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행복하게 살게요2021.12.20.
“이미 목숨을 내줬는데, 그걸로 부족하다는 뜻인가?”
나자의 살벌한 목소리에 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옆에서 듣던 레나마저도 오싹함을 느낄 정도였다. 린이 변명할 틈도 없이, 나자가 칼날처럼 말했다.
“좋다.”
“어……?”
나자의 짧은 대답에 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레나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얼떨떨해하며 눈치를 살피자, 장막 너머에서 나자가 다시 매몰차게 말했다.
“좋다고 했다. 문제 있나?”
나자의 의사표명에 린은 긴장을 푸는 대신 혼란에 빠졌다.
‘왜 저 사람은 좋다는 말을 죽이겠다는 말처럼 하는 거지?’
정말로 겁 먹었던 린은 이해할 수 없는 기분으로 장막 너머를 바라보았다. 퍽 당혹스러웠지만,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그럼 기간은 언제까지…….”
“균열이 다시 닫힐 때까지.”
나자가 린의 말허리를 자르며 대답했다. 덕분에 린은 더 얼떨떨해졌다. 달리 조건을 내건 것도 아닌데, 나자의 대답은 린이 생각한 것 중 가장 이상적이었다. 동시에 나자에겐 가장 손해가 될 대답이었다. 레나 루벨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균열은 닫히지 않는다. 그러니 불행한 사고가 없다면 한 사람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나자는 균열을 지켜야 한다. 더군다나 무덤과 지상의 시간차를 생각하면, 그건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린은 나자가 왜 이토록 선뜻 대답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고뇌하는 린을 대신해, 레나가 나자에게 해야 하는 말을 했다.
“감사합니다.”
린이 놀라서 돌아봤다. 하지만 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협상의 상대가 아니라 집안의 어른에게 하듯 공손히 말했다.
“행복하게 살게요.”
레나의 다정한 음성에 나자를 경계하느라 바빴던 린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나자는 자신의 아들과 그의 연인을 너그럽게 대하고 있었다. 린이 그 사실을 깨닫고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데 장막 뒤에서 나자가 물었다.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지?”
여전히 시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어쩐지 더는 무섭지 않았다. 레나는 나자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싱긋 웃으며 린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말하라는 듯이. 그 의미를 알아챈 린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다른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습니다.”
“다른 방법이라고 해봐야 그리 쓸 만한 대책은 없을 텐데.”
“그렇긴 하지만…….”
나자의 날카로운 물음에 린은 조금 느리게, 하지만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함께할 수 있다면 뭐든 해볼 작정이었습니다.”
린은 그렇게 말하고 긴장한 채 나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나자는 말이 없었다. 한참 후 들릴 듯 말 듯하게 그런가, 하고 중얼댄 게 전부였다.
“더 할 말이 남았나?”
나자가 딱딱하게 물었다. 용건이 없으면 꺼지라는 말처럼 들려서 레나와 린은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런데 돌아서기 전에 린이 돌연 입을 열었다.
“아까 말한 속죄는 나에 대한 게 아니었습니다.”
나자의 차가운 반응이 마음에 걸렸던 린은 그의 그림자를 향해 해명했다.
“그건 다른 이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내겐 갚을 것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받은 삶에 만족합니다.”
비록 사무치게 외롭고 악몽처럼 끔찍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살아냈고 지금도 살아 있다. 그리고 살아 있기에 가진 것을 다 줘도 아깝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모두 당신을 통해 삶을 얻은 덕이다. 비록 감사하다는 말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마음은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 내 말했지만 나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직 침묵만 남긴 채, 나자를 휘감고 있던 용이 돌연 날개를 쳤다. 거친 바람이 몰아쳐 레나와 린을 덮쳤다. 날리는 흙먼지에 두 사람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사이 땅이 무너지는 소리가 울리며 나자를 태운 용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레나와 린을 에워싼 망자들도 일시에 날개를 펼쳐 왕의 뒤를 따랐다. 망자들이 모두 떠나고 지상에는 레나와 린만 남았다. 순식간에 허허벌판에 놓인 두 사람은 조금 허탈한 기분으로 하늘을 가득 채운 용들을 바라보았다.
