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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화. 레나 루벨의 동생 (168/208)

168화. 레나 루벨의 동생2021.12.09.

마른기침 소리가 밤중에 울렸다. 연신 콜록대던 엔지는 어깨를 떨며 담요를 여몄다.

16562835325331.jpg‘추워…….’

어느덧 가을, 엔지가 기침을 시작하는 계절이었다. 그래서 이맘쯤 엔지의 침실엔 동방에서 온 주물 화로와 목에 좋은 차, 그리고 오리털로 된 도톰한 이불이 놓였다. 그 속에서 어머니와 하인들의 보살핌을 받는 게 엔지의 평소 역할이었다. 엔지는 옛날 일을 떠올리다 창가를 돌아보았다. 커튼조차 없는 창문이 바람에 덜컹댔다. 분명 저쪽은 더 추울 것이다. 하지만 엔지는 이미 차가운 몸을 이끌고 창가에 앉았다. 창문 틈으로 달빛이 내리는 까닭이었다. 엔지는 시린 코를 훌쩍이며 달빛 아래 책을 펼쳤다. 그 책은 지금 엔지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이자, 이 저택에 얼마 남지 않은 레나 루벨의 흔적이었다.

16562835325331.jpg‘누나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까?’

엔지는 레나를 떠올리며 누나가 사랑한 시집을 펼쳤다.

16562835325331.jpg“용기를, 구합니다…….”

그러곤 달빛에 의존해 한 자씩 느리게 읽어내렸다. 시구를 곱씹던 엔지는 시집 첫 장에 있는 시인의 서명을 살펴보았다. 필체가 익숙한 건 기분 탓일까? 그때 가벼운 노크 소리가 엔지의 상념을 깨트렸다.

16562835325345.jpg“도련님, 접니다.”

기별과 함께 문이 열리며, 일렁이는 주홍빛이 달빛을 몰아냈다.

16562835325345.jpg“아직 깨어 계셨군요.”

조심히 들어온 건 루벨 가문의 집사였다. 엔지가 집사를 경계하자, 그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16562835325345.jpg“내일 황궁으로 자리를 옮기실 겁니다.”

16562835325331.jpg“황궁으로?”

엔지가 쉰 목소리로 중얼댔다.

16562835325345.jpg“예, 주인님의 노여움이 이제야 풀리셨나 봅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엔지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그 사이 노집사는 인자하게 웃으며 들고 온 쟁반을 내려놓았다.

16562835325345.jpg“그러니 오늘은 약을 드시고 푹 주무십시오. 내일 상한 얼굴로 입궁해서는 안 되니까요.”

16562835325331.jpg“아버지 화가 정말 풀리셨어?”

16562835325345.jpg“물론입니다. 어찌 되었든 도련님은 주인님의 외아들이신걸요.”

16562835325331.jpg“……그럼 어머니를 불러줘.”

엔지의 요청에 집사가 난처한 듯 고개를 저었다.

16562835325345.jpg“마님께선 이미 침소에 드셨습니다.”

16562835325331.jpg“어머니가 내 걱정 안 하셔?”

집사는 그저 사람 좋게 웃더니, 들고 온 약과 물을 엔지에게 내밀었다. 집사의 담담한, 그리고 단호한 행동에 엔지는 문가를 돌아보았다. 만약 아버지의 화가 정말 풀렸다면 어머니가 오셨을 거다. 하지만 어머니는 오지 않고 집사 편으로 약이 전달됐다. 이걸 거부하면 문을 지키는 하인들이 와서 억지로 먹이겠지. 처음, 이 방에 갇힐 때처럼. 엔지가 굳은 듯 서 있자 집사가 와서 약을 손수 입에 넣어주었다.

16562835325345.jpg“삼키셔야 합니다.”

엔지는 표정 없이 집사를 바라보다 결국 꿀꺽하고 약을 삼켰다. 집사는 엔지의 입안을 확인하고 그를 침대에 눕혔다. 그러곤 혹여 토하지 못하게 한 시간가량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사가 떠나자 자는 척하던 엔지가 눈을 떴다.

16562835325331.jpg‘말도 안 돼.’

엔지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애써 억눌렀다.

16562835325331.jpg‘날 정말 죽일 생각이야.’

몸이 저렸다. 평소 먹던 약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완벽하게 버려졌다는 생각에 엔지는 하염없이 눈물을 떨어트렸다. 하지만 울더라도 쓰러지지는 않았다. 엔지는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가구 밑에 숨겨둔 작은 주머니를 꺼내 펼쳤다.

