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영리한 왕자2021.10.07.
기세등등하게 문을 박찬 루비드는 남부공을 보고 얼어붙었다. 설산의 호랑이 같은 영감이었다. 비록 늙었지만, 기세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제국의 공작이었다. 그런데 몇 달 만에 다시 본 그는 거짓말처럼 쇠약해져 있었다.
“무슨 경우인지 물었네만.”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잔뜩 쉰 목소리에선 예전의 근엄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루벨 후작에게 볼일이 있어서.”
“그래서 회담장의 문을 박찼단 말인가? 자네 형이 이 꼴을 안 봐서 다행이군.”
루비드의 변명에 남부공이 핀잔했다. 하지만 루비드는 짜증조차 나지 않았다. 남부공의 당혹스러운 격변 때문이었다.
“저하, 앉으시겠습니까?”
그때 후작이 끼어들었다.
“진작 모셔야 했는데 아직 쉬셔야 할 것 같아 기별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 의자를 빼며 말했다. 그 깍듯한 환대에 루비드는 재차 당황했다.
‘뭐야, 평소랑 똑같잖아?’
불러도 오지 않기에 원한을 품었나 했는데, 후작의 태도는 예전처럼 살가웠다. 루비드는 후작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다 자리에 풀썩 앉았다.
“북부와 남부의 병력 교대 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왕자가 앉자 후작이 설명했다. 그러더니 진중한 태도로 멈췄던 논의를 다시 이어갔다. 루비드는 팔짱을 낀 채 그들의 회담을 지켜봤다. 허락도 없이 나타난 루벨이 얼마나 주제넘은 짓을 하는지 볼 셈이었다.
“남부의 부담은 이해합니다. 그러니 그 부분은 저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다만 우리 쪽 기사들의 사기를 고려해서 수색의 주도권은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 점은 제가 혼자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지휘권을 가진 자들과 논의한 후 답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루벨 후작은 루비드의 날카로운 감시에도 불구하고 점잖고도 영리하게 논의를 이어갔다. 이우라의 자리를 꿰찬 것에 으스대는 기색도 없고, 겸손하지만 분명한 태도로 남부공을 대했다. 일부러 흠을 잡으려 해도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였다.
“그대의 제안대로 하지.”
그래서 남부공도 실랑이를 길게 하지 않았다. 몸 상태 때문에라도 용건만 간략히 나누길 바라는 투였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네.”
말을 맺기 무섭게 남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병색은 걸음에서도 드러났다. 남부공은 부관의 부축을 받으며 회담장을 나섰고, 루비드는 그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남부공이 나가자마자 후작이 루비드에게 머리를 숙였다.
“부르시기 전에 뵈러 가야 했는데, 두 분의 빈 자리를 채우려니 경황이 없었습니다.”
후작의 고분고분한 모습에 루비드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경황이고 나발이고, 네가 왜 여기 있어?”
“두 분께서 균열로 넘어가셨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근데?”
“근신 중이지만 상황이 엄중해 감히 나섰습니다. 이우라 저하께서 돌아오시면 다시 물러가겠습니다.”
마치 준비한 것 같은 대답에 루비드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요새를 습격하고 함정을 판 자들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변명 같아 송구하지만 제가 왔을 땐 흔적이라고 할 만한 게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후작은 루비드가 추궁하려던 것까지 알아서 대답했다. 덕분에 씩씩대던 루비드는 화낼 이유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후작을 내친 이유까지 의심하게 되었다. 루비드가 후작을 박대하기 시작한 건 그의 거짓말이 탄로 났기 때문이었다. 후작은 레나 루벨을 모른다고 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래서 왕자는 감히 자신을 기만한 후작을 내쫓았다. 오만하고 철없는 왕자답게 이유를 설명하거나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데 후작은 거기에 서운해하기는커녕 한결같은 충정을 보였다. 그래서 루비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너, 내 옆에 얼마나 있었지?”
“5년……. 햇수로는 6년째군요.”
