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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우리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165/208)

165화. 우리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2021.11.29.

16562834661501.jpg“대체 누구에게 낫다는 거죠?”

이우라의 자색 눈동자에 의구심이 담겼다. 레나는 자신의 질문이 너무 모호한 걸 깨닫고 웃으며 덧붙였다.

16562834661501.jpg“물론 니힐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커요. 니힐이 떠나면 죽은 자들과의 전쟁은 끝날 거예요.”

16562834661511.jpg“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16562834661501.jpg“충분하지 않아서 하는 이야기예요.”

레나는 곱게 부정하더니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16562834661501.jpg“물론 니힐이 폐위되고 망자와의 전쟁이 끝나면 공작 저하들의 상황은 훨씬 나아지겠죠. 황제의 눈치를 볼 필요도 전쟁터로 내몰릴 일도 없으니 모든 게 좋을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던 레나는 돌연 목소리를 바꿔 되물었다.

16562834661501.jpg“하지만 그런다고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이 나라를 되찾게 되나요?”

보다 구체적으로 변한 물음에 이우라의 눈빛이 변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였다. 아니, 일부러 의식 밖으로 몰아낸 안건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자들. 그게 만약 동부공의 고향같이 제국과 병합된 나라의 이야기라면, 설령 망자와의 전쟁이 끝나더라도 그들이 해방될 가망은 없다. 니힐을 통해 기형적으로 성장한 제국은 이미 자신의 덩치를 스스로 감당하지 못한다. 모든 자원을 외부에서 끌어온 탓에 그라샤의 본토는 진즉에 자생의 기능을 잃었다. 귀족과 그들에게 부역하는 상류층은 그런 생태에 지나치게 익숙해졌고, 이제 식민지는 제국이 포기할 수 없는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16562834661501.jpg“니힐이 사라지면 뒷골목에 숨어 사는 사람에게도 더 나은 삶이 찾아올까요? 복잡한 이유로 제물이 된 사람들에게는요?”

이우라가 대답을 못 하자 레나가 재차 물었다.

16562834661501.jpg“미친 황제가 폭정을 휘둘렀으니 공정한 황제가 선정을 베풀면 모든 문제가 사라질까요? 공정하든 유능하든 새 황제는 그라샤의 귀족 중 하나일 텐데, 그 사람이 황제가 되면 그라샤의 귀족 이외의 사람도 조금이나마 나아질까요? 그렇다면 니힐이 무덤을 열기 전에는, 과연 모든 게 좋았나요?”

레나가 던진 무수한 질문에 이우라의 침묵이 길어졌다. 그럼 니힐의 폭정을 내버려 두자는 말이냐, 어차피 해결 못 할 문제가 있으니 이대로 됐다는 거냐. 이런 드잡이질 같은 물음만 혀끝에 맴돌아 그는 차라리 입을 다물었다. 그의 참는 기색을 읽은 듯, 레나가 질문을 멈추고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16562834661501.jpg“니힐을 무덤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엔 저도 동의해요. 하지만 니힐이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은 아니에요. 그 사람도 인간이 쌓아 올린 역사의 일부인 걸 외면하면 안 돼요.”

16562834661511.jpg“더 외면하지 않으려고 싸우겠다는 거다.”

16562834661501.jpg“니힐과 같은 방식으로요?”

자신의 세상을 위협한 자를 미워해 철저히 보복한 건, 그리고 몰락시킨 건 이미 니힐이 했던 일이다.

16562834661501.jpg“나자가 하려는 일은 니힐이 돌아와서 했던 일과 같아요. 다른 건 대상뿐이에요. 나자가 니힐을 미워한 것처럼 니힐도 그라샤를 미워했어요. 그 전엔 그라샤가 니힐을 미워했죠.”

다들 무언가를 미워해 부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16562834661501.jpg“비단 제국만의 이야기도 아니에요. 첼레스테는 다른 왕들에게 미움받았고, 히엠스 그라샤는 운 좋게 자신의 때만 넘겼을 뿐 결국 민란의 계기를 만들었어요. 칼리고는 말할 것도 없죠.”

그들은 모두 왕이었고, 부흥과 몰락을 반복하며 세상을 이끌어왔다.

16562834661501.jpg“그토록 많은 왕이 자리를 바꾸고 역사의 중심이 됐지만 누군가에겐 전혀 변한 게 없었어요. 그럼에도 우리는 늘 그곳에 있었어요.”

경청하던 이우라는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표현에 대해 물었다.

16562834661511.jpg“……경이 말하는 우리가 누구지?”

