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날 왜 좋아하게 됐어?2021.12.02.
“날 왜 좋아하게 됐어?”
레나의 물음에 린은 일순간 긴장했다. 자칫 잘못하면 혹독한 대가를 치를 거라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레나는 눈을 빛내며 대답을 기다렸고, 눈치를 보던 린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싸워도 못 이길 같아서?”
“싸우자는 거지?”
“농담이야.”
사실 상당히 진심이지만, 린은 정답이 아닌 걸 깨닫고 어물쩍 말을 돌렸다. 그러곤 레나의 갑작스러운 여자친구 감성에 대해 고민했다. 이런 앙증맞은 이야기를 나누기엔 오늘 너무 거칠지 않았나, 더 심각한 이야기를 마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린은 문득 깨달았다. 이런 날이기에 오히려 소소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 간신히 생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거다. 린은 레나의 마음을 눈치채고 장난기와 의문을 집어넣었다. 그러곤 여상히 대답을 기대하는 레나에게 조심히 속마음을 꺼냈다.
“처음 봤을 때…….”
“처음 봤을 때?”
“광장에서, 유니랑 둘이 있을 때.”
정말 처음 얘기다. 맨 처음, 린은 레나를 가출한 철부지로 오해하고 레나는 린을 괴한으로 오해했던 그때. 꽤 많이 거슬러 올라간다 싶어 레나는 턱을 괸 자세로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레나의 그런 여유는 찰나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예쁘다고 생각했어.”
사정없이 치고 들어온 린의 고백이 레나의 심장을 관통했고, 방심하던 레나 루벨은 그만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계속 보고 있었어. 예뻐서.”
첫눈에 반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털어놓고, 린은 담담한 눈으로 레나를 바라보았다. 레나는 꽤 놀란 듯 멍한 얼굴이었다. 레나는 눈을 깜빡이며 린을 마주 보다가, 어쩐지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워져서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에 린은, 부뚜막을 훌륭히 깨부순 얌전한 고양이는 자기 위로 허물어진 레나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여주었다.
“……헤픈 남자였네.”
“헤프다니.”
“쉬운 남자.”
“오해야…….”
레나의 매도에 린도 슬슬 창피해졌다. 이래서 말 안 한 건데. 안 그래도 사람의 됨됨이가 아니라 그저 예쁘다는 이유로 끌렸다고 하면 레나가 한심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닌 척 꽤 오래 시치미를 뗐지만, 기왕 이렇게 됐으니 린은 레나의 첫인상에 대해 있는 그대로 실토했다.
“그래서 위험해 보였어.”
예쁘고 연약한 아가씨가 혼자 거리를 헤매는 것 같아서, 저러다 큰일이 날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다가간 거였다. 위험해 보였다는 말에 레나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뭐가 위험해 보였어?”
“나쁜 녀석들이 건드릴 것 같았어.”
“그래서 구해준 거야?”
이번엔 린이 입을 다물었다. 린은 어쩔 수 없이 그날의 수치를 떠올렸다. 레나 루벨이 어떤 인물인지 모른 채 위풍당당하게 치명적인 수컷 행세를 하던 그 치욕을. 그때 레나가 자신을 얼마나 가소롭게 생각했을지 상상하니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레나가 짓궂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런데 생각하던 거랑 달라서 실망했어?”
실망이라니. 린은 가당치도 않은 표현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눈을 뗄 수가 없었어.”
린이 또 한 번 레나 루벨의 심장을 가격했다. 효과적인 타격에 레나는 괴로워하면서도 애써 버텼다. 이 녀석, 순진한 척하면서 선수 같은 말만 골라서 하고 있어. 레나는 낯간지러우면서도 기뻐서, 그리고 린이 예쁘면서도 괘씸해서 입술을 깨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정말이야.”
