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레나 루벨의 자각2021.11.08.
동부공의 난입에 여유롭던 카르도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동부와 선약이 있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내 약혼녀를 데리러 왔다.”
카르도의 비아냥 섞인 힐난에 린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레나 역시 놀란 얼굴로 린을 쳐다봤지만, 린은 설명을 미룬 채 조용히 카르도를 쏘아봤다. 카르도 루벨이 남부공이 된 직후 린은 남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그로써 카르도 루벨이 남부공의 집무실을 차지하자마자 전대 남부공과 레나 루벨이 맺은 계약을 검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린은 이 소식을 곧장 레나에게 알리려 했지만 카르도가 한발 먼저 움직였다. 결국 급하게 뒤쫓아온 그는 너무 늦지 않은 것에 안심하며 연인 곁에 섰다.
“내 약혼녀의 계약 상대는 남부가 아니라 전대 남부공인 빌 알레스였다.”
동부공의 하대에 점잖게 웃던 카르도의 눈썹이 구겨졌다.
“예의를 갖추십시오.”
“예의?”
“나도 공과 대등한 제국의 제후입니다.”
“관에서 훔친 지위로 거들먹대지 마라.”
“말을 삼가십시오. 황제 폐하의 뜻에 반역하는 소리로 들리니.”
“공작이라면서 여전히 남의 권위에 빌붙는군.”
날 선 말이 오가며 분위기가 삽시에 얼어붙었다. 특히 마지막 말을 받아치지 못한 카르도는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동부공의 거만한 얼굴을 쳐다봤다.
‘시험해볼까?’
남부의 권능. 그 불꽃이라면 저 시건방진 놈을 뼛속까지 태워버릴 수 있을 텐데. 흉포한 충동이 카르도를 덮쳤다. 하지만 능숙한 사냥꾼은 이내 살의를 가라앉히며 빙긋 웃었다.
“……좋습니다, 예의범절에 대해선 추후 논하도록 하죠.”
첫날부터 다른 공작과 마찰을 빚어 황제의 눈 밖에 나면 곤란하다. 어차피 레나의 약혼자인 동부공도 그가 사냥해야 할 대상 중 하나다. 그러니 천천히, 신중히 기회를 노려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카르도는 너그럽게 말을 이었다.
“레나 경의 계약은 남부의 자산으로 지급됐습니다. 그러니 남부의 주인으로서 계약을 이어감이 마땅합니다.”
“위약금이라면 동부에서 해결하겠다.”
“약혼녀를 무척이나 사랑하시는 모양입니다만, 이것은 남부의 일입니다. 이래서야 사람들이 공사를 구분 못 한다고 비웃을 겁니다.”
카르도가 충고하는 척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하긴, 그렇게라도 묶어둬야 옛날처럼 즐기시겠군요.”
카르도가 린의 옛 추문을 대놓고 건드렸고, 그 지저분한 언사에 린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런데 린이 울컥하기 전에 잠자코 있던 레나가 그를 막았다.
“그만해요.”
레나는 카르도가 아닌 자신의 약혼자를 말렸다. 그러더니 새 남부공을 향해서는 오히려 단아하게 미소 지었다. 카르도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레나는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카르도 씨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낯선 호칭에 카르도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앞서 조건을 묻기는 했지만, 저 역시 계약을 파기할 마음은 없습니다. 남부공 저하께서 지키고자 하신 것을 저도 지키고 싶으니까요.”
‘남부공 저하?’
“북부에서 갑작스럽게 내려오신 카르도 씨와 달리, 저는 남부공 저하와 인연이 깊어서요.”
레나의 나긋한 목소리에 카르도는 깨달았다. 레나가 이미 죽은 빌 알레스를 남부공이라 부르며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걸. 노골적인 도발에 카르도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래서 레나는 더 화사하게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카르도 씨. 남부의 일에 대해선 제가 잘 알려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외부인 주제에 나서지 말라는 말이었다. 친절한 목소리에 담긴 비웃음은 카르도 뿐 아니라 모두가 알아챌 만큼 노골적이었다. 그러나 레나는 뻔뻔하게 시치미를 떼며 공작이 된 아버지에게 목례했다.
