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화. 성장 (151/208)

151화. 성장2021.10.11.

16562831658751.jpg‘……속을 뻔했어.’

루비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후작이 한 말을 곱씹었다. 처음 그가 해명할 때는 헷갈렸다. 그의 깍듯한 태도에 마음이 누그러진 상태기도 했고, 그가 하는 말도 대부분 이해할 만했다. 그런데 후작이 이어 내뱉은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16562831658751.jpg―딸애의 희생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걸, 그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말은 루비드에게 익숙했다.

16562831658751.jpg―권능을 갈고 닦아 강해지십시오. 그리고 황제 폐하께 가치를 인정받는 겁니다.

과거, 후작이 자신에게도 한 말이니까. 그래. 카르도 루벨은 어린 루비드에게도 속삭였다. 가치를 증명하라고. 이우라의 본심을 알면서 그걸 전하긴커녕 철저히 숨기고 자신의 두려움을 부추겼다. 그렇게 이우라와 자신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가치를 증명하라는 말로 등을 떠밀었다. 형과 데면했던 이유가 전부 후작의 탓이라고 할 순 없지만, 후작이 상당한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다.

16562831658751.jpg‘다 의도한 거였나.’

그걸 깨닫자, 후작이 했던 다른 발언도 덩달아 떠올랐다.

16562831658751.jpg―남부공께서도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닐 겁니다.

16562831658751.jpg―위로가 필요한 사내가 작정한 여자를 어찌 당해내겠습니까?

레나 루벨이 처음 나타났을 때, 후작은 남부공의 초대를 받은 레나를 이렇게 조롱했다. 말로는 점잔을 빼면 퍽도 의미심장하게 모욕했다. 아무렴 그게 아비란 자가 딸에게 할 말인가? 설령 사칭인 줄 알았어도, 자기 딸을 연상시키는 숙녀에게 쉽사리 할 만한 말은 아닐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루비드는 후작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어디서 헛소리를 지껄이냐며 직성이 풀릴 만큼 그를 몰아붙이려 했다. 하지만 루비드는 호통이 목구멍을 넘기 전에 입을 닫았다. 늘 평정을 유지하는 레나와 이우라가 떠오른 탓이었다. 아, 그 두 인간이 왜 그렇게 철판을 깔고 사는지 이제야 알겠다. 이딴 식으로 이용하려 드는 작자들이 있으니 그런 거다. 속내를 들키면 보기 좋게 휘둘려지기 마련이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루비드는 난생처음 감정을 숨겼다. 불편하고 굴욕적이지만 일단은 그렇게 했다. 지금은 성을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 . . 남부공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문 앞에 선 청년에게 물었다.

16562831658787.jpg“예까진 무슨 일인가?”

16562831658751.jpg“……문병.”

16562831658787.jpg“별일이군, 왕자의 병문안을 다 받다니.”

남부공이 중얼대자 루비드는 민망한지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생각하기는 루비드도 마찬가지였다. 남부공의 병문안이라니, 평소라면 떠올리지도 못할 일이다.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니지만 남부공은 그를 내치지 않았다. 노인은 소파에 앉아 느른히 손짓했고, 어색한 걸음으로 가서 마주 앉았다. 남부공은 혼자 차를 마시고 있던 모양인지 테이블에는 차와 다과가 놓여 있었다. 남부공이 차로 입을 축이는 것을 보며 루비드가 운을 뗐다.

16562831658751.jpg“여기 오기 전까진 건강했다며.”

16562831658787.jpg“그랬지.”

16562831658751.jpg“레나 루벨이 곧 올 거야.”

16562831658787.jpg“그렇군.”

16562831658751.jpg“뭐야, 뭐 그렇게 태연해?”

16562831658787.jpg“태연하지 못할 이유는 뭔가? 나이가 나이인 것을.”

노인의 능글대는 말투에 루비드는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16562831658751.jpg“죽어도 미련 없다 이건가?”

도발적인 말투였지만 남부공은 실없이 웃기만 했다. 덕분에 루비드는 한층 더 답답해졌다.

16562831658751.jpg“가더라도 당신 대리인은 만나고 가야 할 거 아냐?”

16562831658787.jpg“내 대리인에게 퍽 신경을 쓰는군. 서로 으르렁댈 때는 언제고 그새 호감이라도 생겼나?”

16562831658751.jpg“무슨 미친 소릴……!”

노인의 시답잖은 농담이었다. 그런데 루비드는 바늘에 찔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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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과민한 반응에 남부공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자, 루비드가 숯처럼 달아오른 낯으로 소리쳤다.