16562835325331.jpg‘남부공 저하께 드리려고 했던 약…….’

이 안에 맞는 해독약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죽을 수는 없다. 엔지는 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잠시 기다리니 몸에 열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후엔 창가로 달려갔다. 숨겨둔 포크로 헐거운 창문 살을 들어 유리를 분리하고, 그 너머로 커튼과 침대 시트를 이어 만든 밧줄을 던졌다. 엔지는 밧줄을 잡고 내려가기 전에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옥탑의 높이가 까마득했다. 덜컥 겁이 났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창틀에 올랐다.

16562835325331.jpg‘도망칠 거야.’

잘못한 거 하나 없이 죽을 순 없다.

16562835325331.jpg‘아직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했는데, 이대로는 못 죽어.’

게다가 누나한테, 레나 루벨한테 하고 싶은 말과 듣고 싶은 말이 가득하다. 마음을 다진 엔지는 용기를 내서 건물 외벽에 매달렸다.

16562835325331.jpg‘아래층 창틀까지만 가면…….’

하지만 곱게 자란 도련님은 이런 모험이 익숙하지 않았다.

16562835325331.jpg“윽!”

얼마 내려오지도 못했는데 매듭을 딛던 발이 덜컥 미끄러졌다. 그 바람에 팔다리로 밧줄을 타고 내려오던 엔지는 두 팔로만 매달린 꼴이 되었다.

16562835325331.jpg‘아, 안돼.’

엔지는 허둥대며 다리로 밧줄을 엮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커튼으로 만든 밧줄은 이리저리 출렁대기만 했다. 팔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러다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엔지는 급히 두리번댔다. 왼편에 직각으로 꺾인 벽면이 보였다. 가족들이 쓰는 본관과 이어진 별관이었다. 죽거나 살거나 둘 중 하나다. 엔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힘껏 발을 굴렀다. 그대로 시계추처럼 반동을 주다가 별관 창문으로 돌진했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엔지의 몸이 창문에 부딪혔다. 엔지는 그대로 밧줄을 놓쳤고, 잠그지 않은 창문은 안으로 열리며 침입을 허용했다.

16562835325331.jpg“으윽…….”

복도를 데굴데굴 구른 엔지는 그대로 쓰러져 신음했다. 온몸이 아팠다. 하지만 아파할 겨를도 없었다. 어쩐지 저택이 소란했다. 사람들의 고함과 발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16562835325331.jpg‘벌써 눈치 챘어?’

엔지는 황급히 숨을 곳을 찾았다. 그런데 그가 무릎을 세우는 순간, 이질적인 굉음이 울렸다. 콰앙! 저택에서 들릴 리 없는 과격한 소리였다. 동시에 사람들의 고성은 사라지고, 대신 바쁜 발소리만 이리저리 울려 퍼졌다.

16562835325331.jpg‘뭐지? 날 찾는 게 맞나?’

그런 것치고는 너무 과격하다. 엔지는 두려워하면서도 일단 보이는 곳에 들어가 숨었다. 그렇게 숨죽이길 한참, 온 저택을 뒤지던 발소리가 드디어 엔지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가구 밑에 웅크린 엔지는 눈을 질끈 감았다.

16562835382206.jpg“촉새, 여기 있냐?”

퉁명스럽고 익숙한 음성에 엔지는 눈을 홉떴다.

16562835325331.jpg‘왜 이 목소리가…….’

엔지는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상대방은 엔지의 입장을 조금도 배려해주지 않았다.

16562835382206.jpg“없으면 간다, 나오려면 얼른 나와.”

떼놓고 간다는 협박에 엔지는 놀라서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꿈을 꾸는 표정으로 문 앞에 선 자를 바라보았다.

16562835325331.jpg“루, 루비드 저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엔지를 부른 건 다름 아닌 루비드였다. 그는 북부 기사들을 대동하고 문가에서 엔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16562835325331.jpg“여긴 어떻게…….”

16562835382206.jpg“조잘조잘 떠드는 건 나가서 해.”

엔지가 신음하자 루비드는 털 망토를 벗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16562835382206.jpg‘망할 레나 루벨, 나한테 심부름을 시키다니.’

루비드는 짜증을 내면서도 잠옷 차림인 엔지의 어깨에 망토를 손수 둘러주었다. 그러곤 엔지를 일으키다가 놀라서 물었다.

