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선전포고2021.11.04.
서부는 망자들에게 함락되었다. 균열이 더 크게 벌어진 날, 그리고 날개를 가진 망자들이 하늘을 검게 수놓은 날로부터 고작 보름만이었다. 제국군은 더 버티지 못하고 서부 접경지의 보루인 장벽을 버리고 퇴각했다. 그때 그들은 들었다. 하늘에서 울리는 천둥 같은 목소리를. 서부를 장악한 망자의 왕은 하늘 높은 곳에서 제국군에게 선언했다.
―나는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이다.
―누더기가 된 심장을 기워내려고 돌아왔다.
―나는 첫눈이 내리기 전에 제국의 황제, 니힐 그라샤를 칠 것이다.
선전포고였다. *** 9월로 접어들며 가을의 청명함이 완연해졌다. 하지만 그 반가운 계절과 반대로 수도의 분위기는 암울했다. 과거 위풍당당하게 수도를 떠난 기사들은 반년 만에 패잔병이 되어 돌아왔고, 그보다 한발 먼저 도착한 소문은 민심을 뒤숭숭하게 흔들었다. 그래서 기사들의 행렬에 환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환호가 어울리는 상황도 아니었다. 남부 기사의 행렬 가운데엔 거대한 관이 있었다. 남부공이 영면에 든 관이었다. 패잔병의 귀환은 그 자체로 거대한 운구행렬이었고, 그 앞에는 남부공의 대리인인 레나 루벨이 있었다. 레나는 표정 없이 정면을 주시하며 말을 몰았다. 자신의 뒤에 관이 있는 것을, 한사코 믿지 않으려는 듯이. . . . 서부에서 레나가 유니를 가까스로 찾은 직후였다.
‘불?’
레나는 높은 나무 위로 솟구치는 거대한 불길을 보았다. 단순한 산불이라기엔 형태도 기세도 비범한 화염이었다.
‘히엠스 그라샤?’
그 불을 본 레나는 태움과 그을림의 왕을 떠올렸다. 하지만 레나가 착각하기 전에 안장 앞에 앉은 유니가 소리쳤다.
“영감님이에요!”
“남부공 저하요?”
“네, 영감님이 절 찾으러 왔나 봐요!”
일전에 남부공의 업화를 본 적이 있는 유니가 소리쳤다. 그 말을 듣고 다시 하늘을 보니, 새빨간 불길이 까마귀들을 태우는 게 보였다.
“이랴!”
전투를 직감한 레나가 말의 배를 걷어찼다. 서둘러 남부공에게 가기 위해서였다. 권능을 숨겨두고 절대 사용하지 않던 남부공이다. 그런 노인이 돌연 불을 일으켰다는 건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의미. 불길한 예감에 레나는 불이 치솟은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하지만 이미 지쳐 있는, 게다가 세 사람이나 등에 업은 말은 좀처럼 빠르게 달리지 못했다. 게다가 길이 없는 이 숲속은 말을 달리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레나는 마음처럼 빨리 남부공에게 갈 수 없었다. 레나와 유니, 그리고 이우라까지 태운 말이 돌연 나타난 낭떠러지 근처에서 서성일 때였다.
“어? 불이 꺼지고 있어요!”
유니가 숲 저편을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유니의 말마따나 마구 소용돌이치던 불길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었다. 불안해진 레나는 말을 채근해 낭떠러지를 가로질렀다. 그러곤 연기가 자욱한 숲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렇게 잔불을 뛰어넘어 도착한 곳에서 레나와 유니는 발견했다.
“하, 할아버지!”
재가 된 숲속에 홀로 고요히 누운 남부공을. 남부공을 본 유니가 먼저 뛰어내렸고, 레나는 유니를 잡아주며 함께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남부공 앞까지 달려간 두 사람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만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앞에 놓인 짙은 죽음의 기운을. 남부공은 핏기없는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가슴엔 두 발의 화살이 박혀 있었고, 그 아래 고인 흥건한 피는 흩날리는 재와 섞여 이미 변색되어 있었다.
“아, 안돼…….”
유니가 덜덜 떨며 남부공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노인의 주름진 뺨을 만지다가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사람의 피부가 아니라 짚더미를 만진 기분이었다. 유니의 눈에 점차 눈물이 고이기 시작할 때, 망연자실 서 있던 레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부공의 가슴에 박힌 두 대의 화살. 망자가 아니라 사람에게 살해되었다는 명백한 증거. 레나는 저도 모르게 린의 동포들을 떠올리고 하얗게 질려버렸다.
‘설마…….’
