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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화. 매듭 (187/208)

187화. 매듭2022.02.14.

니힐 그라샤의 비명이 순백 속에서 폭발했다. 비명, 고함, 절규. 그렇게 정의할 수 있는 소음은 한계까지 차오르더니 곧 감각을 마비시키 듯 점멸하여 종국엔 오히려 완전한 침묵을 불러왔다. 지나친 빛이 도리어 어둠이 되고 극한의 냉기는 화상을 일으키는 것처럼 니힐의 외침도 결국 고요함으로 수렴해 세상과 동떨어진 시간의 틈새로 그들을 이끌었다. 하얗게 빛바랜 황제는 마치 잠에서 깬 사람처럼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물안개가 낀 듯 사방이 희뿌옇게 흐렸다. 발치에선 여리고도 굳센 들꽃이 풀 내음을 퍼트렸다. 니힐은 자신의 발밑의 꽃을 보고 침음하며 고개를 들었다.

16562840045176.jpg“내게 뭘 바라는 거지?”

니힐이 잠긴 목소리로 곁에 선 레나에게 물었다.

16562840045176.jpg“손색없는 폭군이다. 끌어냈으면 아무 가책 없이 죽여 없애도 될 터.”

니힐은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으로, 다시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며 중얼댔다.

16562840045176.jpg“왜 굳이 이걸 돌려주려는 거냐…….”

레나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대답이 아니라 맥락을 벗어난 질문이었다.

16562840045191.jpg“아직도 나와 함께 있는 자들이 약하다고 생각해?”

니힐은 대답하지 않았다. 레나 루벨과 함께 있는 자들, 그 가련하고 비굴한 자들을 경멸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하지만 레나 루벨에게 보란 듯이 패한 이상 그들이 약하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16562840045191.jpg“그들은 강해. 무덤에서 길을 잃은 망자들과는 비교도 못할 만큼.”

니힐의 함구에 레나가 웃으며 속삭였다.

16562840045191.jpg“원망할 자격도 복수할 권리도 충분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들이야.”

16562840045176.jpg“그래서 그들은 뭘 선택했지?”

16562840045191.jpg“기도.”

레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16562840045191.jpg“잔인하고 난폭한 세상이 더 이어지지 않길 바라는 의지. 그들이 고통 속에서 선택한 건 복수가 아니라 변화였어.”

그건 그들이 잔혹한 시대에 베푼 이해, 후대를 위해 남긴 염원, 어쩌면 용서.

16562840045176.jpg“이해할 수 없어.”

16562840045191.jpg“할 수 있어. 너 역시 그들의 일부니까.”

비록 스스로 부정하고 지워버렸지만, 그의 일부는 여전히 들꽃처럼 찬란한 본질을 지키고 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한 자들 중 하나가 되었고, 지금은 흐드러지게 핀 들꽃의 모습으로 니힐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다.

16562840045191.jpg“네 말대로 손색없는 폭군이지만,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게 너무 많지만 그래도 그만 돌아왔으면 해.”

16562840045176.jpg“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16562840045191.jpg“기회를 주는 거야. 네가 벌인 일을 조금이나마 매듭지을 기회를.”

설령 용서받지 못하더라도 다시 드러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이라는 아집으로 지워진 너의 본 모습을. 레나의 단호한 대답에 니힐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가 그 답을 받아들였는지 거부했는지 알 도리는 없었다. 다만 시간이 된 듯 발치에 핀 꽃들이 만개해 그들의 세상을 덮었다. *** 린은 옅게 호흡하며 하얗게 핀 백합을 바라보았다. 두엄의 궁을 가득 채웠던 망자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린에게 적의를 드러내던 까마귀들도 그 자리에 멈춰서서 미동하지 않았다. 무너진 궁전에 선 까마귀들의 모습이 스산했지만, 찬란하게 피어난 백합 때문에 더는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고요함이 궁전을 가득 채운 어느 순간, 고아하게 서 있던 꽃들이 나풀대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린에게 안겨 있던 레나가 천천히 눈을 떴다.

1656284007352.jpg“괜찮아?”

린이 레나를 내려다보며 다급히 물었다. 막 눈을 뜬 레나는 연인을 가만히 올려다보더니 이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16562840045191.jpg“린 씨는 항상 괜찮은지를 물어보네요. 처음 만났을 때도, 가장 먼저 한 말이 그거였는데.”