16562831658751.jpg“빚을 졌어!”

16562831658787.jpg“빚?”

16562831658751.jpg“그래!”

루비드는 테이블까지 내리치며 항변했고, 남부공은 테이블에 있던 차가 엎어지지 않게 찻잔과 찻주전자를 슬쩍 들었다. 그러곤 이미 빈 찻잔에 차를 따르며 중얼댔다.

16562831658787.jpg“그럼 이 문병도 빚을 갚으러 온 겐가?”

16562831658751.jpg“……그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거야?”

16562831658787.jpg“모르겠네.”

남부공이 다시 찻잔을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16562831658787.jpg“여기 오고 닷새째였나? 그때부터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어지더군.”

처음엔 피로가 쌓여서 그런 줄 알았다. 요새로 돌아오기 전 절벽에서 떨어져 강물에 휩쓸리기까지 했다. 늙은 몸으로 그 고생을 했으니 탈이 나는 게 당연한 듯도 싶었다.

16562831658787.jpg“처음엔 며칠 쉬면 나을 줄 알았네. 하지만 낫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기력이 점점 빠졌지.”

그래서 병이 들었나 싶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안색이 점차 어두워지고 숨마저 가빠지는데, 의사들은 뚜렷한 병명을 찾지 못했다. 대신 의심했다. 독을.

16562831658787.jpg“그래서 열흘째 되던 날 한바탕 뒤집어놓았네. 내게 올라오는 음식부터 물, 의복, 침구, 심지어는 자주 쓰는 펜대까지.”

16562831658751.jpg“그래서?”

16562831658787.jpg“아무것도 찾지 못했네.”

부관들과 의사들이 남부공의 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의심스러운 것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남부공이 사용하는 모든 것을 새것으로 교체했다. 그럼에도 남부공의 병증은 나아지지 않았고, 그대로 보름이 흘러 이 꼴이 되었다.

16562831658787.jpg“어쩌면 노환일지도 모르지. 나도 벌써 팔십이니.”

남부공이 가볍게 중얼댔다. 이미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인 듯한 태도였다. 루비드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16562831658751.jpg“내일 수색대를 꾸려서 나갈 거야.”

16562831658787.jpg“실종된 자들을 찾으러 말인가?”

16562831658751.jpg“그래. 그러니까 댁도 준비해.”

16562831658787.jpg“나도?”

16562831658751.jpg“못 찾았다며, 그럼 독이 있는지 없는지 아직 모르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차라리 밖으로 돌라고. 대리인을 찾으러 간다고 하면 되잖아.”

16562831658787.jpg“썩 틀린 말은 아니네만, 그대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 싶군.”

16562831658751.jpg“……말했잖아. 레나 루벨에게 빚이 있다고.”

루비드는 억지로 구실을 짜냈다. 실은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나서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남부공이 이대로 죽어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레나 루벨의 ‘남부공 대리’라는 입장이 애매해질 수도 있으니까. 루비드는 그런 상황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6562831658787.jpg“그래서 빚을 갚을 겸 날 돕겠다는 건가?”

남부공의 확인에 루비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소년처럼 머뭇대는 모습에 남부공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16562831658787.jpg“내가 대리인 하나는 잘 둔 모양이군. 그 북부 왕자가 남 일에 발 벗고 나서게 하다니.”

16562831658751.jpg“딱히 발 벗고 나서는 건…….”

루비드가 언짢은 듯 중얼댔다. 하지만 진심으로 불쾌한 기색은 아니었다. 잠시 웃던 남부공이 돌연 기침을 터트렸다. 그는 마치 폐병에 걸린 사람처럼 연신 기침을 하더니, 황급히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16562831658787.jpg“제안은 고려해보겠네. 할 얘기가 끝났다면 그만 가보게.”

겨우 기침을 가라앉힌 남부공이 서둘러 말했다. 루비드는 남부공이 편찮은 것을 알고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비드가 나가기 전에 남부공이 뜬금없이 물었다.

16562831658787.jpg“자네 과자 좋아하나?”

16562831658751.jpg“누가 앤 줄 알아?”

16562831658787.jpg“아니었군. 실례했네.”

남부공은 영문 모를 말을 혼자 중얼댔고 루비드는 혀를 차며 돌아섰다. 루비드가 문을 쿵 닫고 나가자 남부공이 침실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16562831658787.jpg“갔으니 그만 나오너라.”

남부공의 명령에 침실의 베일 뒤에서 한 소년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사제복을 입고 손에는 찻잔을 든 앳된 소년, 엔지였다.

