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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화. 상견례 (170/208)

170화. 상견례2021.12.16.

16562836237907.jpg“우리 결혼하자에 대한 대답.”

16562836237918.jpg“흐윽……!”

귓가에 울린 목소리에 레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신음했다. 그러면서 린과 얽혀 있는 발을 동동 굴렀다.

16562836237918.jpg“아, 린…….”

16562836237907.jpg“나 진지해.”

레나가 몸부림치자 린은 여상히 속삭이며 레나의 귓불에 입을 맞췄다. 적나라하게 들린 입맞춤 소리에 레나는 다시 한번 몸서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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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릇을 잘못 들였다. 버릇을 잘못 들였어. 레나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자신에게 파고든 린의 양 뺨을 들어 올렸다. 레나는 린이 치명적인 척할 때마다 귀여워서 소름이 끼쳤고, 린은 레나가 이걸 좋아하는 걸 알고 필요할 때마다 적극 써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레나는 이미 홀딱 넘어가 린이 예뻐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16562836237918.jpg“이런 식으로 애교 부리면…….”

16562836237907.jpg“부리면?”

레나는 뭐라고 으름장을 놓을까 고민하다가,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의 애꿎은 얼굴을 꾹 눌렀다. 린은 고개를 흔들어 레나의 손을 떨치더니,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16562836237907.jpg“기다리고 있어, 계속.”

너의 대답만. 다소 장난스럽게 운을 뗐지만 린은 진심이었다. 남부공의 장례 직후, 린은 레나에게 청혼했다. 그때 레나는 울먹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16562836237918.jpg―하고 싶어.

16562836237918.jpg―나도 너랑 결혼하고 싶어.

레나로서는 최선의 대답이었고, 그래서 린도 당시엔 만족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는 이게 승낙도 거절도 아닌 것을 곧 깨달았다. 그래서 나자를 만나기 전에 정확한 대답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6562836237907.jpg“응?”

린이 재차 채근하자 레나도 그의 심정을 헤아린 듯 장난기를 거뒀다.

16562836237918.jpg“……나도 하고 싶어. 그럴 수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아.”

하지만 결국 레나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이전과 같았다. 린이 실망하는 기색에 레나가 서둘러 덧붙였다.

16562836237918.jpg“그때 네가 해준 이야기는 정말 기뻤어.”

그때, 린은 주저하는 레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16562836237907.jpg―그건 너 혼자 치러야 할 대가가 아니야.

그 말은 레나와 레나에게 속한 모든 이들을 환희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생각만으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16562836237918.jpg“정말 고맙고 소중했어. ……그런데 있잖아.”

하지만 그 기쁨을 누리기엔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

16562836237918.jpg“나 때문에 전쟁이 계속되면 안 될 것 같아.”

레나가 평온한 얼굴로, 동시에 어딘지 서글픈 눈으로 속삭였다. 죄 없는 자가 죗값을 모두 뒤집어쓰는 건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은 그 단순한 진리조차 난제로 만든다. 레나 루벨이 지상에 남아서 균열이 유지되면, 그로써 피와 생기를 탐하는 망자들이 시시때때로 넘어오면 사람들은 계속 싸워야 한다. 하루에도 몇십 명씩 죽고 몇백 명씩 다쳐야 한다. 그 원인이 뭔지 알면서 내 사랑을 지키겠다고 남의 목숨을 모르는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린이 자신을 위해 평생의 전쟁을 불사한다면 그것참 낭만적이기는 하지만 기쁘기보다는 슬플 것 같았다. 레나는 용기를 구하는 비트라의 시 또한 좋아했고, 그 시인이 기도한 것처럼 자신도 옳은 길을 택하기를 바랐다.

16562836237918.jpg“그렇다고 포기한 건 아니야. 다른 방법이 있는지 계속 고민 중이야.”

동시에 레나는 린과 유니에게 한 약속도 외면하지 않았다.

16562836237907.jpg“고민 중인 방법이 있어?”

16562836237918.jpg“응…….”

레나는 조금 주저하며 대답했다.

16562836237918.jpg“여러 변수가 있지만 떠오른 방법이 있기는 해.”

16562836237907.jpg“어떤 건데?”

린이 기대하듯 물었다. 그래서 레나는 망설이면서도 말을 이었다.

16562836237918.jpg“니힐을 무덤으로 돌려보내고 나면, 아마 무덤의 상황은 둘 중 하나가 될 거야. 니힐에게 심장을 뺏긴 왕이 부활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왕들이 생기거나. 그런데 어느 쪽이든 내가 할 일은 비슷할 거야.”

