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죽음이 우릴 갈라놓더라도2021.10.04.
레나의 대답에 린의 눈매가 부드럽게 접혔다. 간절히 기다려온 대답을 겨우 얻고 짓는 안도의 미소였다. 깊게 안도하는 린을 보며 레나는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거짓말 같아요.”
“뭐가?”
“당신이요.”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망자의 왕이 되기로 결심했을 때 레나는 지상에서의 삶을 포기했다. 버림받는 것에 지쳐 자신처럼 버림받은 자들을 위해서만 존재하기로 했다. 그럼 더 이상 배신당할 일은 없으니까. 레나는 그렇게 초연해지기를 택했다. 그런데 린이 그 마음을 흔들던 끝에 기어이 뒤집었다. 때문에 레나는 전복된 뗏목을 잡고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
“이제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데.”
“더 좋은?”
레나가 두려움을 감춘 채 중얼대자, 린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곤 레나의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속삭였다.
“이 이상 좋을 수는 없어.”
경계 없이 안겨 오는 린 때문에 레나의 마음은 또 한 번 허물어졌다. 이 기분을 표현하는 데 항복이라는 말보다 정확한 것은 없었다. 부모에게 던진 사랑도 친구에게 가진 믿음도 보답받지 못해 강해진 레나였다. 레나에게 린은 비현실적이었다. 거짓말 같고,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이 사람과 같이 있고 싶었다. 설령 또 배신당하더라도. 레나는 린의 목에 팔을 감으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곤 덧없이 푸념했다.
“우린 왜 이런 형태로 만났을까요?”
“괜찮아.”
“괜찮아?”
“어쨌든 널 만났으니까.”
다정하게 속삭이는 린 때문에 레나는 또 한 번 눈을 질끈 감았다. 너한테까지 버림받으면 나는 정말 산산조각 부서지겠지. 하지만 이젠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린이 레나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레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할 기분으로 자신을 간지럽히는 연인을 쓰다듬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예전 같으면 물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그를 메칠 준비를 해야 하는데, 다정히 서로를 만질 수 있다는 게 새삼 또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가슴이 떨렸다. 이윽고 연인이 입을 맞춰왔다. 아까 확인하듯 나눈 입맞춤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린은 거리낌 없이 레나에게 다가갔고, 레나는 린을 때려선 안 된다는 사실을 되뇌며 속수무책 응했다. 애정이 담긴 키스에 레나는 저도 모르게 떠올렸다. 연인이 되기로 한 날에 했던 결심을.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기로 했다. 레나는 그 결심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이젠 죽음이 우릴 갈라놓더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 . . 다행히 린은 보수적인 청년이었다. 연인이 마음을 열어준 것에 진심으로 기뻐했지만,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을 방해할 저주가 없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레나를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는 연인에게 입을 맞춘 후 힘겹게 물러났고, 서로를 더 원하는 마음을 참아낸 두 사람은 조금 민망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이 편지는 챙겨가요.”
“응…….”
“여기가 어딘지 알았으니까 이제 돌아가야겠네요.”
레나가 상기된 얼굴을 감추려고 서둘렀다. 린도 비슷한 기분으로 고분고분 따랐다.
“요새까지 걸어서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걸어가면 사흘은 걸릴 거야. 숲을 빠져나가는 데만 이틀이고.”
“숲에서만 이틀이요?”
“지형이 험해서 많이 돌아가거든. 그래도 숲만 빠져나가면 요새까진 금방 갈 수 있어. 게다가 숲 밖엔 초소도 있고.”
“거기 사람들이 남아 있길 기대해봐야겠네요.”
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레나는 그 손을 마주 잡고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벗어났다. 두 사람은 공터를 지나 목책이 쓰러진 곳으로 다시 나왔다. 목책 옆엔 작은 초소가 있었고, 혹시나 하며 그 안을 둘러본 린은 말린 고기와 비스킷 같은 비상식량을 찾아냈다.
“우리 얼마나 안 먹었지?”
“모르겠어요. 시간관념이 엉망이라.”
“계속 안 먹어도 되는 거야?”
“음, 그럼 아마 죽겠죠?”
레나의 발랄한 전망에 린은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곤 레나에게 식량 반을 건네고 자신도 음식을 입에 물었다. 무덤에 머무는 동안 먹는 것을 잊고 있었다. 오랜 시간 그게 당연해져서 무덤 밖으로 나오고도 배고픔을 몰랐는데, 막상 입에 음식을 넣으니 허기가 밀려왔다. 그래서 레나는 걸어가는 동안에도 퍽퍽한 비스킷을 꼭꼭 씹어 삼켰다. 린이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자 시선을 느낀 레나가 물었다.