16562834661501.jpg“나락까지 떨어진 모든 사람이요.”

레나는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이우라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말했다.

16562834661501.jpg“물론 개중엔 다시 높이 오른 자도 있어요. 아주 특별한 몇 명은 그게 가능하죠. 니힐이나 나자 같은.”

이우라는 레나의 예시를 듣다가 생각했다. 레나 루벨 역시 그 가운데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레나가 덧붙였다.

16562834661501.jpg“하지만 누군가 오르면 누군가는 또 떨어져요.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기로 한 거예요. 우리는 더는 누구도 이 수렁에 내려오는 걸 원치 않으니까요.”

16562834661511.jpg“……그래서 선택한 게 설득이라는 건가?”

16562834661501.jpg“설득은 과정이에요. 우리가 정말 바라는 건 화해예요.”

화해. 이우라는 그 표현이 외국어처럼 낯설었다. 협상도 타협도 아닌 화해라니. 그 말이 어린아이의 소꿉장난에나 어울린다는 생각에, 이우라가 돌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16562834661511.jpg“서부 요새에 함정을 판 자를 찾았다.”

서부에서 레나와 린, 그리고 북부 형제를 균열로 밀어 넣은 과격한 함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16562834661511.jpg“요새 내부에 균열을 만든 건 배교자들이었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레나가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16562834661501.jpg“배교자라면 까마귀 말씀이신가요?”

16562834661511.jpg“아니. 꼬리가 밟힌 건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다른 배교자 무리였다.”

16562834661501.jpg“그걸 어떻게 확인했죠? 돌아와서 상황을 살필 겨를이 없었는데.”

16562834661511.jpg“남부공.”

뜻밖의 대답에 레나의 눈이 커졌다. 유니도 마찬가지였다.

16562834661511.jpg“남부공이 독자적으로 조사 중이었다. 사건을 덮어버린 카르도 루벨을 대신해서.”

카르도 루벨이라는 이름에 레나의 표정은 차게 굳었고, 유니의 시선은 불안한 듯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우라는 그것을 못 본 척하며 말을 이었다.

16562834661511.jpg“남부공이 그들의 본거지를 덮쳤을 때 그들은 이미 몰살당해 불타고 있었다.”

마치 흔적을 지우려는 듯이, 남부공이 찾아올 걸 알아챈 것처럼. 이우라는 이에 관한 보고서를 전대 남부공의 비서에게 전달받았다. 북부와 남부에 특별한 친분이 있던 것도 아닌데, 이우라는 이 보고서가 자신에게 전해진 것이 몹시 공교로웠다.

16562834661511.jpg“남부공은 그 배후로 카르도 루벨을 지목했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해 조사를 중단했고, 결국 배교자의 탈을 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그로써 카르도는 추적을 피하고 남부공이 되었다. 전대 남부공의 비서가 그에 대한 보고서를 북부로 가져온 것도 그런 탓이다. 이우라는 남부의 다른 귀족이 아니라 북부 공작에게 기대를 걸어야 하는 충신의 심정을 무겁게 헤아렸다. 그래서 레나에게 물었다.

16562834661511.jpg“경은 카르도 루벨, 그자와도 화해할 수 있나?”

마치 시험하듯이, 레나의 답변을 기다렸다.

16562834661501.jpg“……그건 제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운을 뗀 레나는 이우라가 아닌 유니를 바라보았다. 유니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남부공의 죽음이 아직 아픔으로 남아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레나는 유니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며 담담히 덧붙였다.

16562834661501.jpg“하지만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어요.”

16562834661511.jpg“왜 그렇게까지 고집하는 거지?”

레나의 한결같은 대답에 이우라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에 레나는 오래전 친구가 해준 말로 대답했다.

16562834661501.jpg“용서도 화해도 못 한 자의 말로를 알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러지 않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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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우라가 돌아간 건 거의 밤이 되어서였다. 그는 레나의 말에 동조도 반대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알겠다는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그리고 남부공의 이야기에 동요했던 유니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관련해서 말을 더하지 않았다. 그로써 긴 하루를 겨우 마친 레나는 자신의 침대에 누운 린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16562834661501.jpg“예쁘네.”

레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어두운 밤, 달빛에 어스름히 드러난 연인의 얼굴이 고아했다. 바라보고 있자니 이우라와 대화하며 술렁인 마음이 점점 차분해졌다. 레나는 잠든 채로도 자신을 안심시키는 연인을 기쁘게 바라보다가 내심 놀랐다. 생각해 보니 언젠가부터 시를 외우지 않게 됐다. 심란할 때면 어김없이 시구를 떠올려 자신을 다독였는데, 린과 함께 하면서 그런 날이 부쩍 줄어들었다.