“그럼, 앞으로 자주 뵙도록 하죠.”
. . . 레나는 남부공의 집무실에서 나와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함께 온 린이 물었다.
“괜찮아?”
하지만 질문의 상대를 잘못 골랐다. 지금 상태를 물어봐야 하는 건 레나가 아니라 유니였다.
“재산이라뇨?”
레나와 린의 허리쯤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유니였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유니가 두 손으로 앞치마를 구겨 쥔 채 물었다.
“저한테 재산을 남기셨어요? 왜요?”
묻는 게 아니라 따지는 목소리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레나와 린이 고개를 돌리자, 내리 땅을 보던 유니가 레나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렇게 해놓고 어딜 가려고요?”
“유니…….”
레나가 당황해서 손을 뻗자 유니가 거칠게 뿌리쳤다. 그러곤 눈물이 가득 맺힌 눈으로 레나를 쏘아보았다. 유니의 원망에 찬 눈빛에 레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레나가 아연한 눈으로 바라보자, 유니가 울먹임을 참으며 말했다.
“전에 그랬죠, 아가씨가 떠날 궁리만 하는 거 안다고. 알지만 기다렸어요. 물어보면 난처해할까 봐요. 언젠가 알려줄 거로 생각해서 기다렸어요. 그런데 재산이요? 저한테 말도 없이요?”
유니는 거기까지 말하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화가 났다. 남부공의 죽음도 너무 버거운데, 이 와중에 레나가 몰래 떠날 준비를 해온 걸 알게 되자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배신감을 느낀 유니는 사랑하는 아가씨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레나는 크게 당황했고, 유니의 눈에선 결국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저는 아가씨가 기르는 애완동물이 아니에요. 먹고살 집을 마련해주고 떠나면 고맙다고 할 줄 아셨어요? 천만에요!”
유니의 날카로운 비난에 레나는 아무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유니는 침묵하는 아가씨를 원망하듯 쳐다보다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돌아섰다. . . . 그 후 유니는 잠들 때까지 말이 없었다. 깊은 밤, 유니가 잠든 것을 확인한 레나는 침실에서 나와 창가에 앉았다. 피로했다. 오늘 하루 동안 벌어진 일이 모두 꿈같았다. 남부공의 장례식도, 새로운 남부공도, 그에게 불려간 순간과 유니의 분노도. 모두 가짜 같았다. 지칠 대로 지친 레나가 빈 하늘을 바라볼 때였다. 톡, 톡. 무언가가 창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레나는 비가 오는 줄 알고 창문을 열었다가, 작은 돌멩이가 창틀을 때리는 걸 보고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정원 쪽을 돌아보니 한 사람이 있었다. 심야의 밀회를 위해 찾아온 린이었다. 레나는 연인을 발견하자마자 테라스에서 뛰어내렸다. 린도 레나에게 달려왔고, 곧 두 사람은 달빛 아래 만났다.
“유니는?”
“잠들었어요.”
“화는 좀 풀렸어?”
“아뇨…….”
린은 레나를 보자마자 유니에 대해 물었다. 레나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린은 그런 레나의 뺨을 쓸어주었다. 다정한 손길이지만 레나는 어쩐지 불편했다. 아까 유니의 잠든 얼굴을 볼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레나는 린의 손을 살짝 잡으며 중얼댔다.
“처음이에요. 유니가 그렇게 화내는 건.”
밖에선 쌈닭처럼 굴어도 안에선 순한 양 같은 아이였다. 그래서 걱정스럽고, 또 사랑스러운 친구였다.
“남부공 때문에 더 그랬을 거야.”
린이 레나를 위로하려고 말했다. 하지만 남부공이 언급되자 레나의 얼굴은 도리어 어두워졌다.
“왜 그래?”
낌새를 챈 린이 까닭을 묻자, 레나는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젓다가 나지막이 중얼댔다.
“……남부공 저하를 살해한 게 아무래도 아버지 같아요.”