“왜요?”
“아무거나 잘 먹는다 싶어서.”
“숙녀한테 할 말인가요?”
“좋은 뜻이야.”
레나가 살벌하게 웃자 린은 침착하게 해명했다. 그러곤 더 먹으라며 자기 몫의 육포를 레나에게 꼭 쥐여 주었다. 레나는 눈을 흘기면서도 식량을 거부하지 않았다.
“음식은 거의 안 가려요. 무덤에서 다시 돌아왔을 때 엄청 가난했거든요.”
레나가 육포를 찢으며 말했다. 새삼 기억났다. 유니를 만나러 무덤에서 나온 직후의 일들. 레나의 말마따나 그 당시 레나와 유니는 가난했다. 그냥 가난한 게 아니라 입은 옷 한 벌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그 시절엔 뭐든 소화만 되면 식량으로 삼았었다. 레나의 이야기에 린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누가 도와주진 않았어?”
“도움이야 많이 받았죠. 주로 강도나 인신매매범에게요.”
“……그랬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레나와 유니, 이 두 사람이 뒷골목의 이인조라는 걸. 외견에 속아 접근한 자들을 털어 여비를 마련하던 역습의 소녀들. 린은 합이 잘 맞는 두 사람을 떠올리며 실소했다.
“유니하고는 쭉 같이 지낸 거지?”
“네, 제가 신세를 많이 졌죠.”
레나는 즐거운 목소리로 유니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레나는 강하지만 생활력이 부족했고, 유니는 약하지만 생존력이 차고 넘쳤다. 덕분에 두 사람은 서로를 완벽하게 보완했다. 칠칠치 못한 아가씨의 뒤치다꺼리는 유니의 몫, 그런 유니를 지키는 건 레나의 몫이었다. 린은 그 이야기를 웃으며 듣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유니는 알고 있어?”
“뭘요?”
“네가 무덤으로 돌아간다는 거.”
기습 같은 물음에 레나는 잠시 주저하다 대답했다.
“……아뇨, 말 안 했어요.”
그러곤 이렇게 덧붙였다.
“대신 준비는 하고 있어요. 유니가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게.”
이건 유니가 아직 모르는, 레나와 유니가 가난한 첫 번째 이유였다. 레나는 유니 몰래 마련해둔 집과 모아둔 재산이 있었다. 그건 무덤으로 떠나며 유니에게 넘겨줄 것들, 그러니까 일종의 유산이었다.
“남부에도 돌봐달라고 할 거지만, 자기 재산이 있으면 더 당당할 수 있겠죠. 그리고 유니라면 잘할 거예요. 이미 열 살 때부터 돈 관리는 저보다 나았거든요.”
레나는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빼놓은 걸 스스로도 아는 탓이었다. 그래서 린도 그 앞에서 이야기를 더 할 수 없었다. 유니가 슬퍼할 거라든지, 아이에게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든지. 레나가 무덤으로 떠나면 버림받는 건 본인도 마찬가지여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린은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고 생각하며 걷다가 여태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을 퍼뜩 떠올렸다.
“아, 유니.”
“유니요?”
“지금 우리 고향 사람들이랑 있어.”
“네?”
뜻밖의 말에 레나의 눈이 다시 커졌다. 린은 칼리고의 이름을 알아내려고 휘에게 연락했다가 유니가 거기 있는 것도 알게 됐다. 중요한 이야기인데 경황이 없어서 여태 말을 못 하고 있었다.
“유니가 왜 거기 있어요?”
“자세한 얘긴 아직 못 들었지만…….”
린은 유니가 망자의 입을 맨손으로 벌리던 것을 떠올리며 중얼댔다.
“원래 그 동네 애인 것처럼 지내고 있었어.”
“우리 유니가 어디서 기죽을 애는 아니죠.”
레나는 알 만하다는 듯 끄덕였다. 그러곤 덧붙였다.
“그나저나 정말 의외네요.”
무사하다면 아무래도 좋지만, 설마 동부 사람들과 함께 있을 줄이야. 레나는 이대로 요새에 가야 할지 유니를 찾으러 가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그래서 린과 상의했고, 곧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린은 더 이상 망자를 지배할 수 없었다. 그건 전처럼 능수능란하게 까마귀를 연기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다. 린이 필요할 때 까마귀 탈과 망토를 가져오던 망자가 모조리 사라진 지금, 그들은 동부인의 은신처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우선 요새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큰 숲에서 이틀을 더 보냈다. 숲에서 눈을 뜬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그들은 드디어 숲의 끝에 다다랐다. 우거진 나무 그늘에서 벗어난 두 사람은 드넓게 펼쳐진 서부의 평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장 당혹감에 빠졌다.