하지만 그 최악의 오해는 다행히 오래가지 않았다.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돌아온 린 때문이었다. 남부공의 죽음을 확인한 린은 레나 못지않게 당황했다. 하지만 뭐라고 설명할 겨를은 없었다. 레나의 뒤에 선 이우라와,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루비드와 기사들 때문이었다. 루비드는 당황하면서도 기사들에게 부상자인 북부공과 동부공을 부축하고 남부공의 시신을 수습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곤 날뛰는 망자를 피해, 남부공의 죽음을 규명하지도 못한 채 서둘러 장벽으로 돌아왔다. 인간의 소행임이 너무 분명했기에 기사들은 이것이 배교자들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린은 장벽으로 돌아오자마자 레나에게 찾아가 해명했다.
“남부공이 우릴 도와줬어. 혼자 망자들을 막고 우리를 대피시켰어.”
레나는 그 말을 믿었다. 유니 역시 동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고 했으니, 자신이 무덤에 들어간 사이 남부공과 동부 사람들 사이에도 우호적인 관계가 생겼을 가능성은 얼마든 있다. 그럼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혼란스러워하던 레나에게 곧 한 가지 소식이 전해졌다. 근 한 달간 요새를 지키던 루벨 후작이, 급하게 수도로 돌아갔다는 소식이었다. . . . 황궁의 대성당에서 장송곡이 흘러나왔다. 남부공의 장례식은 클라비스 추기경의 집례로 엄숙히 진행되었다. 남부공 빌 알레스에게는 가족이 없기에 그의 측근들이 가장 앞자리에 섰다. 그 가운데엔 검은 상복을 입은 레나와 유니도 함께 있었다.
파이프 오르간으로 연주되던 장엄한 음악이 찬찬히 잦아들며, 새하얀 성의를 입은 클라비스 추기경이 대성당의 단상 위에 섰다. 관 앞에 선 클라비스는 마치 남부공을 데리러 온 천사처럼 자애롭게 속삭였다.
“오랫동안 제국을 지켜온, 황제 폐하께서 가장 아끼던 이가 여기 잠들었습니다. 빌 알레스 그라샤. 그는 제국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로,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전사로, 또 남부의 부흥을 시작한 성군으로 모두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추기경의 가식에 찬 추도사에 남부의 충신들은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은총이 있기를.”
하지만 클라비스는 개의치 않고 성호를 그었다. 그러곤 웃음을 참는 얼굴로 한걸음 물러났다. 추기경이 한 발 뒤로 물러나자,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앞으로 한 사람이 돌연 모습을 드러냈다. 장례식임에도 여전히 자유분방한 옷차림을 한 여인, 황제 니힐이었다. 니힐은 구두를 또각대며 나오더니 단상 위에 편하게 걸터앉았다. 그 모습에 남부의 가신들은 다시 한번 기함했다. 니힐이 아무렇지 않게 깔고 앉은 것은 남부공의 관이었다.
“한 가지 중대한 발표가 있습니다.”
니힐이 나오자 클라비스가 그의 옆에서 말했다. 덕분에 사람들은 일순 얼이 빠졌다. 중대한 발표라니. 지금은 장례식 중이다. 클라비스의 말마따나 제국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가 노년의 나이에 싸우다 숨을 거두었다. 예우를 철저히 갖추어 보내도 모자랄 판에 관을 깔고 앉아 중대한 발표라니.
“남부공은 제국의 큰 기둥이자 전력이었습니다.”
클라비스는 그렇게 운을 떼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장례식에 참여한 루벨 후작이 서 있었다.
“엄중한 시기이니 그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둬서는 안 될 겁니다.”
클라비스는 눈으로만 농밀하게 웃더니, 의아해하는 귀족들 앞에서 한 사람을 지목했다.
“카르도 루벨 경, 폐하의 앞으로.”
뜻밖의 호명에 귀족들이 술렁였다. 이우라와 루비드는 눈을 홉떴고, 린 역시 놀란 기색을 숨기며 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 속에서 홀로 침착한 건 죽은 남부공의 대리인인 레나 루벨 뿐이었다. 카르도는 이렇게 될 걸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당당하게 걸어나왔다. 그러곤 관 위에 다리를 꼬고 앉은 니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니힐은 무심한 얼굴로 손을 뻗어 클라비스가 내민 검을 쥐었다. 그러더니 검으로 카르도의 어깨를 쿡 찌르며 말했다.
“오늘부터 네가 남부공이다.”
니힐의 선언에 귀족들이 경악했다. 전에 없던 파격적인 인선이었다. 지금껏 공작위는 그라샤와 직간접적으로 이어진 가문의 차지였다. 그런데 루벨이라니, 서부 촌구석에서 지주 노릇을 하던 자작 가문의 후예가 공작이 되다니. 귀족들이 놀라서 입을 뻐끔댔지만 니힐은 개의치 않으며 말을 이었다.
