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새로운 왕2022.02.17.
클라비스는 레나를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의외네요. 더 기뻐할 줄 알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레나가 자그맣게 중얼댔다.
“니힐이 죽었어요. 마지막 순간 레지나로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부서졌어요. 지금 당신처럼.”
레나가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라비스는 그 이야기에 놀라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아픈 일을 당한 사람처럼 시선을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이 원하던 대로 됐는데 왜 그런 표정이죠?”
레나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래서 클라비스는 레나가 원하는 대로 웃어보려고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니, 끌어올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웃는 척조차 할 수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은 가벼운 미소도, 부드러운 화법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 클라비스가 할 수 있는 것은 레나의 눈을 피한 채 침묵하는 것뿐이었다. 마음이 너덜너덜 찢긴 기분이었다. 이제껏 걸레짝처럼 어딘가에 처박아둔 마음을 뒤늦게 발견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분이었다. 클라비스는 엔지와 유니를 통해 자신이 시인이었던 날을 떠올리고 말았다. 까맣게 잊고 있던 한때가 그를 늪 같은 자기혐오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까마귀가 되어 복수심에 자신을 맡겼고, 다시 돌아와서는 자신의 가장 두려운 죄악과 마주하게 되었다. 클라비스는 도망치고 싶은 심정을 잠자코 삼켰다. 그러자 레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레지나가 전해달래요. 그간 미안했다고.”
“……그게 다야?”
“네.”
“그 한마디를 전해주러 온 거야?”
나 따위한테. 클라비스는 이 뒷말을 애써 참았다. 하지만 레나는 그의 심정을 이미 눈치챈 듯, 그를 힐끗 쳐다보며 대답했다.
“레지나는 내 친구니까요.”
레지나와 친구라는 말에 클라비스의 눈이 커졌다. 상상도 못 했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무덤에서 레지나를 만났어요. 아주 예전에. 일부러 말 안 했어요. 아무래도 당신이 기다리던 소식 같아서.”
클라비스는 말문이 막힌 채 레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수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아픈 생각은, 레나가 자신이 누군지 이미 알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혹시 레지나에게 듣지는 않았을까? 아닐까, 모르려나, 하긴, 안다면 그 애한테 그런 이름을 주지도 않았겠지……. 클라비스는 불편한 마음으로 다시 시선을 피했다. 레나를 바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이 나락으로 밀어 넣은 아이가 자신의 시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워 이대로 부서지고 싶었다. 그래서 클라비스는 레나가 그만 떠나주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자신을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아이이니 곧 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발소리 대신 레나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당신, 시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죠?”
무심한 물음에 클라비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클라비스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레나를 바라보았다. 레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은근한 경멸을 품은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차가운 시선에 클라비스의 두 눈이 잘게 떨렸다. 마치 벌을 받는 아이처럼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레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마주보더니, 이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좋아해요.”
그 말이 클라비스의 가슴을 깊이 후벼팠다.
“힘들 때, 그리고 혼자일 때 시를 읽었어요. 그 문장에 위로받았고, 시를 외우면서 마음을 다잡았어요.”
클라비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느껴졌다. 사실을 알아챈 레나 루벨의 분노가 피부에 닿을 것처럼 여실히 느껴졌다. 클라비스는 이제 그가 쏟아낼 원망과 후회, 그리고 실망이 죽음보다 더 두려웠다. 동시에 모두 자신이 감내해야 함을 인정했다. 그래서 더 겁이 났다. 클라비스는 선고를 앞둔 마음으로 기다렸고, 이윽고 레나 루벨이 말했다.
“그러니까 시는 계속 좋아할 거예요.”
“어……?”
“그 시를 쓴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그 시를 읽으며 느낀 감정은 내 거니까.”
레나는 마치 선언하듯 말했고, 예상과 전혀 다른 말에 클라비스는 멍하니 할 말을 잃었다. 클라비스는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레나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를 마주하는 레나의 눈빛은 화내는 것도 같고 연민하는 것도 같고, 애증으로 가득한 것도 같았다. 두 사람이 시선을 나누는 사이 툭 하고 클라비스의 몸에 금이 갔다. 붕괴가 가속하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기다려오던 죽음이 목전까지 다가왔다. 순간 클라비스는 조급해졌다. 이대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갈등하던 클라비스는, 이내 이를 악문 채 신음했다.
