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 이리 (172/208)

172화. 이리2021.12.23.

16562836756048.jpg“검은 머리의 동방 민족을 찾았습니다.”

기사의 겁먹은 목소리에, 카르도의 눈에서 타오르던 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눈동자 색이 돌아온 카르도는 이전처럼 온화하게 미소 짓더니 첩보를 전한 기사에게 너그럽게 말했다.

16562836756053.jpg“생각보다 일찍 찾았군. 수고 많았네.”

카르도의 정신이 돌아오자 시종들이 달려와 그의 몸에 묻은 재를 닦고 망토를 교체했다. 다시 단정해진 카르도 루벨 공작은 지체 않고 말에 올라탔다.

16562836756053.jpg“위치는?”

16562836756048.jpg“서부 접경지의 요새입니다. 제국 기사들이 퇴각하며 남긴 물자로 연명 중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16562836756053.jpg“알겠네, 서두르지.”

16562836756048.jpg“저, 저하.”

카르도가 기사들을 집결시키려 하자, 비서가 어두운 얼굴로 그를 붙잡았다.

16562836756048.jpg“소환장이 다시 도착했습니다. 사흘 내로 복귀하지 않으면 북부에서도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합니다.”

16562836756053.jpg“그렇다면 더더욱 서둘러야겠군.”

하지만 카르도는 대수롭지 않게 비서의 경고를 무시했다. 카르도는 레나가 자신을 고발했다는 사실을 배교자들을 소탕하던 중 알게 되었다. 하늘이 도운 셈이다. 만약 제도에서 구인장을 받았다면 속수무책 끌려갔을 텐데, 간발의 차로 연행을 피했다. 그리고 그 덕에 다시 기회가 생겼다. 너희를 모조리 파멸시킬 기회가. 날 반역으로 고발했다고. 그렇다면 진짜 반역자를 끌고 가주마. 그럼 제 천한 민족을 숨긴 동부공도, 서부 접경지를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 북부공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등에 업고 아비를 치려는 너, 레나 루벨도. 카르도는 전신으로 퍼지는 고양감에 이를 악물고 웃었다. 그의 길엔 언제나 역경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이겨냈고, 더 강해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북부와 동부의 공작들마저 몰락하면 이제 내가 황제 다음이다.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내게 어울린다. 나는 사냥꾼이자 양을 먹는 이리. 이리는 쫓기지 않는다. 쫓아가 삼킬 뿐이다.

16562836756086.jpg

  . . . 자작에서 공작이 된 카르도 루벨의 출세 가도는 제국은 물론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도 이례적이다. 그 화려한 이력은 훗날 신화가 될 것이 분명하지만, 정작 그 남자가 가진 최초의 기억은 참으로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어둡고 쾌쾌한 오두막, 지독한 술 냄새, 하루가 멀다고 터져 나오는 맞는 소리와 깨지는 소리, 그리고 여자의 울음소리. 그 초라한 지옥이 그가 기억하는 최초의 집이었다. 그가 아버지라 여기던 남자는 추하고 무능하며, 열등감이 가득한 주제에 소심했다. 그래서 맨정신일 때는 부단히 눈치를 보다가 술을 마시고 돌아와서 아내를 매질했다. 한편 그의 어머니는 남편에 비해 기이할 정도로 미인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얼굴로 남편에게 웃어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기야 매일 밤 난동을 부리고 다음 날 엎드려 비는 배우자를 향해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비교되는 부부였고, 그래서 남편은 매일같이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고 학대했다. 어린 카르도 역시 그의 화풀이에 몸이 성할 날이 없었다. 지옥이 지옥인지도 모르고 견디던 중, 그가 열 살이 되던 해 병 들어 죽어가던 어머니가 말했다.

16562836756048.jpg―서부의 루벨 성으로 가렴, 거기 네 친아버지가 있단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카르도가 느낀 감정은 놀람이 아니라 기쁨이었다. 저 더럽고 추한 남자가 자신의 생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그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어머니는 몰래 간직했던 은 단추를 카르도에게 넘겼고, 카르도는 어머니가 죽은 다음 날 서둘러 집을 나섰다. 동냥질과 도둑질을 가리지 않고 삯을 마련한 그는 석 달 만에 루벨 자작의 성에 다다랐다. 그 성 앞에서 카르도는 또 한 번 환희했다. 카르도의 어머니가 남긴 은 단추엔 루벨 성의 휘장에 새겨진 것과 같은 문장이 찍혀 있었다. 귀족의 사생아라니, 시궁창 같은 삶과도 작별이다. 카르도는 그렇게 생각하며 성문을 두드리고 은 단추를 내밀었다. 과연 경비병들은 단추의 문양을 알아보았다. 이윽고 그들이 사람을 부를 때, 카르도는 이제 자신의 운명이 뒤바뀔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가 무색하게도 그가 안내된 곳은 허름한 사냥꾼의 오두막이었다.

