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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화. 잘 지냈어? (193/208)

193화. 잘 지냈어?2022.03.07.

엔지 루벨에게. 안녕. 잘 지냈니? 옥탑에 갇혀 있었다는 얘기 들었어. 몸은 좀 어때? 생각해보니까 너한테 편지 쓰는 건 처음 같아. 어릴 때 쓴 생일 카드를 빼면 말이야. 생일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유니한테 전해준 선물은 잘 받았어. 인사가 늦어서 미안. 사실 네가 내 생일을 기억하고 챙겨줄 줄은 몰랐어. 왜냐하면 나는,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거든. 날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혹시 지금은 어때? 나 때문에 안 좋은 일을 겪었는데, 옥탑에 갇히고 이젠 아버지의 재판도 앞두고 있는데, 여전히 나를 만나고 싶니? 내가 돌아와서 가장 피해를 본 사람은 아마 너일 거야. 아버지는 본인이 잘못한 대가를 치르는 거지만, 너는 아무 잘못도 없이 가진 걸 빼앗기게 됐으니까. 그래서 너를 만나지 못했어. 내가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할 일은 네겐 피해만 줄 테니까. 그래서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받아들이려고 해. 날 미워하든 용서하든, 설령 복수한다고 해도. 그런데 만약에, 정말 만약에 네가 나를 용서한다면, 그땐 나도 너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 그동안 서로 못한 이야기들, 전부. 결정을 미뤄서 미안. 곧 대답을 들으러 갈게. 아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때까지 잘 지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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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아직 그라샤가 제국이던 시절 레나 루벨이 보낸 편지. 냉정한 듯 무심한 듯 조심스럽던 누나의 편지. 1년 전, 엔지는 이 편지를 받고 고민했다. 홀로 버림받았다가 돌아온, 그 자체에 죄책감을 느끼는 누나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나는 괜찮아. 누나 잘못이 아니야. 아버지는 대가를 치른 거야. 누나를 용서할게……. 쉽게 떠오르는 진부한 말들을 헤치고 고민하며 누나를 만날 날만 기다렸다. 그게 엔지 루벨의 지난 1년이었다.

16562841603599.jpg“저건가?”

말을 타고 앞장서던 루비드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말했다. 그러자 뒤따르던 엔지도 말을 멈추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야 가득 울창한 숲이 보였다. 봄기운을 머금고 새싹을 틔우는 나무들 가운데, 유독 커다란 나무가 눈에 띄었다. 루비드와 엔지, 그리고 엔지의 뒤에 타고 있던 유니는 그 자리에 서서 나무를 살펴보았다. 마침 바람이 불어오더니 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렸다. 나뭇가지에 걸린, 놋쇠로 만든 물고기와 종에서 나는 소리였다.

16562841603599.jpg“맞네, 종이 달린 고목.”

루비드가 그 종을 보고 중얼댔다. 동부공 대리인 데카의 말대로였다. 동쪽 숲 끝에 도달하자 딸랑대며 흔들리는 풍경이 고목에 걸려 있었다.

16562841603613.jpg“빨리 종을 쳐봐요.”

엔지의 뒤에서 유니가 재촉했다. 머리를 질끈 묶은 소녀의 채근에 루비드는 검을 빼서 높이 매달린 종을 건드렸다. 쨍강쨍강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16562841603599.jpg“……이거 맞아?”

루비드가 반신반의하며 엔지에게 묻자, 엔지도 자신 없는 눈으로 나뭇가지에 걸린 풍경을 바라보았다. 몇 주 전, 엔지는 발신인 불명의 편지를 받았다. ―동부로 와. 너무 티 내지는 말고. 딱 이 말만 적힌 편지였다. 평소라면 장난으로 여기고 말았겠지만, 엔지는 그것을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그 편지에 담긴 몹쓸 필체가 누나의 악필과 꼭 닮은 탓이었다. 엔지는 당장 달려가 그 편지를 유니에게 보여주었고, 유니도 레나의 비범한 악필을 곧장 알아보았다. 그로써 엔지와 유니는 루비드의 보호 아래 무작정 동부로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부의 관문을 지나자마자, 엔지는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16562841603627.jpg―엔지 루벨 님. 동부공 대리인 데카 모닐 경이 성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데카 모닐이라면 동부공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한 기사였다. 혹시 누나가 동부 성에 있는 걸까? 엔지는 기대에 부풀어 동부 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엔지의 기대와 달리, 동부 성에서 그들을 맞이한 건 오직 데카 뿐이었다.

16562841603627.jpg―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왕자 저하의 행차를 간소히 맞이하는 점은 용서하십시오.