“미안해.”
입 밖으로 떨어진 어절을 따라 그의 건조한 눈가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미안…….”
그는 결국 범람해버린 눈물을 감출 생각도 못 하고, 미어지다 못해 짓이기듯 아픈 가슴을 움켜쥐고 말했다.
“정말 미안해…….”
클라비스는 사과했다. 너무 오래 견딘 몸이 무너져 먼지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었다. 레나는 그 소리가 멎을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그가 흔적 없이 사라질 때까지, 사랑하는 시인의 후회와 사과를 잠자코 받아주었다. *** 아이들을 보내고 혼자 남았던 루비드 플레누스는 황궁의 복도에서 발견됐다.
“방으로 옮겨! 나는 의사를 찾아오겠다!”
“기다려요! 의사가 오면 늦어요, 지혈부터 해야 해요!”
유니와 기사들이 루비드의 부상을 살피며 다급히 외쳤다.
“저하!”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엔지도 피투성이가 된 루비드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그나마 멀쩡한 방으로 루비드를 급히 옮겼다. 그러곤 피를 씻기고 상처를 싸맸다. 엔지는 기사들의 응급처치를 지켜보다가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괘, 괜찮으신 거예요?”
“의사가 필요합니다.”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인지, 기사들이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급해진 엔지가 루비드의 파리한 얼굴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저하, 저하! 제 목소리 들리세요?”
엔지의 애타는 음성에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던 루비드가 얼굴을 크게 지푸렸다. 그는 힘겹게 눈을 뜨며 엔지를 쳐다보더니, 곧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댔다.
“머리 울리니까 조용히 좀 해…….”
그 한결같은 성질머리에 아이들과 기사들은 오히려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는 가서 약을 찾아올게요. 저하, 제가 올 때까지 깨어 있으셔야 해요?”
“알겠으니까 빨리 가…….”
엔지는 오만상을 쓰는 루비드를 바라보다 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곤 약을 찾으러 가는 길에 클라비스가 있던 복도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곳에 클라비스는 없었다. 대신 익숙하고도 낯선 사람이 바닥에 흩어진 클라비스의 성의 옆에 서 있었다. 레나 루벨이었다. 레나와 마주친 엔지는 저도 모르게 덜컥 굳어버렸다. 레나도 갑자기 나타난 엔지 때문에 놀란 기색이었다. 드디어 누나를 만났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인지, 엔지는 기다려온 시간이 무색하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엔지가 가만히 선 채 머뭇대기만 하자, 레나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사람 보러 온 거야?”
이 사람.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떨어진 성의를 가리켰다. 엔지는 그게 클라비스의 옷인 것을 깨닫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떠났어.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그렇게 말하는 레나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마치 어제 만난 누나 같기도 하고, 어쩌면 완벽한 타인 같기도 했다. 그 목소리에 엔지는 다시금 상처받았다. 마치 혼자만 그리워한 것 같아서 서운했다. 그렇게 엔지가 다가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고 머뭇대는 사이, 레나가 몸을 돌렸다. 엔지는 놀라서 레나를 쳐다보더니, 이대로 훌쩍 떠나려는 뒷모습에 결국 빽 소리쳤다.
“누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지만, 엔지는 일단 레나를 힘껏 불렀다. 이대로 또 엇갈리는 건 싫었다.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모르는 척 돌아서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엔지의 외침에 레나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이윽고 엔지를 돌아본 레나는, 마른침을 삼키는 동생에게 웃으며 말했다.
“금방 올게. 이따 보자.”
언제든 다시 보는 게 당연하다는 듯 참 태연한 목소리였다. *** 레나가 엔지와의 만남을 미룬 채 급히 돌아선 것은 두엄의 궁의 상황 떄문이었다. 그곳은 균열이 아직 크게 벌어진 채였다. 게다가 제국의 중추인 귀족들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눈앞에서 황제 니힐이 부서지는 걸 본 귀족들은 북부공에게 대책을 요구하고 있었다.
