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유니의 이름2022.01.27.
“여자애?”
클라비스가 보고를 받다 말고 중얼댔다. 추기경이 관심을 보이자 그의 비서가 재빨리 부연했다.
“침묵 전쟁 때부터 데리고 다닌 아이라고 합니다. 레나 루벨과는 매우 각별한 관계로, 입궁하면서 하녀 신분을 위장했습니다.”
“출신은?”
“확인된 바가 없어 고아로 추측됩니다.”
“레나 루벨이 데리고 다니는 고아라…….”
클라비스는 멍하니 중얼대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동병상련인가?”
뭐, 나쁘지 않다. 약점이 있다는 뜻이니까. 클라비스는 레나를 한차례 비웃고서 보고를 계속하라는 의미로 고갯짓했다. 그때 그 고아의 이름은 굳이 묻지 않았다. 알 필요가 하등 없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 . .
“보지 마!”
클라비스는 황급히 종이를 뒤집어 내용물을 감췄다. 동생의 과민 반응에 레지나가 어이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평소엔 봐달라고 쫓아다니더니. 뭐 이상한 거 쓰냐?”
“아, 가라니까!”
레지나가 호기심에 기웃대자 클라비스는 아예 책상에 엎드려 원고를 사수했다. 레지나는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침착하게 동생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흔들었다.
“미쳤니? 어디서 소리를 질러?”
“으으윽, 아파, 누나! 잘못했어……!”
누나의 야비한 공격에 클라비스는 결국 감췄던 것을 제 손으로 바쳤다. 레지나는 그제야 클라비스의 머리채를 놓고 그가 손수 내민 것을 들여다보았다.
“시가 아니네?”
평소처럼 시를 쓰는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이번 원고지엔 줄글이 빽빽하게 차 있었다.
“소설이야?”
“응, 동화…….”
뜻밖의 대답에 레지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냐는 시선에, 클라비스는 조금 겸연쩍게 설명했다.
“그냥, 재미있는 얘기가 생각나서.”
클라비스는 레지나의 눈치를 보더니 곧 알아서 떠들었다.
“여자애가 왕국을 모험하는 얘기야. 용감한 주인공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도와주고 마지막엔 왕이 되는…….”
“왕?”
레지나가 콧방귀를 뀌자 클라비스는 슬그머니 딴청을 피웠다. 뭔가 민망한 기색이었다. 레지나는 동생이 왜 그러나 쳐다보다가 원고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동화답게 주인공이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해주고 악당들을 혼내주는, 꽤 전형적인 내용이었다. 그런데 주인공이 겪는 사건이 어째 익숙했다. 악덕 지주와 소작인들의 싸움을 중재하고, 욕심 많은 귀족들에게 민심을 전하고, 마녀라고 손가락질당하던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고……. 모두 레지나가 즉위 후에 한 일이었다. 레지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클라비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클라비스는 누나의 시선을 한사코 피했고, 그 모습에 레지나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클라비스는 누이의 업적을 동화에 담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레지나는 클라비스의 계획을 눈치채고 작게 중얼댔다.
“하긴, 전기 같은 건 잘 안 읽으니까.”
레지나의 혼잣말에 클라비스는 민망해하며 뺨을 붉혔다.
“주인공 이름은 정했어?”
“응…….”
“뭔데?”
레지나는 만약 주인공 이름이 ‘레지나’나 ‘레나’라면 절대 불허할 생각으로 물었다. 하지만 다행히 클라비스도 그 정도 극성은 아니었다.
“유니.”
“무슨 뜻이야?”
레지나는 귀여운 이름이라 생각하며 되물었고, 클라비스는 누나의 손에서 원고를 돌려받으며 대답했다.
“희망이라는 뜻이야.”
*** 클라비스는 떨리는 눈으로 제 위에 엎드린 하녀를 바라보았다.
“너, 이름이 뭐라고?”
떨어지는 불덩이에 놀랐던 아이는 눈을 깜빡이더니, 곧 정신을 차리고 바락 대들었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아이는 벌떡 일어나 클라비스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너도 빨리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클라비스는 험악한 얼굴로 그 손을 뿌리쳤다. 그러곤 오히려 아이의 팔을 잡아당기며 윽박질렀다.
“이름이 뭐냐고!”
“이익, 왜 이래요! 미쳤어요?”
아이가 벗어나려고 몸을 흔들며 소리쳤다. 하지만 클라비스는 놓아주지 않았고, 아이도 악에 받쳐 그를 걷어찰 기세로 어금니를 아득 물었다.
“유니예요!”