레나의 추측에 린의 표정도 덩달아 가라앉았다. 말할 겨를이 없었을 뿐, 사실 린도 비슷하게 의심했다. 대외적으로 남부공의 죽음은 배교자의 소행으로 판가름 났다. 하지만 레나와 린은 안다. 그곳에 남부공을 해칠 배교자는 없다는 걸. 때문에 두 사람의 시선은 카르도를 향했다. 남부공이 죽자마자 서둘러 황궁으로 향한 자, 그리고 이 죽음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자. 카르도 루벨 뿐이었다. 린이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그런데도 남부에 있기로 한 거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남은 일을 청산하기에.”
레나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입가에 맺힌 미소는 여느 때처럼 온화했지만, 린은 속지 않았다.
“그래서 슬퍼하지도 못하는 거야? 남부공을 죽인 게 카르도라서?”
린의 악의 없는 물음이 레나의 가슴을 후벼팠다. 정곡을 찔렸다. 심지어 찔리기 전까지 정곡인지도 몰랐다. 린이 그걸 정확히 짚어내자 레나는 당황해서 천천히 수긍했다.
“……그러네요. 그랬나 봐요.”
레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레나의 시선은 갈피 없이 허공을 헤맸고, 미간은 아프게 접혀 있었다. 레나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냥, 너무 낯설었어요. 다른 사람을 애도하는 게. 왜냐하면 나도…….”
레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린을 마주 보며 속삭였다.
“나도,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랬다. 레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무덤에 묶인, 그래서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내가 타인의 죽음에 슬퍼하는 건 너무 이상하다고. 심지어 내 아버지가 죽인 사람을 애도하는 건 정말 위선적인 일이라고.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이유로 망가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오히려 보란 듯 웃어 보려고 했는데. 어쩌면 나는, 이미 어딘가 망가져 버린 게 아닐까? 레나가 조심히 생각을 고백하자 린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래서 레나는 서둘러 덧붙였다.
“방법을 찾겠다고 한 건 진심이었어요.”
레나는 린에게 약속했다. 무덤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미리 단념하지 말고, 그와 함께할 방법을 찾기로. 연인을 향한 마음이 더 깊어져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아 약속했었다. 하지만 그때의 약속이 무색하게, 지금 레나는 자신이 무덤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죽음을 몇 번이나 겪었어요.”
무력하던 어린 시절부터, 그것을 오히려 이용하게 된 지금까지. 레나에게 죽음은 늘 곁에 있었다.
“내 안엔 셀 수 없이 많은 망자가 있고, 무덤에서 돌아온 후에는 늘 전쟁터에 머물렀어요. 그리고 역할이 끝나면 무덤으로 돌아갈 생각만 했고요.”
레나는 이제껏 당연하게 여겨온 것을 하나씩 나열했다. 그러곤 서글픔과 혼란을 가리려는 듯 자조했다.
“전부 살아 있는 사람이 할 짓은 아니죠.”
“레나…….”
“그래서 잘 모르게 된 거 아닐까요? 타인의 죽음을 어떻게 애도해야 할지. 날 붙잡는 사람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도. 마치…….”
“마치?”
“……사는 방법을 몰라서 흉내만 내는 것 같아요.”
레나는 어렵사리 말을 맺고 눈을 감았다. 아, 망가지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정작 레나는 친밀한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하자를 눈치채버렸다. 남부공을 애도하지 못하는 자신을, 그리고 유니를 위로하지 못하는 자신을 깨닫고야 말았다. 그래서 린과 함께할 방법도 영영 모르게 되었다. 그걸 모조리 털어놓은 레나는 벌을 받는 아이처럼 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런 나를 당신은 뭐라고 할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윽고 린이 고요하게 물었다. 레나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자, 린이 재차 말했다.
“모르는 게 아니라 참고 있는 건 아니야?”
“무슨 말이에요?”
“전에도 말했지만 정당하지 않은 감정은 없어. 참지 마. 고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괜찮아.”
레나는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린의 위로는 상냥하지만 난해했다. 그래서 와 닿지 않았고, 오히려 연인을 걱정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레나가 서둘러 괜찮은 척하려고 할 때였다.
“남부공에게 미안한 거지? 지켜주지 못해서.”
린의 담담한 물음에 레나는 머리를 맞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도 못 한 표현이 가슴을 관통했다. 그게 뭔지 다 이해하기도 전에 마음이 반응했다. 고요하던 레나의 두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