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아버지는 딸을 용서했다.2022.02.21.
나자가 전한 흉보에 이우라가 경악하며 되물었다.
“카르도 루벨이 말입니까?”
“모른다. 놈의 진짜 이름은 그게 아니다.”
나자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며 균열 너머를 쏘아보았다. 그러곤 한걸음 떨어져 있는 린도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돋워 말했다.
“첫울음을 삼킨 자들의 왕이 됐다. 그리고 왕의 성격이 바뀌면서 망자들의 성향도 변했다.”
“그럼 첼레스테 대신…….”
린은 중얼대며 혼란을 애써 삼켰다. 그러곤 어떻게든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왕의 교체는 이해할 수 있다. 나자가 칼리고의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망자들의 왕위는 더 적합한 존재에게 저절로 계승된다. 그리고 카르도 루벨은, 아니. 카르도 루벨이라 불린 그 남자는 망자의 왕이 되기에 손색없는 작자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하필 첫울음을 삼킨 왕이라는 건…….
‘자식을 버려서.’
첼레스테처럼 자신을 위해 자식을 버린 사람이어서. 딸의 울음을 먹어치운 작자여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오싹한 기운이 목덜미를 덮쳤다. 같은 일을 저질렀지만 첼레스테는 자신의 만행을 후회했다. 하지만 카르도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발악했던 그자가 망자의 왕이 되었고, 그를 따라 망자들의 성향이 변했다면? 콰과광! 그때 다시금 섬광이 번쩍이며 천둥소리가 울렸다. 균열 저편에서 들려온 소리에 귀족들은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렀다. 겁먹은 귀족들을 뒤로하고 이우라가 재차 물었다.
“카르도 루벨과 싸우는 소리입니까?”
“그놈만이 아니다. 광신도와 사자 왕도 가세했다.”
“히엠스 그라샤와 프리무스 말입니까?”
“그래.”
나자가 으르렁대는 소리에 이우라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니힐이 사라지고 심장도 완전해진 이상 그들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게다가 새로 등극한 왕이 먼저 나서주니 히엠스 그라샤와 프리무스는 이 기회를 잡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결국 세 야심가가 힘을 모아 밖에 나오기로 결심했고, 나자는 혼자 그들을 막다가 열세를 견디지 못해 튕겨 나온 거였다.
“곧 놈들이 들이닥친다.”
나자의 경고와 함께 굉음이 터져 나왔다. 굳어 있던 귀족들은 허겁지겁 두엄의 궁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재판을 주재하던 북부의 기사들만 남아 이우라의 곁에 섰다.
“권능을 쓸 수 있나?”
나자의 물음에 이우라는 검을 쥐었다. 그는 검을 뽑지 않고 무언가 헤아리더니, 이내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요, 더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니힐이 떠나며 그가 나누어준 권능도 원래 주인들에게 돌아갔다. 때문에 북부공도 이제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이우라의 고백에 북부 기사들이 이를 사리무는데, 저편에 있던 동부공이 돌연 소리쳤다.
“싸울 생각하지 말고 균열을 닫아!”
동부공의 외침에 기사들이 퍼뜩 놀란 사이, 린은 꽃으로 장식된 화병을 뒤집어 쏟고 두엄의 궁 중앙에 놓인 실내 분수로 달려갔다. 그러곤 물을 떠서 균열이 일어난 곳 밑바닥에다 퍼부었다. 눈부신 균열 때문에 다들 잊었지만, 그 아래엔 아직 카르도 루벨의 몸이 있었다. 의도를 알아챈 이우라가 기사들을 보내 린을 돕게 했다. 린과 기사들이 제단을 씻기 위해 물을 퍼 날랐다. 하지만 넓게 번진 핏자국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고, 그사이에도 균열에서 울리는 굉음은 점점 가까워졌다. 그 촉박한 순간 나자를 태우고 온 망자가 돌연 몸을 일으켰다. 그것은 궁전을 무섭게 가로지르더니, 발톱으로 바닥에 고랑을 만들고 꼬리를 휘둘러 분수대를 부숴버렸다. 분수에서 쏟아진 물이 그대로 제단을 덮쳤다. 카르도의 몸이 밀리며 그의 핏자국도 씻겨 내렸다. 그러자 제단 위로 가지를 뻗었던 균열이 그 위세를 잃고 차츰 접히기 시작했다.
“닫힌다…….”
한 기사가 점점 작아지는 균열을 보고 중얼댔다. 다른 기사들도 숨을 죽인 채 허공의 상처가 아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비 맞은 불처럼 빠르게 작아졌고, 이내 완전히 닫히며 정적을 불러왔다.
“다, 닫혔다! 닫혔습니다!”
가까이서 살펴보던 기사가 균열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소리쳤다. 기사들은 상황이 종료된 줄 알고 기뻐했다. 그러나 린은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레나와 나자가 여기 있는 한 균열은 다시 열린다.’
