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카르도 루벨의 슬픔2021.12.06.
황제의 화랑으로 가벼운 발소리가 번졌다. 쿠션 위에 몸을 엎드린 니힐은 상체를 들며 소리가 나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자고 있었어?”
나긋한 음성이 들려왔다. 기별도 없이 황제의 처소로 찾아온 건 그의 남동생, 클라비스였다.
“여긴 도로 다 덮어버렸네.”
클라비스가 돔 형상인 화랑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황제의 침소이기도 한 화랑은 벽면이 모두 하얀 커튼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커튼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지 않고 중간중간 사각의 틀 형상을 만들었다. 커튼에 가려진 액자가 얇은 천 너머로 도드라진 흔적이었다. 석 달 전, 니힐을 살해하려고 시도한 무리 때문에 저 커튼은 모조리 피로 물들었다. 그래서 몇십 년 만에 커튼을 모두 내렸는데, 금새 도로 달아버린 모양이다. 클라비스가 커튼으로 손을 뻗자 니힐이 나직이 말했다.
“건드리지 마.”
따끔한 경고에 클라비스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거뒀다.
“레나 루벨하고 동부공이 출발했어.”
그가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끔찍하게 아끼는 아들을 데려갔으니, 나자도 얘기 정도는 들어주겠지. 협상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클라비스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태도로 니힐에게 상황을 전했다. 하지만 니힐은 평소처럼 하품을 하는 대신 그를 빤히 쳐다봤다.
“왜?”
“레나 루벨도 네 작품이었나?”
뜻밖의 물음에 클라비스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눈이 초승달처럽 곱게 휘었다.
“무덤에서 뭘 봤어?”
“대답해.”
“그게 중요해?”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에 니힐이 다시 추궁했지만, 클라비스는 도리어 비웃음을 머금었다.
“지금 이 대륙에 너와 내게 영향을 받지 않은 건 없어.”
클라비스는 그렇게 말하며 늘어진 커튼을 걷었다. 그러자 아름다운 왕의 초상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지나 그라샤가 왕이던 시절의 모습이었다.
“덮어.”
니힐이 살벌한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클라비스는 못이기는 척 손을 떼며 농염하게 웃었다.
“불쌍한 내 누나, 예전엔 나라를 살리겠다고 그렇게 애썼는데.”
“네가 날 죽이려고 했을 때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해라.”
“그런 협박이 아직도 통할 것 같아?”
클라비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클라비스는 그렇게 읊조리며 탁한 눈으로 니힐을 바라보았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동생의 눈빛에, 니힐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사자 왕이 실토했다. 내 심장을 누가 부쉈는지.”
용맹한 사자 왕은 니힐의 강함에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패자로서 승자인 그에게 전리품 같은 정보를 주었다.
“새로운 왕이 탄생했다.”
“새로운 왕?”
“축복을 빼앗긴 왕.”
니힐이 자신의 전기에 없던 이름을 읊조렸다.
“레나 루벨이다.”
그 순간 클라비스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쳤다.
“레나 루벨이, 망자의 왕이라고?”
신음하듯 속삭인 그는 황급히 입을 가렸다. 활짝 번진 웃음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정말이다. 정말 니힐과 같은 존재가 탄생했다. 우리를 죽여 줄, 내 구원자가.
“기쁜가?”
누나의 물음에 클라비스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니힐은 그런 동생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기뻐해라. 이번에도 받아줄 테니.”
니힐은 손을 뻗어, 자신의 곁에 늘어진 왕들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이제껏 네 시도가 성공한 적이 있었나?”
없었다. 87년 차에 독을 탔을 때도, 서부 성 지하에 균열을 만들어 내 심장을 찾아다닐 때도.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니힐은 그렇게 읊조리며 왕들의 심장을 손아귀 안에 구겨 넣었다. 인장 반지와 왕관, 그리고 철검의 형상을 한 심장이 점점 우그러지며 압축되었다. 이윽고 그것은 온도가 다른 구름처럼 저항을 일으키며 하나로 뭉쳐졌다. 세 개의 심장은 용광로에 들어간 것처럼 백열하며 서로 녹아들더니, 곧 단검처럼 길고 날카롭게 변했다. 니힐은 그것을 자신의 텅 빈 가슴에 찔러넣었다. 거대한 충격이 황궁을 뒤덮었다. 한바탕 소란이 일었지만 잠시였다. 황궁은 늘 그랬던 것처럼, 다시 은은한 광기에 휩싸여 돌아갔다. *** 카르도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넘기며 안경을 고쳐 썼다.
