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니힐의 이름2022.01.31.
레나가 니힐을 보며 말했다.
“당신을 보자마자 왕이 되어달라고 해서, 그 전에 당신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아서. 그게 너무 미안하대요.”
레나의 간결한 사과에 니힐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는 자다 깬 고양이 같은 얼굴로 레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댔다.
“그게 무슨 의미지?”
니힐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이제 와서 굳이?”
“……안 통할 줄 알았어요.”
레나도 기대 안 했다는 듯 웃으며 수긍했다.
“그래도 다들 당신한테 사과하고 싶어 했어요.”
“무의미해.”
“그럼 당신에겐 뭐가 유의미하죠?”
레나는 그렇게 반문하며 두엄의 궁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붉은 균열은 불타는 탑처럼 하늘로 솟구치고, 니힐 그라샤의 가신들은 까마귀가 되어 춤을 춘다. 그 가운데 홀로 선, 참으로 무심한 얼굴의 황제.
“무의미하다면서, 아무 흥미도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100년씩이나 버티는 이유가 뭐예요? 그저 복수라고 하기엔 너무 필사적이지 않나요?”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거지?”
필사적이라는 말에 니힐의 가느다란 눈썹이 구겨졌다. 그래서 레나가 그를 달래듯 부연했다.
“그렇잖아요. 복수를 하려면 차라리 싹 쓸어버리고 끝내지, 구질구질하게 여기서 계속 왕 노릇을 하는 건…….”
레나는 말을 하려다 슬쩍 고개를 꺾었다. 니힐의 손끝에서 튕겨 나온 참격이 얼굴로 날아온 탓이었다. 날카로운 공기가 귀밑머리 몇 올을 자르고 지나갔지만, 또 니힐이 매섭게 쏘아봤지만 레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좀 이상해서요.”
니힐은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다시 참격이 날아오기 직전, 레나가 담담히 덧붙였다.
“돌아가고 싶은 거죠? 왕국이 무너지기 전, 당신이 왕이던 시절로.”
레나의 물음에 니힐의 행동이 뚝 굳었다. 그 명백한 반응에 레나는 씁쓸히 웃었다. 제국의 황제 니힐 그라샤. 이미 형장의 이슬로 저버린 왕. 그럼에도 악착같이 되돌아온 망자. 이미 부서진 심장으로 버티며, 자길 미워하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레지나의 망령.
“용서하지도 못해, 떠나지도 못해.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그렇다고 선정을 베풀 마음도 들지 않아 시간만 끌고 있지. 이게 아닌 걸 알면서.”
니힐은 자신의 전기에 ‘용서받지 못한 왕’의 이름을 빌려 말했다. 다시 돌아가 너희를 지배하겠다고. 비록 배신당했어도 여전히 갈망한 거다.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나라와 소중한 동생 곁에 머물기를.
“이걸 가련하다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레나는 혼자 중얼대더니, 니힐을 보며 자그맣게 덧붙였다.
“미련하다고 하는 편이 맞겠네요. 지금까지 당신이 해온 일을 보면.”
직후 니힐의 참격이 레나를 덮쳤다.
“레나……!”
린은 저도 모르게 소리치다가 가뿐히 뒤로 피한 레나를 보고 탄식했다. 하지만 가슴을 쓸어내릴 겨를도 없이 니힐이 재차 달려들었다. 쿠웅! 굉음과 함께 바닥이 꺼졌다. 날카로운 대리석 파편이 사정없이 튀었다. 그 조각 몇 개가 앞을 막은 레나의 팔을 사정없이 베고 지나갔다.
‘사자를 가둔 왕의 괴력.’
레나는 충격을 피하며 그 힘의 정체와 출처를 헤아렸다. 니힐이 눈을 치뜨자 레나의 발밑에서 화염이 솟구쳤다.
‘태움과 그을림의 왕의 업화.’
불길이 레나를 덮치기 직전, 레나를 둘러싼 시간이 느려졌다. 위기의 순간 레나는 의식을 확장해 불길을 피했다. 그런데 불현듯 온몸을 조이는 압박이 레나를 덮쳤다. 놀라서 고개를 드니 니힐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첫울음을 삼킨 왕의 쇠약.’