데카 모닐은 그렇게 말하며 음울하게 웃었다. 듣자 하니 지금 동부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불과 십수 년 전까지도 인접 국가를 침략한 탓에 동부는 아직 혼란스러웠는데, 최근 제국이 개편되면서 상황은 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황제의 죽음으로 해방된 이방인들은 제국이 건재한 것에 은근한 분노를 느꼈고, 일부 제국인들은 조금씩 기어오르는 이방인들을 도로 찍어누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언제 사고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 데카를 비롯한 그의 기사들은 지난 1년간 내리 긴장 상태였다. 그럼에도 데카는 엔지와 함께 온 사람들을 성의껏 대접했다. 그러곤 계속 눈치를 보는 엔지에게 영문 모를 이야기를 꺼냈다.

16562841603627.jpg―동쪽으로 더 가면 그라샤의 예전 국경이 있습니다.

16562841603627.jpg―그 숲 가장 동쪽에서 종 달린 고목을 찾으십시오. 그 종을 치면 마중을 나올 겁니다.

뜻밖의 말에 엔지가 놀라서 쳐다보자, 데카가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16562841603627.jpg―단, 수행원들은 여기 두고 세 분만 가셔야 합니다.

데카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설명을 끝냈다. 그래서 엔지도 더 묻는 대신 동부 성에서 여독을 풀고 다음 날 곧장 출발했다. 마차 대신 말을 타고, 수행원들의 염려를 뒤로한 채 유니와 루비드만 데리고 다음 여정에 나섰다. 그렇게 말을 달려 드디어 도착한 국경이 바로 이 숲이다. 챙챙챙챙챙! 루비드가 레이피어 끝으로 고목에 걸린 풍경을 마구 흔들었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왜 아무도 없냐며 신경질을 내는 꼴이었다.

16562841603613.jpg“으, 시끄러워요!”

그 소리를 참다못해 유니가 빽 소리쳤다.

16562841603627.jpg“맞습니다! 시끄럽습니다!”

그러자 소년의 목소리가 냉큼 거들었다. 엔지가 아닌 다른 목소리였다. 뜻밖의 목소리에 세 사람은 놀라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곧 그들은 언덕 저편에 선, 이방의 옷을 입은 소년을 발견했다.

16562841603627.jpg“소리 듣고 왔으니까 이제 그만 건드십시오.”

그 소년은 다소 능글맞게 말하며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니가 돌연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16562841603613.jpg“어? 너……!”

16562841603627.jpg“오랜만이다, 유니야.”

유니가 소년을 알아보자, 소년 역시 유니를 아는 듯 반가워하며 달려왔다.

16562841617211.jpg“누구야?”

엔지가 뒤에 앉은 유니에게 속삭여 물었다. 그런데 유니가 대답할 틈도 없이 그 불상의 소년이 성큼 다가와 말했다.

16562841603627.jpg“엔지 루벨 맞지요? 정말 많이 닮았습니다.”

닮았다는 말에 엔지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사이 소년은 눈을 돌려 루비드를 쳐다보았다.

16562841603627.jpg“그리고 같이 온 분은…….”

소년은 루비드의 금발을 빤히 쳐다보더니, 조금 머뭇대다 속삭이듯 물었다.

16562841603627.jpg“혹시 치자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16562841603599.jpg“……시비냐?”

루비드가 도끼눈을 뜨고 으르렁대자 소년은 손을 저으며 넉살 좋게 웃었다. 그러곤 비로소 자신을 소개했다.

16562841603627.jpg“저는 진이라고 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제 저를 따라오세요.”

진은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고, 엔지를 비롯한 세 사람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잠자코 그 뒤를 따랐다. 숲길을 빠르게 달리는 소년을 따라가며 엔지는 묻고 싶었다. 절 어떻게 아세요, 누가 당신을 보냈나요, 지금 가는 곳에 누가 있나요. 여러 질문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엔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니도 마찬가지였다. 섣불리 입을 여는 순간 꿈에서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이들은 그저 묵묵히 길잡이의 뒤를 따랐다. 그러길 한참, 숲속에 감춰져 있던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붕마다 기와가 첩첩이 쌓인, 루비드와 유니에겐 다소 낯선 양식의 마을이었다. 그 마을을 본 엔지는 가슴이 쿵쿵 뛰었지만, 끝까지 내색하지 않고 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의 입구에 도달하고, 관문을 지나고, 이쪽을 힐끔대는 여러 사람을 스쳐 어느 집 앞에 도착했다.

16562841603627.jpg“우리 집입니다.”

진은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었다. 대문이 열리며 집안의 정경이 드러나자 엔지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16562841603599.jpg“너희들…….”