그때 마침 달려온 엔지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며 대답했다. 유니라는 이름에 클라비스가 눈을 부릅뜨며 엔지를 돌아보았다. 그에 엔지는 클라비스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다시 말했다.
“이 애 이름은 유니예요, 전하. 누나가, 우리 누나가 지어준 이름이래요.”
엔지의 난입과 폭로에 유니가 짜증을 내려다가 멈췄다. 눈앞의 쌀쌀맞은 남자, 클라비스 추기경이 하늘이 무너진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클라비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유니를 바라보았다. 경악과 공포가 섞인 시선이 와닿자 유니는 그를 멀뚱히 마주 보았다. 그 당찬 눈빛에 클라비스는 더 사색이 되어 중얼댔다.
“안 돼…….”
클라비스는 악몽과 마주친 사람처럼 팔과 다리로 바닥을 밀며 물러났다. 그러더니 숨을 가쁘게 쉬며 신음했다.
“아니야, 아니야…….”
클라비스는 절박하게 고개를 젓더니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쥐어뜯듯이 감쌌다.
“아, 아…… 악……!”
클라비스가 몸을 웅크리고 고통스러워하자 엔지가 다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이 채 닿기도 전에 변화가 시작됐다. 클라비스의 새하얀 머리카락 위로 검은 깃털이 자라났다. 아름다운 얼굴에도 검은 가시 깃이 비늘처럼 일어났다.
“전하……!”
엔지가 놀라서 붙잡자 클라비스가 팔을 크게 휘둘러 뿌리쳤다. 믿기지 않는 힘에 엔지의 마른 몸이 거의 날아가듯 나가떨어졌다.
“이리 와!”
클라비스의 변화에 지켜보던 루비드가 소리쳤다. 기사들이 엔지를 일으켰고 유니도 부리나케 달려와 루비드의 뒤로 숨었다. 그 사이 머리가 완전히 검게 변한 클라비스가 고개를 들었다. 더는 인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완연한 까마귀의 머리를 보고 엔지가 신음했다.
“대체 왜…….”
유니는 당신이 지은 이름인데. 당신이 남긴 이름을 우리 누나가 친구에게 준 건데. 그런데 왜 그 이름을 듣고 당신은 절망하나. 엔지가 혼란스럽게 바라보는데, 까마귀가 된 클라비스가 고개를 치켜들고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악!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에 아이들과 기사들은 질겁하며 귀를 막았다. 아아악. 아아악. 까아아악. 클라비스가 울기 시작했다. 여전히 새하얀 성의를 걸친 채, 하지만 반쯤은 피로 얼룩진 채. 마치 한을 풀 듯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을 목놓아 울었다.
―주인공 이름은 정했어?
―유니.
―무슨 뜻이야?
―희망이라는 뜻이야.
정신이 혼미해지는 가운데, 오래전 레지나와 나눈 대화가 뇌리를 스쳤다. 유니. 희망. 내가 널 보고 지은 이름. 감히 그런 이름을 지었다. 그런 이야기를 만들고 그런 시를 썼다. 그 시절의 안락함이 내 선량함인 양, 자신이 특별히 정의롭고 현명한 인간인 양 착각하며 위선을 떨었다. 절망 앞에서 가장 깊이 거꾸러진 주제에, 나락까지 내려가 시궁창 물보다 더 구역질 나게 썩어버린 주제에. 클라비스는 진심으로 증오했다. 레지나를 단두대로 내몬 간신들보다, 우매하게 선동당한 군중들보다, 어리석고 연약했던 자기 자신을 더 용서할 수 없었다. 유니의 이름으로 어느 때보다 자신을 혐오하게 된 클라비스는, 결국 복수심에 휩싸여 자신을 놓았다. 클라비스 시렌치움 그라샤는 복수를 원했다. 클라비스 시렌치움 그라샤에게. 아, 너를 죽일 수 있다면 나는 영혼도 팔 수 있어.