“이해했을 거야.”
“응…….”
레나의 말에 린은 묵묵히 끄덕였다. 린은 하늘 위로 멀어지는 나자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린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자 역시 그를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갈까?”
망자들이 완전히 멀어지자, 레나가 말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시간을 맞추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아.”
***
“멀쩡하네.”
루비드의 퉁명한 말에 엔지는 배시시 웃었다.
“보고 싶었어요, 저하.”
“켁.”
엔지가 루비드를 다시 만난 건 황궁에서 눈을 뜬 지 사흘만이었다. 원래는 클라비스를 변태로 명명한 그 날 저녁에 루비드를 보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그때 엔지는 또 한 번 고열에 시달렸다. 엔지가 저택에서 먹은 약은 구하기도 힘든 맹독이었고, 안 그래도 연약한 엔지의 몸은 옥탑에 갇혀 있는 동안 더 허약해져 있었다. 그래서 황궁의 내로라하는 의사들은 이 소년을 살려내기 위해 밤낮으로 진땀을 빼야 했다.
“이제 좀 괜찮냐?”
“네, 멀쩡해요.”
엔지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고, 루비드는 그 모습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못 들었다고 해서 대충 상황을 전해주러 왔다.”
“아버지는…… 구류되셨나요?”
“아니, 지금 제도에 없어.”
“네?”
“널 저택에서 빼내기 하루 전날 기사들을 데리고 서부로 떠났어. 배교자들을 소탕한다면서.”
정말이지 운도 좋지. 아니, 어쩌면 일부러 나선 걸 수도 있다. 엔지의 죽음에 무관한 척하기 위해.
“그래서 돌아오라고 소환장을 보냈는데 무시하고 있다.”
루비드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사흘만 더 기다려보고 계속 답이 없으면 북부에서 직접 연행할 예정이다.”
“그렇군요…….”
엔지는 멍한 얼굴로 끄덕였다. 지금쯤 아버지도 구류됐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니라니 기분이 이상했다.
“저, 아버지의 죄명이 살인과 반역이라고 들었어요.”
살인은 아마 남부공 저하에 대한 것, 그리고 반역은 두엄의 궁을 의도적으로 부순 것과 배교자들과 결탁하고 서부 요새를 습격한 것이겠지. 둘 다 혐의가 짙고, 특히 후자는 황제 폐하에 대한 피할 수 없는 반역이다.
“그럼 저도 반역자가 되는 거겠죠?”
“그건…….”
엔지의 물음에 루비드가 머뭇댈 때였다.
“들어갈게요!”
밖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문이 열리며 한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어……!”
“오랜만.”
엔지가 그 애를 보고 놀라서 소리치자 여자애, 유니는 건성으로 인사했다. 유니가 그대로 걸어와 소파에 앉으려 하자 루비드가 짜증을 냈다.
“뭐야, 누가 들어오래?”
“왕자님 보러 온 거 아닌데요.”
“이게 건방지게…….”
“잘 지냈냐? 밥은 먹었어?”
“야, 내 말 무시해?”
“무시라뇨, 그냥 상대하지 않는 거예요.”
“그게 무시잖아!”
루비드가 언성을 높이자 유니는 딴청을 피우며 하품을 했다. 엔지는 유니가 반가운 것도 잠시, 전혀 접점이 없던 두 사람이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를 적극적으로 갈구는 모습을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이게 오냐오냐하니까 점점 기어오르지.”
“저하, 오냐오냐가 무슨 뜻인지 모르시죠?”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엔지가 놀라서 중얼대자 유니와 루비드는 그리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설명했다.
“레나 루벨이 협상하러 가는 동안 이 꼬마를 이우라한테 맡겼어.”
“이우라 저하께요?”