생기를 빼앗는 힘이 레나를 뒤덮었다. 다른 자들처럼 피와 살이 마르진 않았지만, 힘이 빠져서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버티던 레나의 무릎이 덜컥 꺾였다. 레나가 주저앉자 니힐이 자신의 손끝을 깨물며 다가왔다. 니힐의 하얀 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그 붉은 것을 보며 레나는 니힐의 의도를 깨닫고 중얼댔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지배…….’
니힐은 왕들의 권능을 완벽히 다루고 있었다. 그걸 몸소 깨달은 레나는 질린 기분으로 푸념했다.
‘저걸 어떻게 이겨.’
차라리 토끼더러 사자를 사냥하라고 하지. 레나가 주저앉아 탄식할 때, 린은 그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검을 쥔 채 나설지 말지 고민하다가 이내 이를 악물었다. 레나는 지지 않겠다고 했다. 린은 레나의 말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다리를 애써 붙들었다.
“내 심장도 가져갈 건가요?”
레나가 다가오는 니힐에게 물었다. 그러자 니힐이 피로 붉어진 입술로 답했다.
“나약한 패자들의 심장엔 흥미 없다.”
“야박하긴.”
레나는 옴짝달싹 못 하면서 여유를 부렸다. 니힐이 그 모습을 보고 눈썹을 찌푸리자, 레나가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날 처리한 다음엔 뭘 할 거예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황궁을 다시 세울 건가요?”
니힐은 대답하지 않았다.
“10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까마귀를 어딘가에 숨기고, 또 자기가 세상을 구한 척하려고요?”
하지만 레나는 개의치 않고 니힐을 도발했다.
“왕 놀이는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다들 싫어하는데.”
니힐이 레나의 턱을 억세게 쥐었다. 그러곤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입안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뭘 아는 양 멋대로 지껄이는 레나 루벨을 지배해버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레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니힐과 똑같이 그의 입을 손으로 덮었다. 그 순간 니힐은 비릿한 피 맛을 느꼈다. 레나의 팔에서 흐른 피가 입으로 흘러들어온 탓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니힐은 눈을 부릅떴다. 지배의 권능을 가진 자에게 혈액 교환은 상대의 심층부로 떨어진다는 의미. 니힐이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이미 두엄의 궁이 아닌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황궁에 비하면 무척 초라한, 좋게 말하면 아늑한 방이었다.
“아, 짜증나.”
옆에서 투박하고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머리를 짧게 자른 소녀가 보였다.
“레나 루벨?”
니힐은 그 소녀를 곧장 알아봤다. 지금보다 몇 살 어려 보이지만, 그는 분명 레나 루벨이었다. 살쾡이처럼 날이 선 레나 루벨은 자신을 호명한 니힐을 힐끗 쳐다보더니 혀를 차며 중얼댔다.
“너희니까 봐주는 거야.”
너희? 니힐이 그 표현에 의문을 느끼는 순간, 등 뒤에서 낯설고도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드디어 다시 만났구나.”
그 음성에 니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100년 전, 자신의 반신을 제 손으로 뜯어 버린 이후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니힐은 눈을 크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레지나가 긴 금발을 늘어트린 채, 니힐을 서글피 바라보고 있었다. . . .
‘어떻게 된 거지?’
린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상황을 살폈다. 레나와 니힐이 서로에게 피를 먹이고 쓰러졌다. 그대로 침묵이 이어지자 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까마귀들은 여전히 춤을 추고 있다. 붉은 제복을 입은 까마귀, 이우라는 근위대장이라도 된 양 검으로 바닥을 짚고 근엄하게 서서 그들을 호령했다. 저들이 여전히 까마귀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건 니힐이 살아 있다는 의미. 린은 까마귀들의 동태를 살피며 천천히 움직였다. 다행히 까마귀들은 린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로써 레나와 니힐의 곁으로 다가간 린은, 잠든 것처럼 서로에게 몸을 포갠 두 사람을 보고 잠시 갈등했다. 이대로 네 목을 치면, 모든 게 끝날까? 린은 검집에 손을 얹은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니힐이 뜯어먹은 심장을 다시 토해내게 만들면 그 사람도 돌아올지 모른다. 린은 간절히 상상하며 황제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단지 그뿐, 린은 결국 검을 들지 못했다. 니힐과 대화하겠다는 레나의 말 때문이었다. . . .