“우리가 본 게 뭔지 설명해주십시오, 황제 폐하도 망자였던 겁니까?”
“폐하의 빈자리는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클라비스 추기경은 지금 어디에……!”
“아까 우리가 본 게 외부로도 알려졌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만약 밖으로도 이야기가 퍼졌으면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아니, 다들 정신 차리세요! 저 틈부터 닫아야 할 거 아니에요!”
용서받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들 제 몫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에 너무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귀족들이 애타는 얼굴로 채근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이우라가 돌연 검집으로 대리석 바닥을 내리찍었다.
“다들 정숙하시오.”
대리석 깨지는 소리와 함께 울린 이우라의 경고에 웅성대던 귀족들의 목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곧 레나 루벨 경이 돌아와 상황을 정리할 테니 기다리시오.”
이우라의 제안에 귀족들의 표정이 한층 묘해졌다. 서로 눈치를 보는 귀족들 속에서, 한 숙녀가 목소리를 냈다.
“레나 경도 망자의 왕인가요?”
레나의 정체를 묻는 말에 한발 뒤에서 지켜보던 린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분위기가 위태로웠다. 흐름이 어느 쪽으로 번질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 심정을 비웃듯, 숙녀가 침묵하는 이우라에게 다시금 물었다.
“그렇다면 그분이 새로운 황제가 되는 건가요?”
상상도 못 한 질문에 린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새로운 황제라니. 저들은 어떻게든 제국의 명맥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린이 귀족들의 여상한 발상에 경악할 때였다. 돌연 등 뒤에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놀라서 돌아보니 새벽빛으로 물들었던 무덤의 균열이 본래의 색을 되찾고 있었다. 무덤이 다시 불길한 색으로 돌아가자 따지던 귀족들이 다시 웅성대며 두려워했다. 그리고 린은 일말의 기대를 품고 무덤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죽고 무덤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럼 황제가 빼앗은 심장의 주인들도 다시 저곳에서 소생했을까? 나자 아이테르너와 다시 만날 수 있는 걸까? 그런데 그때, 모든 싸움이 끝났다는 믿음을 깨고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무너지고 폭발하는 소리, 망자들이 무섭게 충돌하는 소리가 균열 저편에서 마치 파도 소리처럼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린이 불안한 마음으로 균열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거대한 무언가가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그 검고 거대한 것은 순식간에 균열을 통과해 두엄의 궁을 내리찍었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 도망쳤다. 자욱한 먼지가 일어나 그것의 거대한 몸체를 덮었다. 이윽고 먼지구름이 흩어지며 모습을 드러낸 건 피막 날개를 가진 거대한 용이었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망자…….’
나자의 망자였다. 린은 이게 왜 부상을 입고 추락했나 살펴보다가 흠칫 놀랐다. 용의 어깨에 한 사람이 몸을 기댄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자였다. 린은 부상을 입은 나자의 등장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놀라서 바라만 보는 린을 뒤로한 채 이우라가 달려와 나자를 일으켰다. 이우라의 부축을 받으며 나자가 빠르게 물었다.
“레나 루벨은?”
“잠시 본궁으로 갔습니다. 곧 돌아올 겁니다.”
“전투를 준비해라. 망자들이 몰려오고 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이우라가 균열 쪽을 돌아보았다. 나자의 말마따나 균열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무덤은 이곳과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왕들의 심장이 모두 무덤으로 돌아간 지금, 저쪽은 이쪽보다 훨씬 빠르게 역사를 쌓고 있었다. 나자가 부활하기 무섭게 만신창이가 되어 이곳에 떨어진 게 그 증거였다.
“누구의 망자입니까?”
이우라의 물음에 나자가 흘러내린 피를 손등으로 훔치며 으르렁댔다.
“레나 루벨의 부친.”
나자의 분노 섞인 음성에 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걸 까맣게 모르는 나자는, 차마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에 쐐기를 박았다.
“그자가 새로운 왕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