레나의 태평한 목소리에 린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 사이 레나가 몸을 일으켰고, 꽃들이 더 화려하게 흩날렸다. 그리고 까마귀 깃털에 파묻혀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어두운 허물을 벗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우라를 비롯한 귀족들은 긴 악몽에서 깬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며 흩날리는 꽃보라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혼란스러운 듯 멍하니 서있다가 가득히 번지는 향기 속에서 하나둘 탄식했다. 간혹 입울을 깨물거나 멍하니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린은 저들이 왜 저러는지 모르고 지켜보다가, 제게 나풀대며 날아온 꽃잎을 무심코 손에 담았다.

16562840073532.jpg―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해.

16562840073532.jpg―그걸 아는 당신을,

16562840073532.jpg―우리는 좋아해.

그때 귓전에서 울린 속삭임에 린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목소리를 낼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레나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16562840045191.jpg“놀라지 말아요, 날 지켜준 사람들이에요.”

레나는 담담히 말하며 눈처럼 내리는 꽃잎을 바라보았다. 레나의 설명과 함께 린에겐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62840073532.jpg―기다리고 있었어.

16562840073532.jpg―우리 목소리가 닿을 때를.

16562840073532.jpg―당신에게도 알려줄게. 우리가 누구인지.

꿈결 같은 음성을 따라 머릿속에 잔상이 스쳤다. 그것은 최후였다. 멸망을 앞두고 하늘을 바라보던 자들의 모습과 그들의 이야기였다. 수많은 시절, 수많은 사람이 겪은 고통과 그 안에서 피어난 간절한 바람. 부디 이 같은 비극이 다시 없기를, 그들은 막연한 죽음 앞에서 그저 바라고 있었다.

16562840045191.jpg“나와 함께 있던 용서받지 못한 자들이에요. 드디어 기회를 얻어서 모두에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자신이 누구인지.”

레나는 그들에게 약속했다. 당신들의 지워진 이름을 세상이 알게 하겠다고. 그것은 덧없이 져버린 당신들을 위한 애도, 위로, 그리고 헌화였다. 레나의 설명에 린은 멍하니 끄덕였다. 그러곤 그들이 겪은 무수안 아픔을 느끼며 탄식했다. 한편 같은 것을 보고 있을 귀족들은 린과 달리 두려워했다. 자신들이 누리던 향락 이면에 무엇이 묻혀있는지 비로소 깨달은 얼굴이었다. 레나의 말마따나 이곳에 가득한 케이크는 그들이 이제껏 외면한 누군가의 비명과 울음으로 성립한 것이었다. 침략을 받은 민족들, 기회를 빼앗긴 아이들, 노예로 사로잡힌 남자들, 마녀가 된 여자들, 희생양이 된 여왕. 그들의 가득한 시름 위엔 언제나 고상하게 케이크를 즐기는 자들이 있었다. 그것을 알게된, 혹은 들켜버린 귀족들은 괴로워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감내하고 있었다.

16562840045191.jpg“같은 이야기지만 사람들은 다 다르게 느낄 거예요. 공감하는 사람도 있고, 연민하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디선가는 분노하거나 용기를 내는 사람도 있겠죠.”

꽃잎은 이 궁전만이 아니라 제도 곳곳에서 내리고 있다. 광장에도, 성벽에도, 그리고 언제나 숨을 죽이고 살아가는 자들의 빈 그릇 위에도. 신분도 가진 것도 다른 이들은 각자 다른 것을 느낄 것이다. 이후 무엇을 결심하든, 그건 그들의 몫이다. 잠시 후, 빛으로 짜인 꽃잎이 거의 다 흩어졌을 때 그 가운데서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황제, 니힐 그라샤였다.

16562840103094.jpg“폐, 폐하!”

멍하니 멈춰 있던 귀족들이 황제를 보고 습관처럼 물러났다.

1656284007352.jpg‘살아 있어?’

린도 마찬가지였다. 린은 저도 모르게 레나의 어깨를 안고 도망칠 곳을 찾았다.

16562840045191.jpg“괜찮아.”

그러자 레나가 린의 손등을 감싸며 미소 지었다. 그래서 린은 조금 얼떨떨한 눈으로 저편의 니힐을 바라보았다. 다시 보니 니힐의 모습이 아까와 달랐다. 늘 짧은 길이를 유지하던 백발이 등줄기까지 늘어졌고, 몸에는 피에 젖은 코르셋 대신 하얗고 우아한 백색 원피스를 두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몸은 석상처럼 금이 간 채 천천히 부서지고 있었다. 이변을 깨달은 린과 귀족들은 아연한 눈으로 니힐을 바라보았다. 그에 니힐, 아니. 레지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16562840045176.jpg“그간 미안했습니다.”

황제의 사과에 이우라를 비롯한 귀족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떨어지는 시선 속에서 레지나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16562840045176.jpg“많이 늦었지만 당신들에게 빼앗은 시대를 돌려드리겠습니다. 내가 저지른 잘못을 부디…….”