*** 두엄의 궁에서 시작된 까마귀 울음소리는 밖으로 점점 퍼져나갔다. 황궁을 뒤덮고, 제도의 중심지에 번지고, 끝내는 성벽 외곽까지 가닿아 처절하게 하늘을 흔들었다. 제도 곳곳에서 사람들이 까마귀로 변했다. 복수를 원하는 자는 가졌든 가지지 못했든, 빼앗았든 빼앗겼든, 배부르든 배고프든 상관없이 모두 까마귀가 되어 비명을 질렀다. 눈물과 후회가 가득한 곳에선 뼈만 남은 망자들이 몸을 일으켰다. 죄를 덮기에 급급한 장소에서는 불길이 일며 독충이 창궐했고, 이기적인 자들의 담합장 위에선 검은 비늘을 뒤집어쓴 망자들이 도사렸다. 또한 폭력이 난무한 곳에서 짐승들마저 일어나자, 제도는 비로소 끝을 맞이한 것처럼 혼란에 빠졌다.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가 겹쳐지며 통곡이 강처럼 흘렀다.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은 거리를 가득 메운 망자들을 보며 아득히 절망했다. 사는 것이 고통이라 언젠가 쉬게 될 날을 고대했건만, 이래서야 무덤에서라도 마음 편히 누울 수 있을까. 이래서야 덧없이 흐느끼며 영원히 춤출 수밖에. *** 하늘을 향해 울던 클라비스가 드디어 울음을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내린 클라비스, 그 까마귀는 날카로운 부리 끝으로 유니와 엔지, 그리고 루비드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야, 정신 차려…….”
루비드가 당혹감을 삼키며 클라비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을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먹은 건지, 클라비스가 몸을 일으키며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뗐다. 그러더니 루비드가 검을 들까 말까 갈등하는 찰나, 돌연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익, 젠장!”
루비드는 차마 참격을 날리지 못하고 맨손으로 나서 클라비스의 한쪽 어깨와 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클라비스는 루비드를 찢으려는 듯 부리를 벌리고 위협했다.
“이게 무슨 지랄이야, 야!”
루비드가 깨우려고 윽박질렀지만 소용없었다. 게다가 까마귀로 변한 클라비스의 악력은 루비드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고 거칠었다. 루비드는 클라비스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눈을 크게 떴다. 클라비스의 등 뒤, 복도 저편에서 무언가 꿈틀대며 다가오고 있었다. 망자였다.
“도망쳐!”
루비드가 버럭 소리쳤지만 등 뒤에선 아무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상황 파악을 아직 못한 탓이었다. 그래서 루비드는 신경질을 내며 기사들에게 재차 외쳤다.
“애들 데리고 가라고!”
기사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유니와 엔지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저하는요! 저하!”
엔지가 애타게 소리쳤지만 루비드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꼬맹이들이 성가셨다.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자연히 이우라가 떠올랐다. 그놈, 형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괜히 든 잡생각에 루비드는 혀를 찼다. 그러곤 악착같이 덤벼드는 클라비스를 걷어차고 검을 들었다. 이 난리가 끝나면 형 놈하고 잠깐 이야기나 해보자 싶었다. . . . 엔지는 기사의 등에 업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달리던 도중 천식기가 올라온 탓이었다.
“망자가 지천으로 깔렸군.”
유니와 엔지를 데리고 달리던 기사 하나가 창밖을 내다보며 탄식했다.
“이제 어디로 갑니까?”
“이우라 전하 곁으로 가야지.”
“하지만 두엄의 궁은 이미…….”
기사들은 희망을 잃은 눈으로 두엄의 궁 위로 뻗은 붉은 균열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 다 알 수 없지만, 기사들은 저곳의 상황을 낙관하지 않았다. 본궁이 이 지경이면 저쪽은 이미 초토화 상태일 터였다. 기사들이 어디로 가야 하나 논의할 때였다. 곁에 있던 유니가 저벅대는 소리를 듣고 복도 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하얗게 질려 기사들을 불렀다.
“아, 아저씨. 저기 좀 봐요.”
어린 하녀가 가리킨 복도 끝에 새빨간 옷을 입은 까마귀가 서 있었다. 북부의 기사인가? 까마귀의 정체를 헤아리던 기사들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저 까마귀가 입은 건 빨간 옷이 아니라 피로 물든 추기경의 성의였다. 그걸 깨달은 엔지와 기사들은 경악으로 얼어붙어 피 칠갑을 하고 나타난 클라비스를 바라보았다.
“루, 루비드 저하는…….”
엔지가 숨을 가쁘게 쉬며 루비드를 찾았다. 하지만 남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클라비스뿐만 아니라 온갖 부류의 망자들이 복도의 앞과 뒤를 막고 창문을 통해 기어들어 왔다.
“아…….”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다. 완벽한 궁지에 엔지는 절망했다. 아이들과 기사들은 그대로 얼어붙어 서서히 다가오는 망자들을 바라보았다. 망자들은 나비를 잡으려는 소년처럼 살금살금 접근하더니, 돌연 땅을 박차며 일시에 달려들었다.
“으윽……!”
엔지는 최후를 직감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레나 루벨의 목소리가 귓전에 스쳤다.
―너를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
엔지가 왈칵 눈물을 터트리는 순간 바닥에서 무언가 솟구쳐 망자의 발을 묶었다. 거짓말처럼 피어난 희고 찬란한 그것은, 백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