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1년 후2022.03.03.
잠시 휴식시간이 생긴 이우라는 며칠 전 일을 잠시 떠올렸다.
. . .
“같이 가자.”
동부공의 속삭임에 레나 루벨의 얼굴이 멍해졌다.
“옆에 있을게. 거기가 어디든.”
동부공의 한 마디에 레나 루벨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넘쳤다. 점점 다가오는 종말 앞에서 그들은 간절하게, 마치 떨어지면 죽는 것처럼 애절하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우라는 나자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내줘서 살린 아들이다. 그런 아들이 연인을 따라 제 발로 무덤에 들어가는 걸 그가 과연 허락할까? 이우라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고, 역시 나자의 표정은 점차 굳어졌다.
“어딜 같이 가겠다는 거냐.”
참다못한 나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죽은 자들이, 그중에서도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자들이 배회하는 곳이다. 그런 곳을 따라가겠다고?”
린의 다그치는 나자의 눈빛이 살벌했다. 나자는 단지 화가 난 게 아니라 린이 산 채로 무덤에 갇힐지 모른다는 가능성에 격렬히 혐오하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자는 평소보다 더 거칠고 사나운 눈으로 레나와 린을 쏘아보며 읊조렸다.
“그러라고 준 목숨이 아니다.”
나자의 경고에는 진심 이상의 살기가 섞여 있었고, 그에 레나와 린은 각기 다르게 반응했다. 레나는 덜컥 놀라 린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그를 무덤으로 끌어들이면 안 된다는 걸 뒤늦게 떠올린 표정이었다. 반면 린은 물러나려는 레나를 오히려 단호히 붙잡았다. 그러곤 평소 그렇게 무서워하던 나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 형님이 늘 후회한 게 그겁니다.”
형님이라는 말에 나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허를 찔린 표정이었지만 린은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형님은, 내 아버지는 당신을 지키지 못한 걸 평생 후회했습니다.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봐서 압니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습니다.”
린의 목소리는 담담하고도 단호했다. 그래서 나자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한때 남편으로 여긴 남자의 이야기에 나자는 린을 빼앗긴 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그것과 다를 바 없는 걸 깨달아버렸다. 그래서 차마 그 둘을 갈라놓을 수 없게 되어, 누그러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나자의 물음에 린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당연한 걸 굳이 확인하지 말라는 투였다. 그때 다시 굉음이 울렸다. 위에서 또 한차례 망자들이 떨어져나왔다. 이제 정말 코앞까지 다가온 모양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린이 갈등하는 나자를 일깨웠고, 나자는 별수 없이 자신의 망자를 불렀다. 그리고 레나는 린에게 안겨,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본 이우라는 직감했다. 레나 루벨이 마지막 순간 리그난 아이테르너를 떼놓고 갈 작정이라는 걸. 이런 상황에서 연인을 사지로 끌고 갈 수 있는 여자는 드물 것이다. 이우라는 그렇게 확신하며 결과를 지켜보려 했다. 그런데 나자의 용이 다가온 순간, 동부공이 돌연 레나 루벨을 안아 들었다. 소위 공주님 안기가 아니라, 자루를 어깨에 짊어지듯이. 예상못 한 상황에 이우라는 눈을 크게 떴고, 레나도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린! 뭐 하는……!”
“에스코트.”
“에스코트!?”
“혹시라도 올라가다 떨어지면 위험하니까.”
레나가 기겁하자 린은 태연히 설명했다. 그 역시 레나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미 아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우라가 눈치챈 걸 린이 모를 리도 없었다.
“잠깐만, 이거 놔봐! 내려줘!”
“도착하면 내려줄게.”
레나가 당황해서 몸부림쳤지만 린은 시치미를 떼며 그를 한사코 놓아주지 않았다. 이우라는 그 꼴이 왠지 좀 재수 없다고 생각하다가 나자가 옆에서 나직이 중얼대는 소리를 들었다.
“개놈들…….”
나자는 혀를 차며 망자에 올라타 그 뿔을 휘어잡았고, 린 역시 레나를 둘러업은 채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린을 떨칠 기회를 잃어버린 레나는, 뭐가 그리 서러운지 그 상태로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나자가 이우라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럼 가겠다.”
“이제 균열이 완전히 닫히는 겁니까?”
“그래, 망자의 왕이 지상에 없으니 무덤과 지상이 연결되는 일도 더는 없을 거다.”
나자의 대답에 이우라는 안도하는 한편 허전함을 느꼈다. 옛 스승을 이렇게 보내는 게 조금 안타까웠다. 그 기색을 눈치챘는지, 나자가 작게 덧붙였다.