‘결국 협상 길에 올랐군.’
깊은 밤, 카르도는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황제가 허락했으니 내 의견은 필요 없다는 건가?’
어지간히도 무시당한다 싶어 카르도는 미간을 찡그렸다. 남부공 대리인 레나는 새 남부공에게 양해는커녕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진을 친 나자와 협상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레나 루벨은 떠나며 자신의 어린 하녀를 북부공에게 맡겼다. 하녀를 공작에게 돌보도록 하다니, 카르도에겐 이게 대단한 과시처럼 느껴졌다.
‘모처럼 공작이 됐는데 주도권은 여전히 저쪽에 있군.’
작위는 화려하게 받았는데, 그 후 존재감을 전혀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는 곤란하다.’
초반에 치고 나가지 않으면 정통성을 가진 북부나 기반이 단단한 동부를 당해내지 못한다. 카르도는 위기감을 느끼며 보고서를 넘겼다. 다행히 기회는 아직 있었다. 망자의 왕들이 쓰러지며, 그리고 망자가 사라지며 배교자들은 꽤 절박한 상황이었다.
―배교자들은 망자를 부를 수 없게 되자 크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나자 아이테르너의 망자는 왕에게 강력하게 복종하는 듯 배교자들의 부름에는 응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보고대로라면 현재 배교자들은 음험한 강도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쪽을 공략해야겠군.’
레나가 나자와 협상하는 사이 배교자들을 소탕하면 이목을 끌 수 있다. 나아가 그때 본 자들도 잡아들이면…….
“저하.”
돌연 밖에서 들려온 음성이 카르도의 몰입을 깨트렸다.
“추기경 저하께서 오셨습니다.”
의아해하던 카르도는 추기경이란 말에 설핏 굳었다.
“좋은 밤이네요. 흐리고, 음습하고.”
인사 같지도 않은 허튼소리와 함께 클라비스가 남부공의 방으로 들어왔다.
“이 시간엔 어쩐 일로…….”
“적응은 잘하고 있나 보러 왔어요. 뭐, 알레스 가의 휘장을 싹 뜯어고친 걸 보니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지만.”
클라비스가 장난스레 웃으며 카르도가 차지한 남부공의 방을 돌아보았다. 카르도는 그 불청객의 행동을 조용히 경계하며 말했다.
“모두 저하의 덕분입니다.”
“진심이에요?”
“물론입니다.”
“그럼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천하의 추기경이 부탁이라니. 카르도는 예감이 좋지 않았지만 선선히 끄덕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좋네요, 그럼 당신 아들 나한테 줄래요?”
클라비스의 요구에 카르도는 짙게 웃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걸 감추기 위해서였다.
“왜 대답이 없지? 뭐든 하겠다며?”
클라비스가 그 모습을 농밀이 비웃자 카르도는 빙그레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다만 지금 아이가 아파서 요양 중입니다.”
“들었어요. 오죽하면 아버지의 축하연에도 못 나왔을까.”
클라비스가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찼다.
“가장 좋은 의사를 붙여줄 테니 황궁으로 들어오게 하세요. 나도 꽤 아끼는 아이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요.”
클라비스는 그렇게 말해놓고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아, 원래 자식 걱정 같은 거 안 하는 사람이었지?”
클라비스의 뼈 있는 말에 카르도는 잠자코 웃었다.
“바로 짐을 챙기게 하겠습니다. 아마 모레쯤 입궁할 수 있을 겁니다.”
“모레.”
클라비스는 카르도가 특정한 날을 중얼대더니 기꺼이 끄덕였다.