16562835382206.jpg“너 왜 이렇게 뜨거워?”

16562835325331.jpg“예……?”

엔지는 무슨 말인지 몰라 루비드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아까부터 식은땀이 나고 머리가 무거웠다.

16562835409316.jpg“이런.”

엔지의 몽롱한 귓가에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62835409316.jpg“누가 내 불쌍한 어린 양을 이 꼴로 만들었지?”

16562835325331.jpg“추기경 전하…….”

루비드에 이어 클라비스까지 나타났다. 이 밤중에, 기사들까지 대동하고. 그런데 왜 아버지는 안 나오지? 엔지는 상황을 이해하고 싶었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몸도 점점 떨렸다.

16562835409316.jpg“이리 보내, 루비드 군. 증인은 교회에서 보호하기로 했잖아.”

16562835325331.jpg‘증인?’

클라비스가 손짓했다. 거기에 대고 루비드가 뭐라고 성을 내는데, 엔지는 그 말을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소리가 멀어지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래서 소년은 무례를 무릅쓰고 루비드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러곤 마구 짖는 루비드에게 마지막 힘을 짜내 속삭였다. 저 독을 먹었어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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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용기를 구합니다. 잔혹한 갈림길에서 선을 택하는 용기를 구합니다. 두렵고 험난할지라도 악에서 벗어날 용기를 구합니다. 선한 길에 고난이 가득함은 우리가 일찍이 선하지 못한 탓이며 악한 길이 달고 안락함은 우리가 쉽게 주저앉기 때문이니 주여, 다만 평화를 위해 나아가는 용기를 구합니다. . . . 따사로운 햇살이 느껴졌다. 밝은 빛에 눈을 뜬 엔지는, 은은한 향기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16562835409316.jpg“일어났구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엔지는 말한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하얀 모습이 마치 천사 같았다. 누구지? 많이 본 사람 같은데, 누구지? 엔지가 멍하니 눈을 깜빡이자 그 사람은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16562835409316.jpg“머릿속이 하얗지? 열 때문에 그래. 그래도 어젯밤보단 많이 내렸네.”

그 사람이 손으로 엔지의 이마를 짚었다. 서늘한 손길이 좋아서 엔지는 저도 모르게 그 손에 얼굴을 기댔다. 그러자 위에서 키득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좀 징그럽게 웃는다 싶어 엔지는 다시 그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3초 후, 엔지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16562835325331.jpg“저, 전하!”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엔지는 허둥대며 클라비스와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클라비스는 실실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16562835409316.jpg“이렇게 어리광쟁이인 줄은 몰랐네, 엔지 군.”

16562835325331.jpg“죄, 죄송합니다! 전하께 결례를…….”

16562835409316.jpg“됐어, 진정해.”

클라비스는 너그럽게 손사래를 쳤고 엔지는 재빨리 상황을 살폈다.

16562835325331.jpg‘여기, 황궁인가?’

엔지는 혼란스러워하며 화려한 침실을 둘러보았다.

16562835409316.jpg“기억 안 나? 루비드 군이랑 같이 저택으로 데리러 갔었는데.”

16562835325331.jpg“아……!”

엔지는 쓰러지기 직전의 기억을 비로소 떠올린 듯 눈을 크게 떴다.

16562835325331.jpg“어, 어떻게 된…….”

16562835409316.jpg“레나 루벨이 네 아버지를 고발했어.”

16562835325331.jpg“고발이요?”

16562835409316.jpg“증인으로 네 신병 확보를 요청했고. 고위 귀족의 재판은 북부에서 주관해서 루비드 군이 데리러 갔던 거야.”

엔지는 멍한 얼굴로 클라비스의 말을 하나씩 이해했다. 그러곤 한층 심각해진 얼굴로 물었다.

16562835325331.jpg“죄목은 뭐죠?”

16562835409316.jpg“반역과 살인.”

간결한 두 개의 죄가 엔지의 심장을 욱신 옥죄었다. 엔지가 말을 잃자 클라비스는 해맑게 농을 던졌다.

16562835409316.jpg“그나저나 놀랐어, 엔지 군. 설마 그 꼭대기 방에서 탈출할 생각을 하다니. 하마터면 증인석에 망자가 나올 뻔했지 뭐야.”

엔지는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클라비스를 쳐다보다가 뒤늦게 흠칫 놀랐다.

16562835325331.jpg‘……공범이잖아, 이 사람.’