루비드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유니가 그를 밀치고 달려들었다. 그러곤 마루에 앉아 있던 숙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유니는 그대로 울음을 터트렸고, 숙녀는 빙그레 웃으며 소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리고 옆에 선 청년은 잠자코 미소 지었다. 레나와 린이었다. 두 사람은 1년 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곳에 있었다. 레나가 머리를 곱게 땋아 내린 것을 제외하면 모두 그때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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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2841630288.jpg“어서 와.”

유니를 달래던 레나가 아직 현관에 선 엔지와 루비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엔지는 잠시 울컥했지만 최선을 다해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곤 오랫동안 준비한 말을 꺼냈다.

16562841617211.jpg“……잘 지냈어?”

홀로 버림받았다가 돌아온, 그 자체에 죄책감을 느끼는 누나. 엔지는 그런 누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결국 그가 선택한 말은 이거였다. 이것 말고 더 나은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나쁜 선택은 아니었는지 레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엔지는 누나의 미소에 이끌려 다가갔고, 유니가 그런 것처럼 레나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재회였다. . . .

16562841603613.jpg“언제 돌아오신 거예요?”

유니의 물음에 레나와 린은 조금 곤란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뭔가 찔리는 사람들의 눈빛이었다.

16562841630288.jpg“사실 돌아온 지는 꽤 됐어요. 그러니까, 1년 좀 넘었네요.”

16562841603599.jpg“1년?”

레나의 대답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은 건 루비드였다. 유니도 비슷한 심정인지 다소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16562841603613.jpg“그런데 왜 이제야 연락하신 거예요?”

16562841630288.jpg“제가 돌아온 걸 제국에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여러모로 혼란스러워질 테니까요.”

사람들은 레나와 니힐이 망자의 왕인 걸 이미 알고 있다. 또 니힐의 존재로 무덤이 열렸던 것도.

16562841630288.jpg“사람들에게 망자가 다시 나타날 거라는 두려움을 줄 수도 있고, 황제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추대받을 수도 있고, 배교자들이 다시 뭉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아무래도 돌아가는 것보단 이대로 없는 척하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16562841603613.jpg“그, 그럼 저희한테만 몰래 연락해줄 수 있잖아요!”

16562841630288.jpg“그 생각도 안 한 건 아니지만 그러다 이우라 씨에게 들키면 난감할 것 같았어요. 지금이야 많이 안정돼서 괜찮지만, 작년 이맘때라면 이우라 씨가 절 못 본 척해줄 것 같지 않았거든요.”

레나가 요목조목 대답하자 유니는 말문이 막힌 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지켜보던 엔지가 나섰다.

16562841617211.jpg“그럼 1년 동안 여기 있었던 거야? 데카 경한테만 알리고?”

16562841630288.jpg“아니, 여기 온 지도 얼마 안 됐어.”

엔지는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쳐다봤고, 레나는 빙그레 웃으며 린에게 대답을 미뤘다.

16562841643917.jpg“그전에는 동쪽을 여행……했습니다.”

16562841617211.jpg“앗…… 그러셨군요…….”

린은 가볍게 대답하다가 처남 될 사람을 급속도로 어려워하며 말을 높였고, 엔지는 그런 매형 될 사람을 더더욱 어려워하며 눈치를 봤다. 그들의 소심한 내외가 시작되자, 이번엔 루비드가 입을 열었다.

16562841603599.jpg“어떻게 돌아온 거냐? 균열이 닫히고 제단도 다 무용지물이 됐는데.”

16562841630288.jpg“린 씨가 이쪽의 연결고리가 되어 줬어요. 생각도 못 했는데 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린을 통해 균열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정말 우연히 알게 되었다. 과거 니힐의 시대에 무덤과 지상을 연결하는 건 니힐이 처형당했던 제단이었다. 니힐이 강력한 의지로 지상에 돌아온 후, 니힐의 제단은 문을 여는 매개였다. 그와 같은 일이 린에게도 벌어진 건, 그가 망자의 피를 뒤집어쓰면서였다. 린이 있어서 통로를 만들 수 있었다는 대답에 루비드가 재차 물었다.

16562841603599.jpg“그럼 무덤 쪽 상황은 다 정리가 된 거냐?”

16562841630288.jpg“아뇨, 전혀요. 안쪽은 아직 난리예요.”

루비드는 당연히 레나가 카르도 루벨을 비롯한 왕들을 모두 제압하고 나왔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레나의 대답은 루비드의 기대와 거리가 멀었고, 루비드는 꽤 당황했다.

16562841603599.jpg“그런데 어떻게 나온 거야?”

16562841630288.jpg“말하자면 긴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지원군을 만났어요.”

16562841603599.jpg“지원군?”

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니와 엔지를 향해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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