16562836756048.jpg―네 어미의 이름이 뭐냐?

나이가 많은, 무뚝뚝한 사냥꾼이 물었다.

16562836756048.jpg―어떻게 생겼지?

카르도는 그 사냥꾼에게 어머니의 이름과 외모를 설명했다. 그러자 사냥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다였다. 그날 이후, 카르도는 사냥꾼의 오두막에서 지내며 일을 배우게 되었다. 술주정뱅이가 있는 지옥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카르도는 납득할 수 없었다. 분명 루벨 가의 문장이 새겨진 단추를 가져왔는데, 왜 이런 오두막에서 사냥꾼 노릇을 해야 하는지. 그래서 카르도는 그 늙은 사냥꾼에게 혹시 자신의 생부인지 물었다. 사냥꾼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16562836756048.jpg―나는 네 할애비다.

그로써 듣게 된 출생의 비밀은 참으로 진부했다. 루벨 가의 숲을 관리하는 숲지기 겸 사냥꾼에겐 딸이 있었다. 퍽 미인이어서 제법 눈에 띄는 소녀였다. 사냥꾼은 집사의 권유로 딸을 루벨 가의 하녀로 보냈고, 딸은 성에 들어간 지 1년도 되지 않아 배가 불러서 돌아왔다. 화를 내며 다그치는 사냥꾼에게 딸은 울면서 대답했다. 주인 나리의 아이라고.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마님의 보복이 두려워진 사냥꾼은 급히 사내를 골라 딸을 시집보냈다. 이미 배가 부른 탓에 변변한 남자를 구할 수는 없었고, 개중에 그나마 온순해 보이는 자에게 보내 다른 지방으로 떠나도록 했다.

16562836756048.jpg―사람이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인데, 네 어미는 꼴을 너무 잘 타고나 그 지경이 됐다. 사내들이 세 치 혀를 놀리며 따른다고 너무 과한 꿈을 꾼 게지.

사냥꾼이 피로한 얼굴로 말했다.

16562836756048.jpg―그러니 너도 허튼 생각일랑 말고 분수껏 살아라. 순리를 거스르려고 해서는 안 돼. 이리가 양을 먹지 양이 이리를 쫓는 법은 없다.

그건 딸을 덧없이 잃은 노인의 하소연이었다. 동시에 눈빛이 딸과 꼭 닮은 손자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충고였다. 그 후 카르도는 할아버지의 충고에 따르는 척 사냥을 배우는 것에 몰두했다. 그리고 사냥꾼은 손자의 재능에 감탄했다. 카르도는 사냥감의 자취를 쫓는 것도, 덫과 무기를 다루는 것도 마법처럼 해냈다. 노련한 사냥꾼인 조부마저 감탄할 정도였다. 심지어 열두 살이 되었을 땐 절대 사냥에 실패하는 일이 없어 늙은 사냥꾼을 더 놀라게 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묻자 카르도는 이렇게 대답했다. 방법은 없어요, 단지 잡겠다고 마음먹었을 뿐이에요, 라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랍지만, 카르도의 진짜 재능은 따로 있었다. 덫에 걸린 토끼를 처음 잡은 날, 카르도는 그것을 죽이고 해체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잔인함. 그것이야말로 카르도가 지닌 가장 큰, 그리고 위험한 재능이었다. 그걸 알아본 사냥꾼은 늘 염려했다. 어미를 닮은 야망과 영리한 머리, 거기에 잔인한 성정까지 겸비한 아이가 훗날 무엇이 될지 촌부는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사냥꾼이 걱정한 대로 카르도는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잠시 고향에 다녀왔다. 그러곤 숲에서 자신을 학대하던 양부를 사냥했다. 동물은 수도 없이 잡아봤지만 인간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어릴 땐 크고 무섭게만 느껴지던 남자가 비굴하게 울며 살려달라고 비는 모습에는 전율마저 일었다.

16562836756048.jpg―이리가 양을 먹지 양이 이리를 쫓는 법은 없다.