“마침 좋네요. 나도 준비를 좀 해야 하니까.”
클라비스가 수긍하자 카르도는 조용히 숨을 돌렸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오신 겁니까?”
“그것도 있고, 레나 양에 대해서도 좀 궁금해서요. 이제 같은 진영인데 사이는 좀 어때요?”
클라비스의 입에서 레나라는 이름이 나오자 카르도는 조금 지겨워졌다. 레나, 레나. 이제 그 이름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다행히 큰 문제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요, 부녀가 사이좋게 지내야죠. 안 그래도 가십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떠들지 못해 안달이던데.”
“수면 위로 오르지 못하는 소문에 귀 기울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긴 누가 감히 공작의 가족사를 건드리겠어.”
‘……이 인간이 왜 이러지?’
적당히 맞춰주던 카르도는 클라비스의 태도에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있다. 레나에 대해, 뭔가 말하고 싶은데 참는 기색이다. 동시에 내가 그걸 알고 있는지 떠보는 모양새다. 카르도가 의도를 헤아리려는 듯 바라보자, 클라비스는 속으로 웃었다.
‘아직 모르네.’
레나 루벨의 정체.
‘알면 이렇게 편하게 못 있지.’
클라비스는 레나가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감춘 것을 확인하고 더 짙게 웃었다.
‘나자처럼 전면전을 선언해도 됐을 텐데, 이렇게 장단을 맞추는 이유가 뭘까?’
클라비스는 스스로의 물음에 조용히 소망했다. 그게 복수심 때문이면 좋겠다고.
“다른 것보다 레나 양이 언제까지 칼을 갈기만 할지 궁금하네요. 나한테도, 그리고 당신한테도.”
클라비스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르도는 추기경을 배웅한 후 곧장 책상에 놓인 종을 흔들었다. 종소리에 옆방 문이 열리며 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엔지의 상태는 어떻지?”
“울음은 그치셨고, 요즘엔 조용히 책만 읽고 계신다고 합니다.”
“말고, 건강 상태.”
“아, 기침이 더 심해지셨습니다. 벌써 열흘 넘게 갇혀 계신 터라 아무래도…….”
집사가 말끝을 흐리며 카르도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아가씨에 이어 도련님까지 변을 당할까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이틀 후 엔지를 황궁으로 보낼 테니 준비하게.”
엔지를 내보낸다는 말에 집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클라비스 추기경이 돌보기로 했으니 짐을 챙겨놓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들뜬 집사의 귓전에 후작의 목소리가 무겁게 떨어졌다. 당장 돌아서려던 집사는 우뚝 서서 주인을 바라보았다. 카르도는 조용히 서랍을 열어, 작은 약병을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내일 밤 용량을 조절해서 먹이게. 혼수상태로 황궁에 들어가 사나흘 후 숨을 거둘 수 있게.”
카르도의 단조로운 음성에 노집사의 탁한 눈동자가 급히 흔들렸다. 목 안에 경악이 차올랐지만, 그는 어리석게 토를 다는 대신 공손히 대답했다.
“네, 주인님.”
“이번엔 실수가 없었으면 좋겠군.”
“……명심하겠습니다.”
약병을 받은 집사는 바늘을 삼킨 표정으로 물러났다. 다시 혼자가 된 카르도는 피로감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다. 끝까지 순진한 아들로 남아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자기한테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왜 괜히 나서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카르도는 불편한 마음을 애써 다스렸다. 클라비스 때문에 시일을 조금 앞당긴 것뿐, 어차피 다른 방법은 없었다.
‘작위도 받았으니 슬슬 상을 치러도 되겠지.’
하지만 추기경이 아이를 보내라고 한 직후 시의적절하게 엔지가 죽으면 의심을 받을 것이다.
“……배교자 소탕을 서둘러야겠군.”
자리를 비우면 추궁하기 어렵고 시간이 흐르면 일이 흐지부지될 테니. 그리고 그자들도 찾아야 한다. 남부공을 죽인 날, 남부공의 뒤로 도망치던 자들. 검은 머리의 동부인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