16562834661501.jpg“말도 안 돼.”

레나는 스스로에게 중얼댔다. 어쩐지 가슴이 벅찼다. 그래, 가슴 벅찬 일이다. 시보다 더 시 같은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내 연인이라는 건. 아, 세상 모든 사람이 너 같으면 좋을 텐데. 레나는 서글픈 마음에 린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 순간 린이 눈을 떴다.

16562834661501.jpg“일어났어요?”

16562834759059.jpg“응…….”

돌연 쓰러져 두어 시간 만에 눈을 뜬 셈인데, 어쩐지 린은 놀라는 기색 없이 차분했다.

16562834661501.jpg“나자가 린 씨에게 왔었어요.”

16562834759059.jpg“응.”

16562834661501.jpg“기억나요?”

16562834759059.jpg“아니…….”

16562834661501.jpg“그럼?”

16562834759059.jpg“느껴져.”

린은 작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16562834661501.jpg“제 방이에요.”

레나의 설명과 동시에 린은 맞은편에 놓인 침대를 발견했다. 유니의 침대였고,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16562834759059.jpg“유니는?”

16562834661501.jpg“밖에서 잔대요.”

16562834759059.jpg“내가 침대를 뺏은 거야?”

16562834661501.jpg“아뇨, 유니가 우릴 적극적으로 놀리는 거예요.”

레나의 푸념에 다소 멍하던 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린이 웃자 레나도 안심하며 옆에 앉았다.

16562834661501.jpg“기분은 어때요?”

16562834759059.jpg“별로지만 불평 안 하려고.”

16562834661501.jpg“왜?”

16562834759059.jpg“내가 다른 사람한테 하던 짓이니까.”

정말, 세상 사람이 전부 당신이라면 좋을 텐데. 레나는 한숨처럼 웃으며 옆에 앉은 린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린은 자신의 가슴에 기댄 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레나가 멈추지 않는 것에 당황하며 뒤로 쓰러졌다. 레나에게 밀려 침대에 누워버린 린은 자기 위에 올라온 레나를 난감하게 바라보았다.

16562834759059.jpg“짐승…….”

린의 힐난에 레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평소보다 아찔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16562834661501.jpg“새삼스럽게.”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린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고, 린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혹은 기대가 초라하게 레나는 린의 가슴 위에 그대로 머리를 기대며 누워버렸다. 레나는 린이 커다란 쿠션이라도 되는 양 두 팔 가득 끌어안았다. 그 사심 없는 행동에 린은 얼떨떨해하다가, 이내 작은 한숨과 함께 레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사이좋게 끌어안은 연인은 서로의 숨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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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가 너무 길었다. 레나에게도 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레나는 아버지에게 마지막 경고를 했고, 린은 어머니에게 잠시 몸을 빼앗겼다. 그리고 그사이 황제가 사자 왕의 심장을 직접 뽑아오는 걸 지켜봤다. 린은 저런 황제를 과연 이길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그리고 레나는 서서히 차오르던 물이 드디어 턱 밑까지 다가온 기분이었다.

16562834759059.jpg“나자가 무슨 얘기 했어?”

16562834661501.jpg“별 얘기 안 했어.”

린이 나른한 목소리로 묻자 레나도 비슷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레나는 테이블에서 나눈 이야기를 린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야기 끝에 덧붙였다.

16562834661501.jpg“이우라가 눈치챈 것 같아.”

네가 고향 사람들을 서부에 숨겨둔 거. 이우라가 떠난 후 유니가 레나에게 와서 고스란히 일러바쳤다. 이우라가 서부의 배교자들을 동부공과 엮으려 했다는데, 그렇게 대놓고 말했다는 건 이미 의심을 넘어 확신한다는 뜻이었다.

16562834661501.jpg“하지만 아무것도 못 할 거야.”

레나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냐하면 이우라 본인도 이미 역적모의에 나섰으니까, 여기서 린을 고발하는 건 자신의 발등을 찍는 짓이다. 그래서 레나도 린도 북부공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16562834759059.jpg“다들 잘 피했겠지?”

16562834661501.jpg“아마도.”

다만 그 난장판 속에서 대피한 사람들이 염려스러울 뿐이었다. 린은 숨을 길게 내뱉자, 레나는 그의 가슴 위에서 장난스레 턱을 괬다.

16562834661501.jpg“린.”

16562834759059.jpg“응?”

부름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다정하다. 레나는 이 음성마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16562834661501.jpg“날 왜 좋아하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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