조부는 이렇게 말했다. 맞는 말이다. 다만 나는 양이 아니라 이리였다. 도망치는 쪽이 아니라 쫓고 사냥하는 것이 어울리는 인간이었다. 양부를 사냥하며 그 사실을 확인한 카르도는 신앙에 가까운 신념을 얻었다. 사냥꾼은 위대하다. 강한 것은 훌륭하다. 사냥하는 존재가 되는 것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숙원이지만, 그럴 수 있는 개체는 한정되어 있다. 양이 아니라 이리로 태어난 자, 오직 그들에게만 사냥의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먹는 이 솔직한 섭리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 때문에 카르도는 문득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루벨 자작의 성에서 고상하게 살아가는 자들, 자신의 생부와 그의 아내, 그리고 배다른 형제들. ‘저것’들은 분명 나보다 약하다. 우아하게 말하며 하인을 부릴 뿐, 그들의 사지는 갓 태어난 양처럼 연하고 부드럽다. 아마 자신의 손으로는 닭의 모가지조차 비틀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저런 것이 이리를 가두고 기르는 건 잘못된 일이다. 그건 섭리에 대한 반역이다. 아, 대체 어떻게 해야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군침이 흘렀지만 카르도는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사냥꾼답게, 은밀하게. 그리고 드디어 기회가 왔을 때, 그는 이리처럼 주저 없이 양들을 집어삼켰다. . . . 만약 전말을 아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물어볼지도 모른다. 양부도 아닌 친부를 어떻게 제 손으로 사냥하느냐고. 만약 솔직히 말해도 뒤탈이 없는 상대라면 카르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양에게서 이리가 태어나주었는데 오히려 영광으로 여겨야지, 라고. 이처럼 카르도 루벨의 삶은 사냥하거나 사냥당하거나의 연속이었다. 그 사실에 불만은 없다. 왜냐하면 사냥하는 쪽은 언제나 이리로 태어난 나였으니까.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16562836756048.jpg“찾았습니다.”

기사의 속삭임에 카르도는 눈을 떴다. 이곳은 서부 접경지의 요새. 드디어 사냥감의 꼬리를 밟았다는 소식에 카르도는 조용히 웃었다. 카르도는 공작들을 함정에 빠트렸을 때처럼, 요새의 비밀통로를 통해 은밀히 안으로 파고들었다. 과연 그곳에는 거적때기를 걸친 검은 머리 족속들이 모여 있었다.

16562836756053.jpg‘일부뿐인가?’

하지만 그 수는 카르도가 균열 근처에서 본 인원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16562836756053.jpg‘낙오자들?’

아니, 그렇게 보기엔 다들 젊고 건장하다. 노인과 아이가 사라진 걸 보면, 오히려 이들만 살아남았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16562836756053.jpg‘예상보다 적지만 그래도 충분하다.’

저들의 수는 약 50명. 모두 생포해서 제도로 돌아가면 충분한 이목을 끌 수 있다. 그리고 그 이목은 고스란히 동부공의 배반과 북부공의 무능을 비난하는 화살이 될 터. 카르도는 희열을 삼키며 그들이 한데 모인 곳을 손끝으로 그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땅에서 화염이 솟구쳐 그들을 에워쌌다.

16562836814483.jpg“으아악!”

16562836814483.jpg“꺄악!”

동부인들은 기겁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들을 향해 카르도의 기사들이 목소리를 돋워 외쳤다.

16562836756048.jpg“살고 싶다면 투항해라!”

하지만 동부인들은 알아듣지 못한 듯 불길 속에서 다급히 두리번댔다.

16562836756053.jpg“제국 말을 모르는 건가?”

이래서야 짐승을 사냥하는 것과 정말 다를 바가 없다. 카르도는 혀를 차며 불길을 더 키웠다. 이대로 저 안의 공기를 태워 질식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불길이 벽을 이루기 직전, 저 안에서 또렷한 제국어가 튀어나왔다.

16562836756048.jpg“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카르도 공!”

동부 야만인이 외친 말에 카르도를 비롯한 기사들은 깜짝 놀라 행동을 멈췄다. 그러자 동부인들은 화를 내며 몸에 걸친 거적을 불길로 집어 던졌다.

16562836756048.jpg“같은 제국의 기사를 공격하다니!”

거적이 벗겨지며 드러난 것은 동부의 제복이었다. 그리고 검은 머리카락 아래 드러난 얼굴도 명백한 제국인의 얼굴이었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카르도는 눈을 부릅떴다. 그때 카르도의 등 뒤에서 거친 신음이 울렸다.

16562836756048.jpg“크윽!”

뒤를 돌아본 카르도는 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뒤따라온 기사들이 제압당해 바닥을 기고 있었다.

16562836814509.jpg“공작들 간의 마찰은 황명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남부 기사들을 짓밟고 선 동부 기사들 사이에서, 그들의 우두머리가 말했다.

16562836814509.jpg“그런데 이런 식으로 뒤를 쳤다는 건 명백한 반역으로 봐야겠지.”

동부공, 리그난 아이테르너의 차가운 위협에 카르도는 경악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카르도가 함정에 빠진 것을 인정한 겨를도 없이, 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16562836814517.jpg“이럴까 봐 계속 경고했는데 결국 사고를 치셨군요.”

뻔뻔하게 남부 제복을 입은 여자였다. 그 여자, 레나 루벨이 어여쁘게 웃으며 속삭였다.

16562836814517.jpg“정말 유감이에요, 카르도 씨.”

1656283684306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