망자의 왕이 지상에 있는 한 통로는 완전히 닫히지 않으니까.
‘그럼 균열이 새로 열리는 곳은 어디지?’
균열이 있던 이곳인가? 아니면 또 다른 곳? 만약 열린다면 시기는? 린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 급한 불을 끄느라 다른 곳으로 불씨를 날려버린 건지도 몰랐다. 린이 초조해하자, 그 표정을 읽은 나자가 이우라에게 말했다.
“균열이 곧 다시 열린다. 그 전에 레나 루벨을 찾아와라.”
이우라가 그 말을 듣고 움직이려 할 때였다.
“균열이다!”
밖에서 귀족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궁 밖으로 달려갔다. 문을 박차고 나오자 악몽처럼 붉은 균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위치가 좀 이상했다.
‘멀어.’
호수의 궁 쪽인가? 아니면 아예 황궁 밖?
“황궁 밖, 광장 근처다.”
뒤따라온 이우라가 거리를 가늠하며 말했다. 때문에 린은 더더욱 미궁에 빠졌다.
‘광장 근처라니, 거기에 뭐가 있기에…….’
“린!”
그때 마침 반가운 목소리가 린을 불렀다. 돌아보니 말에서 뛰어내린 레나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린이 반길 새도 없이 레나는 다급히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왕들이 부활했어. 밖으로 나오려고 해서 통로를 닫았더니 저쪽에 새로 생겼어.”
린이 전한 소식에 레나의 얼굴이 굳었다. 예상은 했다. 니힐이 쓰러지면, 그래서 그가 강탈한 심장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면 왕들이 부활할 거라고. 하지만 이렇게 일말의 틈도 없이 다시 침략해올 줄은 몰랐다. 레나가 이 과격한 결단의 주모자를 궁금해하는데, 때마침 린이 덧붙였다.
“그리고 카르도 루벨이 망자의 왕이 됐어. 첼레스테 대신.”
상상도 못 한 소식에 레나의 눈이 커졌다. 레나는 놀라서 숨까지 멈춘 채 균열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홀로 깨달았다. 균열이 일어난 저곳은, 루벨 가의 저택이 있는 곳이었다. 레나가 아득한 기분으로 서 있는데, 돌연 등 뒤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놀라서 돌아보니 거대한 용이 두엄의 궁 입구를 부수며 나오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용 위에서 나자가 소리쳤다.
“첫울음을 삼킨 왕이 밖으로 나왔다!”
놀랍지도 않은 소식이었다. 마침 균열이 루벨 가의 저택에 생겼으니, 당연히 그 저택의 주인이 제일 먼저 나왔겠지. 나자가 레나와 린, 그리고 이우라에게 고갯짓했다. 용에 올라타라는 뜻이었다. 세 사람은 두말않고 나자의 제안에 따랐고, 이윽고 용은 붉게 물든 하늘로 비상했다.
. . . 광장은 고요했다. 붉은 균열만 이글댈 뿐 망자들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이미 망자들에게 시달린 사람들은 도망칠 생각도 못 하고 지하실이나 다락에 숨어 있었다. 그 사이 레나를 태운 용은 균열이 피어난 곳을 맴돌았다. 레나의 짐작대로 새로 열린 균열은 루벨 가의 저택 위로 뻗어 있었다.
“망자들이다.”
이우라가 루벨 가의 정원을 내려다보며 중얼댔다. 말마따나 그곳엔 첫울음을 삼킨 자들이 어슬렁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저택의 사용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미동도 않고 널브러져 있었다. 공중에서 선회하던 용은 저택 정원으로 활강했다. 이윽고 거대한 용이 아름드리나무를 부러트리며 착지했지만 그들에게 덤벼드는 망자는 없었다. 다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양, 가만히 서서 무언가 기다릴 뿐이었다. 그들의 변한 습성에 레나가 나직이 중얼댔다.
“소리에 반응하지 않는군요.”
“새로운 왕 때문이겠지.”
그 역시 자식의 울음에 귀를 막은 자니까.
“그럼 저들은 뭐에 반응하죠?”
“굶주림. 일정 시간이 지나면 맹목적으로 사냥한다.”
나자의 대답에 레나는 착잡한 기분으로 끄덕였다. 이미 정원 곳곳에 도망치다 실패한 하인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망자들은 사냥감 옆에서 묵묵히 배부름을 만끽할 뿐이었다. 레나가 참 아버지답다고 생각할 때였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현관이 열리며 한 노인이 나타났다. 그 익숙한 인물을 보고 레나는 짧게 탄식했다.
“집사.”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노인, 루벨 가의 집사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레나를 맞이했다. 그는 이 난리통에도 여전히 카르도의 집사 역할을 수행했고, 그 여상한 태도에 레나는 잠자코 걸음을 옮겼다. 린과 이우라, 그리고 나자도 그 뒤를 따랐지만 그들의 동행이 허락된 건 로비까지만이었다.