“저게 뭐죠?”
멀리 보이는 균열, 그 주변에 무언가가 날고 있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다. 아니, 군단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규모였다. 하늘에 진을 친 그것들은 마치 용처럼 커다란 날개와 기다란 꼬리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린이 그 형상을 확인하고 신음하듯 중얼댔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
뱀과 용의 형상을 한 망자들. 왕이 된 나자의 망자들이었다. 레나와 린은 그 광경을 아연히 바라보았다. 니힐을 치겠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이야. 그때 평야 저편에서 까마귀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린은 소리를 찾아 두리번대다가 또 한 번 경악했다. 숲에 갇혀 있어야 할 까마귀들이 폐허가 된 서부 도심을 누비고 있었다. 까마귀가 울자 하늘에서 용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네발로 달리는 것들도 함께 날뛰었다. 사자를 가둔 왕의 망자들이었다. 망자들이 격돌하며 이미 버려진 도시가 다시금 파괴되었다. 마치 태풍이 흙먼지를 쓸어 담듯 모든 것을 부수고 쪼갰다. 그걸 지켜보던 린의 시야에 다시금 이질적인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이미 거대한 균열이 일렁이더니 그 규모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무덤의 붉은 하늘이 세상의 파란 하늘을 침범했고, 대지 역시 점차 검게 물들었다.
“안 돼…….”
린은 뒤틀리는 균열을 보며 신음했다. 균열이 점차 집어삼키기 시작한 숲은 동부인들의 은신처였다.
“린 씨!”
레나의 부름에 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돌아보니 레나가 가까운 초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에 사람은 없었다. 다만 기사들이 철수하며 두고 간 말들이 아직 마구간에 묶여 있었다. 두 사람은 마구간으로 달려가 곧장 말에 올라탔다. 그러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균열의 뒤편, 동부인들의 은신처로 향했다. *** 나자의 망자들이 서쪽 하늘을 채우기 사흘 전이었다. 요새에서 깨어난 루비드는 홀로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젠장, 다들 어디 간 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레나 루벨이나 이우라, 그리고 리그난 아이테르너도 곧 발견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도 아무 소식이 없자 그는 점점 조바심이 났다.
‘설마 나 혼자 살아남은 건 아니겠지.’
모를 일이다. 무덤에서 벌어지는 일에 한계는 없으니까. 루비드는 안절부절못하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더니 책상에 놓인 종을 신경질적으로 흔들었다. 종소리에 문밖에 있던 기사가 들어왔다. 그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루비드가 신경질을 냈다.
“루벨은 왜 이렇게 안 와!?”
“남부공과의 회의가 길어지는 모양입니다. 마치는 시간을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됐어.”
“예?”
“기다릴 바엔 내가 직접 가고 말지.”
루비드는 이를 갈며 기사에게 턱짓했다. 회의 장소로 안내하라는 뜻이었다. 어제 루벨 후작이 여기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곧장 그를 찾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일정이 있다는 이유였다.
‘안 불러도 알아서 나타나던 주제에…….’
루비드는 그림자처럼 자신을 보좌하던 루벨이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것에 화가 났다. 황궁에서 루벨의 접견을 먼저 거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똑같이 구는 건 건방졌다. 게다가 그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근신 중에 여기 나타난 이유라든지, 요새에 균열을 만든 배후를 어디까지 추적했는지 등을. 그래서 왕자는 초대받지 않은 회담장으로 향했다. 그러곤 기사들이 말릴 겨를도 없이 굳게 닫힌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러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루벨 후작이 그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하, 여긴 웬일로…….”
“네가 안 나타나서 몸소 찾아왔다. 부른 지 얼마나 됐는데…….”
루비드가 후작을 쏘아보며 짓씹을 때였다.
“제국엔 예의를 모르는 애송이가 너무 많군.”
노인의 쉰 목소리가 루벨이 앉은 테이블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루비드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그게 누구 목소리인지 알면서도 흠칫 놀랐다.
“부르지 않았는데 무슨 일인가, 왕자여.”
그렇게 중얼대는 남부공은 이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마르고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병든 사람처럼, 혹은 맹독에 중독된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