“드디어, 겨우 다시 만났구나. 내 어리석은 반쪽.”
레지나의 차분한 음성에 니힐의 눈이 커졌다. 니힐은 그를 발견하기 무섭게 달려들었다. 그러곤 주저 없이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졸랐다. 니힐의 얼굴이 지독하게 일그러졌지만, 레지나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는 그저 덤덤히 니힐을 주시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어.”
레지나가 말했다.
“단두대에 오를 때까지 내겐 잘못이 없었어. 나는 무능하지도 연약하지도 않았어.”
레지나의 자기변호에 니힐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레지나가 담담히 덧붙였다.
“그러니 더는 돌이키려 하지 마. 이미 지나간 일이야.”
니힐은 아까 레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과를 받았을 때와 똑같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의 반쪽을 바라보았다.
“그럼 누구의 책임이지?”
니힐이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무고한 자가 죽을 때 무능하지도 연약하지도 않은 왕은 대체 뭘 했지? 모든 것을 다스리는 자리에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니힐의 물음에 레지나는 고요히 탄식했다. 이게 그들이 둘로 갈라진 이유였다. 처형 당일, 레지나는 마지막까지 왕으로서 품위를 지키려고 코르셋을 조였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이 새 시대의 밑거름이 되리라 믿으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심했다. 죄 없는 자의 죽음으로 열린 시대에 과연 의미가 있는지,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세상은 왜 방관하고 침묵하는지. 책임자를 찾던 레지나는 그만 미궁에 빠졌다. 이 비극의 책임자, 그건 왕이다. 그리고 비극의 희생자 역시 왕. 그럼 이 모든 건 왕인 나의 책임인가? 그래서 그 책임이 내게 쏟아졌나? 그것이 결론인가? 날 버린 세상은, 나를 지우고 없앤 채,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갈 작정인가? 그럴 순 없지. 절대.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 내가 존재하는 한, 날 밟고 선 시대는 절대 열리지 않는다.”
니힐은 단호히 선언하며 레지나를 밀어 넘어트렸다. 그러곤 그의 어깨를 짓밟고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그게 왕인 내 책임이다.”
니힐의 의지에 바닥이 들썩였다. 레나의 아늑한 공간은 점점 일그러지더니 검붉은 무덤으로 변했다. 그리고 고요한 무덤에서 망자들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왕들의 심장과 죄악을 먹어 치운 황제는 그 안에 복속된 자들을 깨웠다. 그러곤 다시 한번 세상을 쓸어버릴 준비를 했다. 살아생전 죄와 업을 쌓아온 자들이 일그러진 형상을 드러내자, 레지나가 바닥에 누운 채 중얼댔다.
“아마 이래서겠지.”
“뭐?”
“이래서 그 애가 선택된 거야. 왕이 아니라 그들 중 하나였던, 레나가.”
레지나는 여전히 왕인, 그리고 황제인 자신의 반쪽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왕이라는 게 참 별 게 아닌데. 그걸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럼 너에게 주도권을 넘긴 채 비극을 퍼트리지도 않았을 텐데. 레지나가 혀를 차자 니힐이 그의 목을 발로 내리찍었다.
“날 부정하지 마라.”
“왕들의 시대는 끝났어.”
하지만 레지나는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고 여상히 말했다.
“군림하기 위해 아기를 버린 것도 왕, 허수아비가 되어 패악을 부린 것도 왕, 정복자로서 타인의 영역을 침범해 부순 것도 왕. 그리고 널 제물로 지목한 것도, 그로써 모든 미움의 표적이 된 것도 결국은 왕.”
레지나는 무미건조하게 왕들을 나열하더니, 이내 괴로운 듯 신음했다.
“우린 진즉에 사라져야 할 존재였어.”
“닥쳐.”
니힐이 발로 레지나를 내리찍었다. 하지만 이번엔 레지나도 당하지 않고 니힐의 발을 붙잡았다.
“너도 알잖아. 사실은 이미 전부터, 니힐이라는 이름을 지을 때부터.”
니힐의 뜻은 무가치. 무덤에서 악착같이 돌아온 황제는 스스로를 무가치라고 불렀다. 버림받고 용서받지 못한 자신이, 이미 필요도 쓸모도 사라진 왕이 참으로 무가치하다고 생각한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