“다른 분들은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집사의 안내에 린이 반박하려 하자, 레나가 그의 어깨를 짚으며 만류했다.
“다녀올게요.”
“하지만…….”
“괜찮아요.”
린은 레나가 걱정스러웠지만 더 나서지 않았다. 레나도 카르도와 단둘이 만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린이 마지못해 수긍하자 레나는 돌아서며 나자에게 속삭였다.
“린 씨를 지켜주세요.”
그 말을 남기고 레나는 집사를 따라 저택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한시도 잊어본 적 없는 복도가 펼쳐졌다. 아버지의 서재로 향하는 길이었다. 레나는 묘한 기분으로 걷다가 문득 앞서가는 집사를 향해 말했다.
“이 지경인데도 여전히 아버지 곁에 있네.”
“……도망치기엔 너무 늦었으니까요.”
집사가 농담인 척 침울하게 말했다. 그러고 몇 걸음 뗄 동안 침묵하더니, 이내 어렵사리 입을 뗐다.
“아가씨, 저는…….”
“사과하지 마.”
하지만 레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단호히 끊었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핑계 댈 생각이면 끝까지 사과하지 마.”
레나의 온화한 음성에, 하지만 차가운 질책에 집사는 그만 고개를 떨어트렸다. 다시 침묵이 내렸고, 복도 속으로 파고들수록 레나의 기시감은 짙어졌다. 아버지의 서재로 향하는 이 길에서 그날 밤을 떠올리는 건 그야말로 불가항력이었다. 그 때문인지, 드디어 문 앞에 선 레나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아버지, 부르셨어요?”
그러자 잠시 침묵 후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오거라.”
먼저 장난을 친 건 레나지만, 레나는 카르도가 태연히 장단을 맞추는 게 꽤 황당했다. 그래서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이윽고 드러난 서재도 레나의 기억 속에서 파낸 것처럼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앉은 아버지의 품위와 자태도, 그날과 끔찍하리만치 똑같았다. 레나는 카르도의 서재를 둘러보다 옛날 클라비스가 앉았던 자리가 비어 있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일부러 보란 듯이 걸어가 그 자리에 앉았다.
“망자의 왕이 되셨다고 들었어요.”
그러곤 가벼운 가십에 대해 논하듯, 카르도의 새로운 신분을 거론했다.
“그럼 그냥 무덤에 계시지, 왜 굳이 또 나타나셨어요.”
“내가 너에게 항상 하고 싶었던 말이란다.”
카르도는 그렇게 대답하며 빙긋 웃었고, 잠시 눈을 깜빡이던 레나도 결국 헛웃음을 터트렸다. 레나가 웃자 카르도가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람이 간절하면 기회가 오더구나. 아마 너도 그랬겠지.”
“같은 취급은 사양할게요.”
“내가 죽을 때 어떤 기분이었느냐?”
뜻밖의 물음에 레나가 고개를 기울이자 카르도가 말을 이었다.
“너는 결국 내게서 모든 걸 빼앗았다. 내 지위와 입지, 체면, 그리고 목숨까지도.”
카르도는 태연한 목소리로 레나를 원망하더니, 이내 자비롭게 덧붙였다.
“하지만 널 용서하마. 이제라도 내 딸로 돌아온다면.”
예상도 못 한 말에 레나는 멍하니 깜빡이다가, 진심으로 놀랍다는 듯 대답했다.
“……재미있는 말이네요. 역시 아버지는 자신의 책임에는 완전히 자유로우시군요.”
“인간에겐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루고 싶은 게 있는 법이다.”
“인간이라면 절대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어요.”
“그걸 누가 정할 수 있겠느냐?”
“다 같이 정해야죠. 아버지처럼 자멸하지 않으려면.”
레나의 대답에 카르도는 그저 웃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평행선이었다. 어쩌다 부녀로 태어나, 아주 가까이서 달리는. 카르도는 실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많이 지쳤겠지. 아무리 큰 능력이 있다 한들 너는 아직 살아 있는 인간이니까.”
“그래서 바로 몰려나왔군요. 이쪽에서 숨 돌릴 틈도 없이.”
“기회가 있으면 잡아야지.”
카르도의 당당한 비열함에 레나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사실 아버지가 죽을 때 좀 허무했어요. 고작 이런 결말을 기다렸나 싶었거든요.”
레나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아버지를 향해 표정을 밝게 바꿨다.
“그런데 이렇게 돌아와 주셔서 차라리 기뻐요. 안타까워할 여지가 하나도 없어서, 이제 살아 있는 사람도 아니니 무슨 짓을 해도 괜찮겠지 싶어서요.”
“나도 참 가당치 않은 딸을 키웠군.”
“별말씀을요, 아버지가 언제 저를 키우셨다고.”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무척 잘 배운 티가 나는, 교양이 가득한 숙녀의 미소에 그의 아버지도 흐뭇하게 마주 웃었다. 서로를 한 번씩 죽인 부녀의 마지막 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