“살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걸 해라. 후회하지 말고.”
예상하지 못한 충고에, 그리고 평소의 나자라면 절대 할 리 없는 성격의 말에 이우라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사이 나자의 망자가 날아올랐고, 이우라는 뭐라 대꾸할 기회를 놓친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마지막으로 보인 건 린의 어깨에 엎드린 레나 루벨의 얼굴이었다. 그 여자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마치 납치당하는 사람처럼 엉엉 울고 있었다. 강철같은 레나 루벨이 우는 모습이 꽤 충격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한심했다. 균열을 닫기 위해 희생하는 엄중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우라는 저게 젊은 놈들의 연애놀음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편으로 생각했다. 저 둘이라면 무덤에서도 그럭저럭 행복하게 지낼 것 같다고. . . . 거기까지 회상한 이우라는 불쾌함을 애써 참았다. 그러곤 최대한 친절한 눈으로 자신의 휴식을 방해한 루비드 플레누스 그라샤와 엔지 루벨을 바라보았다.
“동부공과 레나 루벨을 데려올 수 있다!”
동생 놈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다짜고짜 용건부터 꺼냈다. 처참한 예의범절이었지만, 이우라는 그를 경멸하는 대신 묵묵히 집무실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루비드가 아직 부상으로 절뚝대는 몸으로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엔지도 종종걸음으로 와서 그 옆에 소심히 끼어들었다.
“대뜸 그게 무슨 소리지?”
이우라의 물음에 엔지가 루비드와 세운 가설을 설명했다. 아직 살아 있는 동부공이 무덤에 있으니, 지상과 무덤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닐 거라는 이야기였다.
“설령 그렇다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하지만 희망에 찬 엔지나 루비드와 달리 이우라는 단호하고 냉정했다.
“제단은 힘을 잃었고 무덤으로 접근하는 수단도 사라졌다. 게다가 망자의 왕이었던 니힐과 한낱 인간인 리그난 아이테르너가 각 세계에 끼치는 영향이 같다고 보긴 어렵다.”
“그건 모르는 거잖아!”
루비드가 버럭 성을 냈다. 엔지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실망한 탓이었다. 그럼에도 이우라는 헛된 희망엔 호응해주지 않았다.
“또한 기적적으로 무덤과 연결된다 해도 그 후 레나 루벨을 데려온다는 선택지는 우리에게 없다. 그가 자진해서 무덤으로 향한 건 자신이 니힐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니힐과 같은 존재, 지상으로 나와선 안 되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쐐기를 박는 말에 엔지는 고개를 떨어트렸고, 루비드는 반대로 고개를 치켜들고 이우라를 노려봤다. 그 무언의 비난에 이우라는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니힐이 존재하던 시절, 그의 발밑은 늘 살얼음이었다. 그래서 항상 몸을 사리고 가장 보수적인 선택을 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니힐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더는 숨죽일 필요 없이, 그간 포기했던 가능성에 눈을 돌리고 새로운 도전을 해봐도 괜찮은 시절이었다.
―살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걸 해라. 후회하지 말고.
뒤늦게 나자의 충고를 떠올린 이우라는 넌지시 말을 돌렸다.
“……그렇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방법이 있다면 저쪽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도무지 익숙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는 어쨌든 위로 비슷한 것을 구사했다.
“동부공도 레나 루벨도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니 틈을 발견한다면 분명 대책을 세울 거다. 만약 그들이 돌아오는 데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원하겠다.”
이우라의 답지 않은 태도에 실망하던 엔지와 화를 내던 루비드의 표정이 똑같아졌다. 그 둘이 뭘 잘못 들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이우라는 앞서 한 말을 후회하며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어색함을 이겨낸 이우라가 덧붙였다.
“그 아이한테도 전해줘라.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고.”
. . . 벌컥 소리와 함께 며칠동안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렸다. 이윽고 방 안에서 달려나온 여자아이는 아직 눈가에 눈물을 달고 있었다.
“진짜야?”
여자아이, 유니의 다급한 물음에 엔지는 일순 말을 잃었다. 그러자 유니가 발을 구르며 되물었다.
“아가씨를 만날 기회가 있는 게 진짜냐고!”
“어, 어. 아직 가능성뿐이지만…….”
엔지는 서둘러 대답하다가 놀라서 말을 멈췄다. 유니가 그대로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다행이다.”
유니는 바닥에 앉아 신음하더니, 작은 몸을 움츠리며 엎드렸다.
“다행이다…….”
