 곧 깨달았다. 그건 기둥이 아니라 뱀이었다. 너무 커서, 그리고 아까는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미동도 없이 천장을 떠받쳐서 착각한 거였다.
‘왜 망자가 남아 있지?’
칼리고는 심장이 뽑혔는데. 레나는 당혹스러워하며 자신의 옆에 놓인 규를 바라보았다. 그때 레나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거대한 뱀의 비늘이 무너졌다.
‘너무 커서 소멸이 늦은 건가?’
틀린 추측이었다. 뱀의 형상이 무너지고 그 안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레나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나자 아이테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