“권능을 줄 테니 어디 날뛰어 봐.”
“폐하께 영원토록 충성하겠습니다.”
서임을 받은 카르도가 니힐의 발등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고요한 장중에서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황제 폐하 만세!”
침묵을 깨트리는 소리가 찬물을 끼얹은 듯 어색했지만, 그 어색함은 찰나에 사라졌다. 연이어 다른 누군가가 똑같이 소리쳤기 때문이다. 아직 장례 중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힘껏 황제의 이름을 연호했다. 새로운 권력이 탄생했으니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후작, 아니. 이제는 공작이 된 카르도 루벨은 흡족한 마음으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광기 어린 소란에 린과 이우라는 조용히 미간을 좁혔다. 유니도 입술을 깨물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레나는 여전히 고요했다. 다만 고요하게 확신할 뿐이었다. 역시 당신이구나. 남부공을 죽인 건. 끝내 용서를 빌지 않는 카르도 루벨, 당신이었어. *** 새 남부공의 탄생 때문인지, 죽은 남부공이 묘지에 묻히는 걸 지켜보는 자는 거의 없었다. 레나와 유니를 비롯한 남부공의 측근들만 자리를 지켰고, 동부공과 북부공은 갑작스러운 지형변화에 대응하려는 듯 급히 처소로 돌아갔다. 레나와 유니가 묘지에 꽃을 바치고 돌아왔을 땐 늦은 저녁이었다. 종일 굶고 서 있던 탓에, 그리고 계속해서 운 탓에 유니는 탈진하기 직전이었다. 몸도 마음도 지치기는 레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두 사람에겐 자신을 추스를 잠깐의 시간도 없었다. 새로운 남부공이, 전대 남부공의 대리인을 불러낸 탓이었다.
“남부공 저하께서 경을 부르셨습니다.”
황제의 서임처럼 갑작스러운 호출이었다. 일순 불쾌함을 느꼈지만 레나는 상복 차림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
그러자 유니가 신음하듯 레나를 붙잡았다. 호수의 궁도 남부공이 살아 있을 때와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본디 남부공의 측근들이 있던 자리에 낯선 얼굴이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그 때문인지 유니는 조금 불안해 보였다.
“유니, 같이 가요.”
“네?”
“빌 알레스 저하의 후임이에요. 유니도 만날 자격이 있어요.”
레나는 유니에게 손을 뻗었고, 유니는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남부공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한때 익숙한 장소가 지금은 무척 불편하게 느껴졌다. 더 안으로 들어가자 친숙한 노인 대신 낯선 남자가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왔군.”
카르도 루벨이었다. 카르도는 함께 온 유니를 힐끗 보더니 무시하며 레나에게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려고 불렀소. 레나 경”
카르도는 사무적인 태도로 레나를 대했다. 그게 꽤 어이가 없어 레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앞으로?”
“빌 알레스 공과 한 계약에 대해선 알고 있소. 1년간 남부공의 대리자로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기로 했다지. 그러니 앞으로도 내 대리인으로서 싸워주기 바라오.”
“거절한다면요?”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거요. 거액의 계약금을 받았던데. 제국에선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자가 세 배의 위약금을 물게 되어 있소.”
카르도가 즐기듯 대답하자 레나도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협박인가요?”
“협상이라고 해주시오.”
카르도는 정중해서 더 비열하게 느껴지는 태도로 레나를 찬찬히 구슬렸다.
“물론 선택은 경의 몫이오. 빌 알레스 공에 대한 신의 때문에 나를 따르는 게 불편할 수도 있소. 이해하오. 하지만 나 역시 남부의 주인으로서 명백한 손해를 묵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카르도는 거기까지 말하고 뜸을 들이더니,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하긴, 위약금은 그 하녀에게 돌려놓은 재산으로 충당될지도 모르겠군.”
“재산……?”
처음 듣는 말에 유니가 놀라서 중얼댔다. 그리고 레나는 자신의 뒷조사를 끝낸 아버지의 교활함에 씁쓸히 웃었다.
“어떻게 하겠소?”
레나가 입을 다물고 있자 카르도가 채근했다. 굴복하거나 빈털터리가 되거나,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뜻이었다. 카르도가 배부른 표정으로 레나의 대답을 기다릴 때였다. 돌연 문밖의 복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 무슨 소란인가?”
카르도의 측근 하나가 문가에 선 자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러자 기사 한 명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보고했다.
“동부공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