레나는 자신이 없는 듯, 답지 않게 린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16562836237918.jpg“망자의 왕들과 담판을 지어보려고 해.”

레나는 린이 황당해하지 않길 바라며 힐끗 쳐다봤다. 다행히 린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어째 모호한 반응이지만, 레나는 차라리 안심하며 말을 이었다.

16562836237918.jpg“그때가 되면 무덤의 시간은 또 무한히 늘어날 테니까, 왕들에게 불가침 약속을 받을 때까지 설득이든 싸움이든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그게 십 년이든, 백 년이든. 이 세상의 시간은 더 천천히 흐르며 나를 기다려줄 것이다.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상상한 변수들을 두서없이 꺼냈다. 악의로 가득 찬 히엠스 그라샤와 칼리고가 부활하면 피곤할 것 같기는 하다. 첼레스테는 그나마 낫다. 그 왕은 자식을 버린 죄책감을 내게도 느끼고 있으니 아마 협조가 가능할 것이다. 만약 새로운 왕들이 등장하면 다시 고민해야겠지만, 어쨌든 할 일은 같다. 레나는 지상에서 전쟁을 지속하는 것보다 자신이 무덤에서 조용히 해결하는 게 모두를 위해 옳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전해 들은 린이 레나의 말을 곱씹으며 중얼댔다.

16562836237907.jpg“혼자 망자의 왕들과 싸우겠다고.”

16562836237918.jpg“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야. 상성으로 따지면 내가 훨씬 유리하기도 하고…….”

말마따나 레나의 망자인 용서받지 못한 자들은 다른 망자들을 무력화할 수 있다. 그러니 그 부분에서 유리한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아직 살아 있는 레나는 죽은 왕들에 비해 훨씬 불리하기도 했다. 그들은 몇 번이나 죽어도 부활하지만 레나의 목숨은 하나 뿐이다. 때문에 이 계획은 승산을 계산할 수 없는 도박에 가까웠다. 이처럼 영리하다고 할 수 없는 방법인 탓에, 레나는 말해놓고 린이 뭐라고 할지 내심 염려했다. 그런데 레나의 걱정과 달리 린은 웃었다.

16562836237918.jpg“왜 웃어?”

16562836237907.jpg“너다워서.”

이건 칭찬일까 욕일까? 긴가민가해 하던 레나는 이어진 말에 더 어리둥절해졌다.

16562836237907.jpg“사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

린은 연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천천히 운을 뗐다.

16562836237907.jpg“그래서 나자를 만나기 전에 그 얘기를 하러 왔어.”

  *** 동부 기사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전방을 주시했다. 황제의 관심, 혹은 미움을 받던 리그난 아이테르너의 기사들은 동부공과 함께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때문에 누구보다 노련하고 강인한 자들이지만, 그럼에도 눈앞의 광경에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가시를 두른 듯 흉측한 망자들이 전열을 완벽히 갖춘 채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데 저 무수한 망자 뒤에는 나자 아이테르너가 있다. 한 달 전, 망자의 왕으로 등장한 나자는 서부 접경지에 있던 자들이 다 듣게 소리쳤다. 첫눈이 내리기 전에 황제를 치겠노라고. 나자의 강인함을 익히 아는 동부 기사들에게 그 소리는 선전포고보다 사형선고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공포를 견디며 여기까지 온 기사들은 자신을 이끈 동부공을 바라보았다. 기대와 염려를 짊어진 채, 동부공 리그난 아이테르너가 전방을 향해 외쳤다.

16562836237907.jpg“나자 아이테르너!”

동부공은 차가운 목소리로 생모의 이름을 외쳤다.

16562836237907.jpg“협상을 제안한다!”

동부공의 고함이 망자들의 진열을 가로질렀다. 정적이 흐르고, 기사들이 눈치를 살필 때였다.

16562836320063.jpg“망자들이 움직입니다.”

데카의 보고와 함께 성벽처럼 굳건히 서 있던 망자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앞이 아닌 옆으로 몸을 끌더니,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뚜렷한 길을 냈다.

16562836320063.jpg“들어오라는 뜻 같습니다.”

데카가 동부공에게 나직이 고했다. 말마따나 안으로 난 길은 죽은 어머니가 호기롭게 외친 아들을 환영하는 것 같았다.

16562836237907.jpg“진군한다.”