아버지가 남부공 저하를 죽이려 한 건 추기경의 묵인과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클라비스와 카르도의 밀담을 떠올린 엔지는 서둘러 침대를 내려갔다.

16562835409316.jpg“응? 어디 가게?”

16562835325331.jpg“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루비드 저하께 가보겠습니다. 증인 보호도 북부의 소관이니까요.”

16562835409316.jpg“아니야, 다시 앉아, 엔지 군.”

클라비스가 말렸지만 엔지는 듣지 않고 카펫을 밟았다. 그러자 클라비스가 나직이 덧붙였다.

16562835409316.jpg“나는 가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는데.”

명령이나 다름없는 말에 엔지는 움찔하고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엔지는 곧게 서서 대답했다.

16562835325331.jpg“저는 죄를 짓지 않았어요.”

16562835409316.jpg“그래서?”

16562835325331.jpg“행동이 구속될 이유는 없습니다.”

엔지의 딱딱한 대답에 클라비스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16562835409316.jpg“내가 무서워서 그래?”

그러더니 뱀처럼 눈을 가늘게 하며 엔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16562835409316.jpg“듣고 있었지? 그날.”

카르도 루벨이 권능을 조르던 날. 클라비스의 물음에 엔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클라비스가 다시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16562835409316.jpg“괜찮아, 엔지 군이 뭐라고 증언하든 내겐 아무 피해도 없으니까. 순전히 엔지 군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무서우면 얌전히 있어, 괜히 다치지 말고.”

16562835325331.jpg“……그럴 수는 없어요.”

16562835409316.jpg“무슨 소리야, 새삼스럽게. 여태 누나를 팔아치운 집에서 잘 지내놓고.”

클라비스가 웃으며 한 말이 엔지의 가슴을 후벼팠다. 아픔을 느낀 엔지가 단호히 부정했다.

16562835325331.jpg“나는 몰랐어요.”

16562835409316.jpg“편리한 변명이네.”

하지만 클라비스는 여상한 태도로 조롱했고, 반쯤 돌아섰던 엔지는 클라비스를 향해 바로 섰다.

16562835325331.jpg“변명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나는 어렸고, 몰랐고, 아무도 내게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알고, 아니까 책임질 거예요.”

16562835409316.jpg“책임진다고? 어떻게?”

16562835325331.jpg“그건 제가 알아서 할 일이에요. 그러니까 비난하면서 조종하려고 하지 마세요.”

엔지가 대들 듯 말했다. 그래서 클라비스는 조금 놀랐다. 이 새가슴이 내 앞에서 눈썹을 곤두세우고 반항하다니. 클라비스는 흥미와 황당함을 느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16562835409316.jpg“신선하네. 왜, 아버지 때문에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거야?”

16562835325331.jpg“아버지는 상관없어요, 이건 전하께 하는 말이에요.”

16562835409316.jpg“글쎄, 정말 상관없을까? 내가 보기엔 아버지한테 당한 걸 나한테 푸는 것 같은데. 독을 먹인 사람은 따로 있는데 구해준 사람에게 화풀이라니, 너무 비겁하지 않아?”

16562835325331.jpg“나도 알아요, 비겁한 거!”

참다못한 엔지가 빽 소리쳤다. 추기경에게 소리를 지르다니, 미친 짓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화가 났다.

16562835325331.jpg“내가 못난 건 내가 제일 잘 알아요, 그러니까 친절하게 가르쳐주실 필요 없어요!”

엔지는 죽다가 살아났다. 도련님으로 태어나고 자란 집에서 순식간에 사형수로 전락하는 것을 경험했다. 안 그래도 이 형편없는 상황에 지쳤는데, 클라비스가 뱀처럼 접근하니 그간 눌러왔던 불만이 한 번에 폭발했다.

16562835325331.jpg“그래서 어쩌라고요, 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건데요! 진실을 알려준다더니 뒤에서 수상한 일만 꾸미고, 남의 불행을 즐기면서 대체 뭘 하는 거냐고요! 편리한 변명이라고요? 나는 누나가 나타나고 단 한 번도 편했던 적 없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함부로 말하는데요! 제가 비겁해서요? 제가 비겁하다면 전하는……!”

빠르게 소리치던 엔지의 이성이 잠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 말을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엔지는 악에 받쳐 있는 힘껏 소리쳤다.

16562835325331.jpg“전하는 양심도 지조도 없는 최악의 변태예요!”

어쩌다 이런 표현을 떠올렸는지 모르겠지만, 엔지는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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