의혹에 찬 눈초리에 린이 해명했다. 말마따나 과장도 아부도 섞이지 않은 진심이었다. 예뻐서 본 건 사실이다. 곱게 웃는 모습에 눈길이 갔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하지만 레나가 단검으로 망자를 가르는 순간 린은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기묘한 확신에 휩싸였다. 저 특별한 숙녀를 쉽사리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예지에 가까운 확신이었다. 그래서 황궁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린은 레나를 곧장 알아봤다. 어쩌면 다른 사람이었어도 레나인 줄 알고 다가갔을지 모른다. 그렇게 재회한 레나는 린에게 조금 더 특별해졌고, 그 특별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져만 갔다. 그 순간순간의 애틋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린은 마음을 전할 말을 찾다가 자신이 말주변 없는 사람인 걸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다행히 린의 단순한 표현은 레나에게 더 절실히 다가왔다. 레나가 상기된 얼굴로 입술만 씹고 있자, 린이 넌지시 물었다.
“너는?”
린은 유치하게도 똑같이 반격했다.
“넌 언제부터야?”
“글쎄요.”
하지만 레나는 웃으며 말을 피했다. 일종의 복수였다. 그럼에도 린은 불평하지 않았고, 린이 조를 줄 알았던 레나는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린은 오히려 마음이 뜨끔했다. 레나의 입으로 듣고 싶어서 물어봤을 뿐, 린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레나가 언제부터 자신을 지켜봤는지, 그리고 어떤 형태로 자신을 간직했는지 레나의 기억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레나가 이걸 알면 안 될 것 같아 그는 침묵했고, 내막을 모르는 레나는 의아한 듯 물었다.
“별로 안 궁금한가 보네요?”
“응, 별로.”
린의 야박한 대답에 레나가 조금 뾰로통해졌다. 린은 그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다, 레나의 허리를 팔로 감은 채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 바람에 린의 위에 엎드리고 있던 레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침대로 떨어졌다. 대신 레나에게 깔려 있던 린이 위치를 바꿔, 레나의 위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역전에 레나는 놀란 눈으로 린을 바라보았다. 깔고 누워 내려다볼 때는 마냥 귀엽던 연인이, 자신의 위에서 그림자를 드리우니 분위기가 새삼 낯설었다. 창문을 통해 내리는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린은 평소보다 진지한 눈으로 레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결심한듯한 표정에 레나는 저도 모르게 덜컥 긴장했다. 레나의 뺨에 가벼운 입맞춤이 내렸다. 이제는 익숙한 애정행각에 레나는 동요를 삼키며 키스를 기다렸다. 하지만 볼에 닿은 린의 입술이 다소 낯선 방향으로 움직였다. 늘 정중하게, 하지만 간절하게 입 맞춰오던 연인이 이번엔 턱 끝으로, 그리고 목덜미로 입술을 옮겼다. 따스한 감촉이 가장 여린 부분을 파고들자 레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저기요, 린 씨? 밖에 어린이가 있어요. 레나는 이렇게 말하려다가 참았다.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분위기가 다소 갑작스럽지만, 그렇다고 굳이 깨트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레나의 침묵에 용기를 얻은 듯, 린이 연인의 옷깃 안으로 파고들며 레나의 쇄골 끝에 입을 맞췄다. 오싹한 기분에 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긴장이 고조되는 와중에 레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린이 결혼하자고 했다. 결혼은, 원래 이런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옳다……. 뜻 모를 깨달음에 레나는 머뭇대다가 린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서로를 바라는 두 사람 위로 달빛이 내렸다. 그리고 린의 세심한 움직임이 천천히 멈췄다. 침묵과 정적이 흘렀다. 린은 레나의 가슴에 뺨을 기댄 채 더 움직이지 않았고, 기다리던 레나는 의아함에 속삭였다.
“린 씨?”
“응.”
“뭐 해요?”
“편해서.”
린은 그렇게 말하며 레나의 허리 뒤로 팔을 둘렀다. 그러곤 아까 레나가 린에게 한 것처럼, 레나가 베개라도 되는 양 꼭 끌어안고 기댔다.