동부공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자신의 약혼녀인 레나 루벨과 함께 앞서 나아갔다. 기사들도 말을 몰고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과연 협상에 응할 생각인지, 망자들은 기사들이 지척까지 다가와도 미동하지 않았다. 너른 들판을 건넌 동부공과 그의 기사들은 망자 군대 앞에서 잠시 멈췄다. 망자들이 낸 길은 생각보다 좁았다. 말을 탄 채로는 두 사람 정도만 지날 수 있는 폭이었다. 함정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지만, 동부공과 그의 약혼녀는 겁도 없이 망자들의 벽 틈으로 성큼 내디뎠다. 기사들도 그 뒤를 따르려 할 때였다. 쿵 소리와 함께 입구를 이루던 망자들이 서로의 뿔과 날개를 교차하며 길을 막았다.

16562836320063.jpg“저하!”

데카의 외침과 동시에 동부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었다.

16562836237907.jpg“검을 넣어라!”

하지만 동부공은 오히려 기사들에게 일갈했다. 약혼녀와 단둘이 고립된 형국인데, 동부공은 이런 상황을 예상한 것처럼 침착하게 말했다.

16562836237907.jpg“나자 아이테르너가 원하는 게 이거라면 응하겠다.”

동부공의 선언에 기사들은 주저하면서도 무기를 거뒀다. 그래, 누가 뭐라든 저들은 부모와 자식 간이다. 더군다나 나자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한 사람이다. 그러니 애써 살린 아들과 그의 약혼녀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 것이다. 기사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물러났다.

16562836237907.jpg“내가 돌아올 동안 대기해라.”

동부공은 그 말을 끝으로 약혼녀와 함께 돌아섰다.

16562836237918.jpg“역시 감탄할 만한 연기력이에요.”

기사들이 충분히 멀어지자, 레나가 웃음을 꾹 참으며 중얼댔다. 그래서 린은 조금 창피한 듯 대답했다.

16562836237907.jpg“적성엔 안 맞아.”

16562836237918.jpg“그런 것치곤 잘하던데.”

16562836237907.jpg“사실 소리칠 때마다 심장이 떨려…….”

린의 엄살에 레나는 기가 막힌 듯 웃음을 터트렸다. 린도 예쁘게 웃는 연인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함께라면 망자 군대 앞에서도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낼 수 있는 두 사람이지만, 그들도 앞으로 나아갈수록 말수가 적어졌다. 저 앞에 있을 나자 때문이었다. 무덤에서 몇 번 마주치기는 했지만 격동 속에서 스쳐 지나간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니 린이 정식으로 나자와 만나는 건 7년 전, 그가 죽기 전날 이후 처음이었다.

16562836237907.jpg“괜찮아.”

린이 자신을 염려스럽게 바라보는 레나에게 말했다.

16562836237907.jpg“나는 괜찮아.”

긴장한 기색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지만, 린은 그렇게 말하며 의연히 웃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망자의 길을 지나 왕의 안전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건 나자가 아니라 커다란 휘장이었다. 아니, 피막의 날개였다. 거대한 용이 똬리를 틀고 앉아 날개를 장막처럼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빛을 투과하는 날개 너머로 오만하게 앉은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16562836237918.jpg“나자 아이테르너.”

레나가 조심히 부르자, 날개로 된 장막 너머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16562836320063.jpg“기다리고 있었다.”

예상대로 나자의 목소리였다. 그는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는지 그 상태로 미동하지 않았다.

16562836237918.jpg“그때 말한 협상 때문에 왔어요.”

그래서 레나가 먼저 운을 뗐다.

16562836237918.jpg“도시로 접근한 망자들을 물려주세요. 그럼 황궁에 무덤과 이어지는 길을 내드릴게요. 이우라 씨에게 전언이 있다면 전해드릴 수도 있어요.”

16562836320063.jpg“원하는 건 그게 다인가?”

16562836237918.jpg“네, 그 길로 와주신다면 제가 더 제안할 건 없어요. 다만…….”

다만이라는 말과 함께, 린이 발언권을 넘겨받은 것처럼 대신 입을 열었다.

16562836237907.jpg“별개의 제안이 있습니다.”

린의 음성에 장막 저편에서 침묵이 흘렀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의미를 헤아릴 수 없었지만 린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16562836237907.jpg“니힐이 사라진 후에도 균열이 닫히지 않으면 무덤의 입구를 막아주십시오. 망자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16562836320063.jpg“……레나 루벨을 위한 제안이군.”

나자가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더니 레나에게 말할 때와 다름없는 투로 되물었다.

16562836320063.jpg“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있나?”

16562836237907.jpg“속죄의 기회라 여겨주십시오.”

16562836320063.jpg“속죄.”

나자는 처음 듣는 단어를 발음하듯 린의 말을 따라 했다. 그러더니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16562836320063.jpg“이미 목숨을 내줬는데, 그걸로 부족하다는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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