“나는 생명의 은인이니까.”
“은인……?”
“그런데 이우라는 이 꼬마를 나한테 넘겼고.”
“넘기다뇨, 내가 무슨 물건이에요?”
유니와 루비드는 이 짧은 설명을 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싸워댔고, 엔지는 그 모습을 보며 이우라가 두 사람을 붙여놓은 이유를 이해했다.
‘엄청 잘 놀아.’
물 만난 고기처럼 노니는 두 사람을 보며 엔지는 납득하고 또 납득했다.
한편 루비드와 실랑이하던 유니는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엔지를 돌아봤다.
“아, 됐고. 아가씨가 너한테 전해주라고 하신 말이 있어.”
“누나가?”
“널 다치게 하지는 않을 거래. 약속하겠대.”
유니는 엔지가 뭘 걱정하는지 듣기라도 한 것처럼, 때맞춰 레나의 말을 전했다.
“하, 하지만…….”
“자세한 얘긴 나도 몰라. 그냥 이렇게만 전하랬어.”
엔지가 무어라 되물으려 하자 유니가 손으로 막았다. 엔지는 저도 모르게 울상을 지었고, 그 얼굴을 본 유니가 평소보다 친절하게 덧붙였다.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아가씨가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괜찮을 거야.”
유니의 담담한 선언에 엔지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 말도 전해달라고 하셨어.”
“어떤?”
“혼자 둬서 미안해.”
유니의 간결한 전언에 불안해하던 엔지의 눈이 커졌다. 소년은 놀란 듯 유니를 멍하니 쳐다보더니, 이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또 우냐?”
“아니거든!”
엔지는 코 먹은 목소리로 설득력 없이 소리쳤다. 그러곤 자신을 놀리는 유니를 외면한 채 불평했다.
“그, 그런 얘긴 직접 해야 하는 거 아냐?”
“아가씨랑 똑같은 소릴 하네.”
“뭐?”
“불만이면 다시 직접 들어. 아가씨가 곧 돌아오실 거니까.”
“언제 오는데?”
엔지가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유니는 막 입을 열었다가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오신다는 소식이 없네?”
유니는 설명을 바라듯 루비드를 돌아보았고, 나설 기회가 생긴 루비드는 혀를 차면서도 냉큼 대꾸했다.
“협상은 끝났다고 이미 연락 왔어. 그러니까 나흘 내로 제도에 들어오겠지.”
“그런데 오고 있다면 어디 지났는지 알려주잖아요.”
제국은 군대가 다니는 길목마다 봉화가 있어서 모든 소식을 황궁으로 신속하게 전한다. 그러니 유니의 말마따나 레나 루벨과 동부공이 황궁으로 돌아오고 있다면 지금쯤 중간 연락이 도착해야 맞다.
“잠깐 다른 데로 샜나 보지!”
할 말이 궁해진 루비드가 버럭 소리쳤다. 유니는 괜히 소리친다며 투덜댔고, 그걸 시작으로 둘은 또 서로에게 으르렁댔다. 엔지는 난처한 기분으로 그들을 지켜보다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춥고 외로운 옥탑에서 벗어난 게 이제야 실감 났다. 문득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엔지는 꾹 참고 미소를 유지했다. *** 화염이 몰아치며 대지를 핥았다. 남부 기사들은 두려움에 떨며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저곳은 배교자들의 은신처였다. 하지만 이제 남은 건 오로지 불바다, 피와 살을 태우는 냄새가 진동하는 생지옥뿐이었다. 잠시 후, 그 지옥 한가운데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동자가 푸르게 변한, 악마 같은 모습의 카르도 루벨이었다.
“저하.”
한 기사의 부름에 카르도의 새파란 눈동자가 방향을 바꿨다. 새 남부공의 푸른 안광이 자신을 비추자 기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카르도가 자신을 집어삼킬 듯 노려보았지만, 기사는 두려움을 참으며 용무를 전했다.
“검은 머리의 동방 민족을 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