치마폭에 가둔 목소리엔 실낱같은 안도와 함께 울음이 가득 섞여 있었다. 잠시 당황했던 엔지는 유니를 따라 몸을 낮췄다. 그러곤 친구의 어깨를 말없이 토닥여주었다. *** 비록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엔지는 기다리기로 했다. 이우라의 말마따나 누나도 동부공도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니까, 분명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덤의 시간은 이곳보다 더 빠르게 지나가니까, 금방 소식을 전해주겠지. 엔지는 그렇게 믿고 기다렸다. 하루를, 그리고 또 하루를. 여러 번의 하루가 쌓여 계절이 바뀌어도. 겨울 후 또 한 번의 겨울, 그리고 다시 찾아온 봄에도 엔지는 기다렸다. 어느덧 엔지는 열여섯 살이 되었고 그사이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란디스 그라샤는 황제와 추기경이 사라지며 자연히 해체 수순을 밟았다. 일부 귀족들이 권력을 유지할 방법을 찾았으나 그들의 시도는 시작도 못 하고 좌절되었다. 황제가 사라진 날 흐드러지게 핀 백합을 통해 사람들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덤 속에서 기도하던 자들의 이름과 그들을 착취한 잔혹한 역사를.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을 알게 되며 사유를 시작했고 지혜를 얻었다. 자신들이 비천과 빈곤 속에서 동일하게 착취당하고 있음을 깨달았고, 이미 100년 전에 혁명이 시작되었던 광장으로 다시 나왔다. 하지만 100년 전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과거 희생양이 되었던 여왕이 무엇이 되어 돌아왔는지 다들 아는 까닭이었다. 사람들은 싸움보다는 대화를 원했고, 미워하기보다는 함께 살아가기를 택했다. 그리고 귀족의 대표인 이우라는 거기에 응했다. 이후 이우라는 민중과 의견을 조율하고 식민지가 된 나라를 해방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루비드도 착실하게 형의 일을 도왔고, 유니는 레나를 기다리며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엔지는 클라비스의 마지막 부탁대로 책을 쓰고 있었다.
“후…….”
엔지는 깃펜을 내려놓으며 어깨를 쭉 폈다. 그러자 혹사당한 척추에서 뚜두둑 소리가 났다.
‘이제 겨우 초고 완성.’
엔지는 어깨를 주무르며 책상에 놓인 종이뭉치를 바라보았다. 정갈한 필체로 채워진 그 원고는 엔지가 클라비스의 부탁으로 쓰고 있는 그라샤의 마지막 역사였다. 사람들은 황제가 없는 세상에 빠르게 적응해가면서도 그가 대체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아마 이 원고는 그들의 궁금증을 적게나마 해소해줄 수 있을 것이다. 엔지는 자신이 1년 꼬박 써낸 원고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장을 쏟아내느라 지친 머리가 느릿느릿 돌아갔다. 글을 쓰는 건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집중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여기에 매달려 지내느라 기다림에 목을 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곧 책이 완성된다. 그럼에도 누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앞으로 뭘 해야 할까? 엔지는 막연히 걱정하다가 서랍을 열었다. 그러곤 고이 접힌 편지를 꺼냈다. 그건 엔지가 아버지의 재판 직전에 받은, 레나 루벨이 악필로 눌러쓴 편지였다. 이미 몇 번이고 읽은 편지지만 엔지는 습관처럼 그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편지를 읽다가 잠시 웃고, 한숨을 쉬고, 살짝 숙연해진 다음 다시 웃었다. 그러고 나선 깊이 탄식했다. 이런 편지 남겨놓고 안 오면 어떡해. 대체 언제 올 거야, 벌써 1년이나 지났는데. 엔지는 지친 몸을 기울이며 책상에 머리를 기댔다. 여리기만 하던 소년은 1년 사이 많이 자랐다. 이젠 누나보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어졌는데, 정작 너는 내가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돌아올 생각인 걸까? 아니면 이 기다림은 너와 무관한, 그저 내 미련인 걸까? 엔지가 책상에 엎드린 채, 잔잔히 밀려오는 슬픔을 견딜 때였다.
“엔지 사제.”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사제 한 명이 엔지를 찾아왔다. 엔지가 슬픈 기색을 지우며 몸을 일으키자, 그 사제가 너덜너덜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엔지 사제 앞으로 편지가 왔네요.”
“편지요?”
엔지는 의아해하며 봉투를 살펴보았다. 꽤 멀리서 온 듯 너덜너덜한 봉투엔 발신인의 이름 없이 ‘엔지 루벨에게’라는 글자만 적혀 있었다. 단지 그뿐이지만 엔지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편지에 찍혀 있는 건 누가 봐도 레나 루벨의 악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