“5년…….”
루비드가 미간을 좁힌 채 중얼댔다. 무언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후작은 그 얼굴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내가 널 얼마나 오랫동안 길들였는데. 고작 여자한테 넘어가 날 놓을 수는 없는 거다. 네가 은혜라는 걸 안다면. 후작은 갈등하는 루비드를 보며 조용히 만족했다. 이제야 어그러진 것이 제자리를 되찾는 기분이었다. 북부공에게 근신을 명령받았을 땐, 그리고 악의에 찬 딸에게 모든 치부를 들켰을 땐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래 좌절하지 않았다. 북부공이든 돌아온 레나 루벨이든 어찌할 수 없는 상대지만, 주눅들 필요는 없었다. 애당초 사냥꾼은 싸우지 않는다. 그들은 천천히 공들여 사냥할 뿐. 사냥감 몰래 덫을 놓고 치밀하게 목적을 이룰 뿐. 마찬가지다. 비록 최악의 위기를 맞았지만, 후작은 섣불리 절망하지 않고 수면 밑에서 준비했다. 자신을 승리로 이끌 최선의 전략을.
‘이미 몇 번이나 역경을 이겨낸 나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여기까지 왔다. 태생이 고귀해 진흙을 밟아본 적 없는 너희와는 다르다. 후작은 자신의 출신을 수치스러워하면서도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 또 한 번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그는 공작들을 무덤에 밀어넣었다. 서부의 요새는 그의 손바닥 안이나 다름없기에, 배교자들을 매수해 제단을 숨기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발각될 염려도 없었다. 제단을 옮긴 자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으니까. 남부공을 절벽에서 죽이지 못한 건 조금 아쉽지만 대신 차선책이 있었다. 후작은 근 한 달간 남부공에게 독을 주입했다. 은밀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남부공도 처음엔 이상을 느끼고 원인을 찾아보려고 했다. 음식과 물을 거르며 온갖 의심을 했지만, 그는 끝내 독이 어디서 들어오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은 순조롭게 죽어가고 있다. 아직 버티는 게 조금 놀랍지만, 그것도 이제 하루 이틀이면 끝이다. 그렇게 남부공이 사라지면 공작위와 권능은 나의 차지. 하지만 후작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무덤에 떨어진 인물들이 전부 죽어버리면 좋겠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할 작자들이 아닌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후속대책이 필요했는데, 이 와중에 루비드가 가장 먼저 돌아온 건 후작에게 호재였다. 후견자인 남부공이 무너져도 레나에겐 약혼자인 동부공이 남아 있다. 그 강력한 배후를 상대하려면 후작에게도 못지않게 든든한 우군이 필요했다. 그래서 후작은 원한을 뒤로한 채 북부의 형제와 다시 손을 잡기로 했다. 우선 어수룩한 루비드를 다시 회유하는 거다. 소년 시절부터 길러왔으니 자신에게 든 정을 무시하진 못할 터. 그럼 이우라도 알아서 돌아올 것이다. 동생의 일이라면 일단 한 수 접는 게 그 녀석이니까.
“시간이 참 빠릅니다.”
사냥꾼은 덫을 숨긴 채 나긋이 웃었다.
“벌써 5년이라니.”
후작은 루비드가 이 시간을 쉽게 무시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왕자였다.
“……팔에 상처가 난 것도 5년 전이었어.”
아니나 다를까 루비드가 자신의 팔에 손을 얹으며 중얼댔다.
“이게 이우라 때문이 아닌 걸 너는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런데 왜 말 안 했지?”
루비드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문책을 하는 게 아니라 해명을 바라는 투였다.
“이우라 저하의 뜻이었습니다.”
후작은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루비드가 가장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그러곤 속으로 재빨리 궁리했다.
‘어떻게 알았지?’
지난 5년간 루비드는 까맣게 모르던 일이다. 이우라가 제 입으로 직접 말했을 리는 없는데, 그걸 대체 어떻게 알았지? 후작은 의아해하면서도 눈치껏 대답했다.