16562831658787.jpg“자네에 이어 저 왕자까지 찾아올 줄은. 발 넓은 대리인 덕분에 북부와의 연이 날로 깊어지는군.”

남부공의 농담에 엔지는 얼굴을 붉히며 걸어왔다. 그러곤 루비드에게 잠시 양보했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남부공이 엔지의 손에 들린 찻잔을 보며 덧붙였다.

16562831658787.jpg“그러고 보니 저 친구에겐 차 대접을 못 했군.”

16562831769558.jpg“왕자 저하의 차는 다음에 제가 챙겨드리겠습니다.”

엔지는 남부공을 어려워하면서도 의젓하게 대답했다. 그러곤 아직 조마조마한 가슴을 몰래 쓸어내렸다. 루비드가 너무 갑자기 찾아왔다. 그래서 남부공과 비밀리에 독대하던 엔지는 찻잔을 든 채 후다닥 숨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아픈 남부공이 혼자 과자를 두고 차를 마시던 모양새가 되었지만, 다행히 루비드는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16562831769558.jpg“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16562831658787.jpg“그래, 자네가 준 차 덕인지 전보다 한결 낫군.”

엔지의 물음에 남부공이 찻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이 소년 사제가 남부공을 찾아온 건 닷새 전, 남부공의 병세가 날로 심해지던 시기였다. 엔지는 심방이라는 핑계를 대며 혼자 찾아왔다. 남부공의 비서는 그가 루벨 후작의 아들이라는 걸 알고 방문을 거절했지만, 그 소년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이렇게 애원했다.

16562831769558.jpg―유니가 제게 과자를 줬어요.

16562831769558.jpg―그러니까 저도 저하께 차를 올리게 해주세요.

아무 설득력 없는, 맥락조차 모호한 생떼였다. 하지만 비서는 그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유니, 남부공이 퍽 예뻐하던 죽은 아이. 엔지가 그 이름을 들먹이자 비서는 짐짓 당황했고, 결국 소년 사제의 간절한 눈빛에 못 이겨 남부공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로써 엔지는 병색이 뚜렷한 남부공과 마주하게 되었다.

16562831658787.jpg―내게 차를 올리겠다고.

16562831769558.jpg―네, 저하.

엔지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손수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남부공이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자 엔지가 설명했다.

16562831769558.jpg―기운이 없으시다고 들어서, 몸에 좋은 차를 가져왔습니다.

16562831658787.jpg―그대가 여기 온 걸 후작은 아는가?

16562831769558.jpg―……아니요.

엔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며, 하지만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남부공을 바라보며 찻잔을 내밀었다. 남부공은 엔지의 동그란 얼굴에서 레나를 발견했다. 그래서 소년이 건넨 차를 잠자코 받아 마셨다. 차 맛은 쓰고 역했다. 그래서 남부공이 금방 입을 떼자 엔지가 다 마셔야 한다고 채근했다. 그래서 남부공은 약을 마시는 심정으로 찻잔을 비웠다. 그리고 그날 밤, 남부공은 간만에 깊게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날엔 몸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엔지가 남몰래 남부공을 찾아오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16562831658787.jpg‘열 명도 넘는 의사가 찾지 못한 약을 가져오다니…….’

남부공은 엔지가 기특한 만큼 의심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루벨 후작을 고문해 자백을 받아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엔지 루벨은 오늘도 입을 다문 채 묵묵히 차를 우렸고,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은 남부공도 그의 침묵에 어울려주었다.

16562831658787.jpg“저 왕자는 노인까지 수색에 참여시키려 하는군.”

남부공이 혀를 차자 엔지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게 웃는 소년은 참 선해보였다. 동시에 어딘지 우울한 기색도 있었다. 남부공은 그게 유니 때문인 걸 알았지만, 유니가 살아 있는 걸 엔지에게 알려주지는 않았다. 엔지가 이 차의 출처를 숨기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남부공은 엔지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며 유니를 떠올렸다.

16562831658787.jpg‘슬슬 데리러 가기는 해야겠군.’

원래는 일주일 안으로 데려올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병이 도지는 바람에 한 달이나 방치하고 말았다. 이 성치 않은 몸으로 나선다고 하면 다들 말리거나 쫓아올 것이 뻔했다. 그런데 마침 괜찮은 핑계가 생겼다.

16562831658787.jpg‘수색이라니, 마침 좋은 기회 아닌가?’

남부공은 루비드의 제안에 못 이기는 척 유니를 데리러 가기로 결심했다. 균열에서 나자의 군대가 몰려나온 건,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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