“이러고 자고 싶어.”
……이 자식이. 레나는 어쩐지 맥이 빠져, 그리고 기가 막혀서 자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은 린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신사인지 바보인지 구분할 수 없는 표정으로 정녕 편하게 쉬고 있었다. 긴장했던 레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어버렸다. 그러곤 아이처럼 안긴 린의 머리를 토닥였다.
이것도 나름 좋았다. 권능의 저주가 사라지기 전 늘 전쟁같이 사랑했던 두 사람은, 이렇게 느긋하게 서로를 느껴본 일이 거의 없었다. 애정 결핍이 명백한 남자친구를 토닥토닥 다독여주는데, 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였어……?”
넘어간 줄 알았는데. 집요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웅얼대는 목소리가 귀여워서 레나는 선선히 대답해주었다.
“린 씨가 친절할 때부터요.”
그때가 언제지? 린은 레나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생각했다. 그가 고민하는 걸 느낀 레나가 담담히 덧붙였다.
“도움은 필요 없지만, 친절은 항상 필요했거든요.”
레나의 말에 린은 고개를 들었다. 예전에도 레나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였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 좋아했다는 사실에, 레나와 린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러곤 후회 없이 입을 맞췄다. 아, 세상 모든 사람이 너와 같으면 좋을 텐데. 매 순간 덧없이 흐르는 시간을 안타까워하며 사랑하는 편을 택했다면, 설령 무덤 앞이라도 우리는 더 행복했을 텐데. 긴 입맞춤 끝에, 레나가 조금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나자가 황궁으로 오면 모든 게 끝날 거야.”
무덤에 숨어 있던 왕들을 모두 끌어냈으니 무대는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불완전하기에, 레나는 조용히 선언했다.
“그 전에 아버지와 끝내려고 해.”
처음부터 그런 약속이었다. 레나는 후작에게 용서받을 기회를 줬다. 기한은 무덤 정복이 끝날 때까지. 그전까지는 무슨 짓을 하든 보복도 폭로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제 기한은 끝났다. 더는 미루고 싶어도 미룰 수 없으니, 결착을 내야 했다.
“아무래도 화해는 어렵겠지 싶어.”
레나가 쓰게 웃으며 말하자, 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 사람이 밉지는 않아?”
“미워.”
레나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한땐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고, 사실은 지금도 그래.”
레나는 솔직히 대답하고 힘없이 웃었다. 아주 잠깐 안타깝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얼마나 절박하면 그랬을까 이해하려 든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아버지와 재회하며 다시 깨끗이 사라졌다. 놀랍도록 동정의 여지가 없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카르도 루벨은 어릴 때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화해하고 싶다는 거야?”
“응.”
“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내가 이런 사람이고 싶어서.”
레나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한참을 곱씹어야 할 만큼 무거웠다.
“하지만 용서도 화해도 혼자 할 수는 없으니까, 이제 그만 끝내야 할 것 같아.”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사실 후회하는 마음도 있었다. 만약 내가 조금 더 일찍 움직였다면 남부공은 아직 살아 있을까? 사실 아버지에게 기회를 주려는 마음 이상으로 자신이 이토록 강해졌다는 걸 그에게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넘칠 만큼 시간을 주고 뭐든 해 보라며 내버려 두었다. 자신의 오만이 친애하는 노인의 죽음으로 귀결된 것 같아 레나는 마음이 아팠다. 린이 레나의 뺨을 어루만지며 슬픔을 위로했다. 또 한편으로는 걱정했다.
“이제 공작이 됐는데, 방법은 있어?”
카르도는 후작일 때도 북부공 때문에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상대였다. 그런 그가 이제는 황제를 등에 업은 공작이 되었다. 그를 공격하는 것은 황제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며, 그를 벌할 수 있는 건 오직 황제뿐이다. 린의 염려 섞인 물음에, 레나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재판을 열 거야.”
그건 레나가 고르고 고른, 가장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