“이우라 저하는 저하께서 자책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넌 그걸 다 알면서…….”
“저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후작의 대답에 루비드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그럼 레나 루벨이 네 친딸인 건?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했지, 나한테.”
루비드가 독기 서린 얼굴로 재차 묻자, 이번엔 후작도 내심 심각해졌다.
‘의심이 아니라 확신인가?’
묻는 투를 보니 그렇다. 아무래도 그 애가 내 딸인 걸 알아챈 모양이다. 어떻게 알았지? 본인에게 직접 들었나?
‘내게 등을 돌린 게 이것 때문이군.’
거짓이 탄로 나서, 실망해서, 배신감을 느껴서. 레나에게 회유되어 날 박대한 거다. 후작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리고 후련함을 느꼈다. 루비드가 변심한 이유를 알아내려고 온갖 추측을 다 했는데, 어쨌든 원인을 알아냈다. 그럼 해결하는 건 문제도 아니다. 루비드를 다루는 건, 그가 지난 5년간 매일같이 해온 일이니까.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후작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그 인정하는 말에 루비드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명백한 경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해명을 바라는 눈이기도 했다. 그래서 후작은 난감한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아이에게 들으셨습니까?”
“누구한테 들었든 무슨 상관이야.”
“그렇지요. 못난 부모에게 무슨 변명거리가 있겠습니까.”
후작은 시선을 내리깔며 씁쓸히 한탄했다.
“자식을 지키지도 알아보지도 못한 아비에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요.”
형에게 버림받은 줄 알고 낑낑대던 루비드는 아마 레나에게 동병상련의 정을 느꼈을 것이다.
“가문에 큰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을 풀어주면 될 일.
“해결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마침 잘됐다.
“결국 딸애를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의 도량을 알았으니 이 말도 새삼 와닿을 터.
“차라리 죽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견딘 이유는…….”
아니나 다를까 후작의 고백에 루비드는 이를 꽉 깨물었다.
“딸애의 희생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걸, 그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를 갈던 루비드가 돌연 고개를 들었다. 그때 왕자는 상당히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 들었다는 듯, 귀를 의심하는 얼굴이었다.
“……그 애가 사칭이 아닌 걸 알고 집에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후작은 저게 무슨 표정일까 생각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원치 않았습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원한이 깊을 테니…….”
“그만.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까 그만해.”
루비드가 돌연 손사래를 치며 후작의 말을 막았다.
“레나 루벨에 대한 건 이제 됐어.”
질린 기색이었다. 루비드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신경질을 내더니, 형형한 눈으로 후작을 위협했다.
“네 집안일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 문제는 네가 날 속였다는 거지.”
“송구합니다.”
루비드의 짜증에 후작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이 풀린 모양이다. 아니, 판단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덮어놓기로 한 거겠지.
“앞으론 조심해. 부르면 바로바로 오고!”
루비드는 후작을 쏘아보더니 싫증 난 얼굴로 의자를 차며 일어났다. 그렇게 말하는 투는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저하.”
후작이 나직이 중얼대자 루비드는 성가시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곤 팔짱을 낀 채 회담장을 빠져나왔다.
루비드 플레누스가 인상을 쓴 채 복도를 가로지르자 기사들은 알아서 몸을 피했다. 그렇게 성큼성큼 걷기를 한참, 아무도 없는 복도에 다다르자 루비드는 얼굴에 담긴 표정을 모두 지웠다. 신경질도, 짜증도, 한없이 어린 치기도. 그렇게 표정을 지운 왕자의 얼굴은 이전보다 차분해 보였다.
‘……속을 뻔했어.’
루벨 후작에게. 입안의 혀처럼 굴며 비위를 맞춰오는 그의 감언이설에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예전처럼, 너무 쉽게. 하지만 루비드는 더 이상 예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정말 그를 속일 생각이었다면 후작은 감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였다는 말 따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