레지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는 지난 100년간 제국을 지배한 니힐이자 무덤에서 레나를 돌본 레지나였다. 모함을 당해 처형된 왕이였고 용서받지 못한 이들 중 하나인 들꽃이었다. 조각난 마음이 다시 합쳐져 회한이 흘러넘쳤지만, 레지나는 그 모든 것을 견디며 해야 할 말을 했다.

16562840045176.jpg“……부디 용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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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지나의 정중한 사과에 귀족들은 말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그들이 퍼뜩 정신을 차린 건 레지나의 하얀 몸이 석상처럼 무너지기 시작할 때였다. 귀족들은 부서지는 황제를 받기 위해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하지만 정작 그를 받친 것은 귀족들이 아니라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간 레나 루벨이었다. 레나는 흩어지는 레지나를 품으로 받았다. 친구를 만난 레지나가 레나를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종말에 다다른 그의 미소는 잔금으로 가득했다. 그의 서글픈 듯 홀가분한 눈빛에 레나도 애써 마주 웃었다.

16562840045176.jpg“레나.”

이미 부스러지기 시작한 레지나가 마지막 힘을 짜내 속삭였다.

16562840045176.jpg“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어.”

레나는 조용히 끄덕였다. 실은 레지나가 무슨 말을 할 지 이미 알고 있었다.

16562840045176.jpg“고마워.”

레지나는 자신이 이끌었던, 그리고 이젠 자신을 이끌어주는 친구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비로소 한 줌도 남지 않고 완전히 부서졌다. ***

1656284013078.jpg“전하, 정신이 드세요?”

소년의 간곡한 목소리에 클라비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막 깨어난 클라비스는 멍한 눈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엔지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옮겨, 그 뒤에 선 유니를 바라보았다. 유니의 또렷한 눈동자를 마주한 그는 서둘러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러곤 아무 일 없는 척 말했다.

16562840130785.jpg“……루비드 군에게 가봐. 아직 죽지는 않았을 거야.”

루비드의 이름이 나오자 엔지를 비롯한 기사들은 바로 반응했다. 기사들은 두말하지 않고 곧장 달려나갔고, 유니도 엔지를 잠시 쳐다보다가 기사들을 따라 루비드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엔지는 초조해하면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16562840130785.jpg“엔지 군은 안 가봐도 돼?”

엔지가 남아 있자 클라비스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1656284013078.jpg“저는 여기 있을게요.”

16562840130785.jpg“됐어, 가 봐.”

1656284013078.jpg“하지만…….”

16562840130785.jpg“혼자 있고 싶어.”

클라비스의 말에 엔지는 갈등했다. 소년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살펴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뗐다.

1656284013078.jpg“이게 마지막이에요?”

16562840130785.jpg“아마도.”

1656284013078.jpg“그럼 옆에 있을래요.”

엔지의 상냥함에 클라비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뿐, 그는 소년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16562840130785.jpg“혼자 있게 해줘.”

클라비스의 야속한 거절에 엔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소년은 울 것 같은 눈으로 클라비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클라비스는 여상한 미소로 그를 마주했고, 그걸 당해낼 수 없던 엔지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1656284013078.jpg“……다시 올게요.”

엔지는 그 말을 남기고 기사들이 달려간 방향으로 돌아섰다. 이윽고 혼자가 된 클라비스는 이미 감각이 사라진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오래된 석상처럼 손끝이 툭툭 부서지고 있었다. 드디어 끝이 온 모양이다. 두엄의 궁 쪽에서 비치는 균열의 빛은 왜인지 찬란한 백색이었다. 영문을 알 수는 없지만, 붉은색보다 더 죽음에 가까운 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빛을 바라보던 추기경은 정작 자신의 옷이 붉게 물든 것을 보고 나직이 탄식했다. 유니라는 아이 때문에 마지막 순간 이성을 놓쳐버렸다. 다시 제정신을 찾고 나서 밀려온 건 지독한 허무였다. 차라리 끝까지 미친 척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 이름이 너무 많은 걸 생각나게 해버렸다. 물론 이제 와선 너무 늦었다. 어차피 남은 건 종말. 클라비스는 몸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지옥 같은 생이 끝났다. 죽고 나면 나도 망자가 될까? 만약 그래야 한다면 자아가 없는 채로 헤매고 싶다. 이 기나긴 권태를 다시 느끼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렇게 끝을 기다리던 클라비스의 귓가에 자박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클라비스는 마지막 힘을 짜내 미소 지었다.

16562840130785.jpg“구경하러 온 거야?”

클라비스는 금이 간 얼굴로 발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지금 가장 마주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레나 루벨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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