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0화. 그럼에도 너의 이름엔 (200/208)


200화. 그럼에도 너의 이름엔
2022.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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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저 얼굴들을 또 보게 될 줄이야.”

잿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웃으며 중얼댔다.

거만하게 앉은 남자의 아는 척에 루비드는 인상을 쓰고 엔지는 눈을 깜빡였다.

나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공간은 무덤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상했다.

마치 그라샤 황궁의 응접실을 그대로 옮겨둔 듯 화려하게 꾸며진 공간엔 한 남자가 느긋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루비드와 엔지는 괜히 낯익은 그 남자를 얼떨떨하게 바라보더니, 이내 동시에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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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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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남부공 저하?”

루비드와 엔지가 뒤늦게 알아보자 그 남자, 남부공은 끌끌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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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맞은 것은 여전하구먼.”

젊은 얼굴로 노인처럼 말하는 남부공을 보며 두 사람은 한층 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로 이우라가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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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조했습니다, 남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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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조했다라, 그게 죽은 자에게 어울리는 말 같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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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삼가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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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미도 여전하군.”

이 와중에도 남부공과 이우라는 습관처럼 날 선 말을 주고받았다.

그럼에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지, 남부공은 씩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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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잡스러우니 다들 앉게.”

남부공의 말과 함께 비어 있던 자리에 소파와 의자가 솟구쳤다. 엔지와 플레누스 형제, 그리고 북부의 기사들에게 꼭 맞춘 수였다.

이 몽환적이고 이질적인 광경에 기사들이 머뭇대자, 그들을 데려온 나자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우라도 기사들을 향해 끄덕이고 남부공의 맞은편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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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들 모습을 보니 바깥 시간은 얼마 흐르지 않은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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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달이 공의 2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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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주어 몹시 고맙네.”

이우라의 한결같은 싸가지에 남부공은 이를 악물며 웃었다.

여전히 얄미운 북부공을 한차례 흘겨보고서, 남부공은 두리번대며 없는 사람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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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자는 어디 있지? 길만 열어주고 안 온 건가?”

집행자, 레나를 찾는 말에 이우라는 대답하는 대신 엔지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엔지가 대신 누나의 근황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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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는 안 왔습니다, 다음 달에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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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여유롭던 남부공의 눈이 번쩍 뜨였다. 대화에 참여하지 않던 나자도 처음으로 엔지를 돌아보며 반응했다.

나자의 시선에 엔지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자, 남부공이 서둘러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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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쪽은 리그난 아이테르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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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하.”

남부공의 도움으로 궁금증을 해소한 나자의 눈빛이 한결 가라앉았다. 그걸 본 남부공이 장난스레 빈정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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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할망구가 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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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쳐라, 늙은이.”

나자는 차갑게 으름장을 놓으며 시선을 돌렸고, 남부공은 엔지에게 레나와 린에 대한 것을 이래저래 더 물어보았다.

어디서 지내느냐, 싸우진 않느냐, 뭘 먹고 사느냐 등등의 문답이 이어졌다.

그로써 한결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이우라는 앞에 놓인 테이블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대국이 한창인 체스판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무리 봐도 나자와 남부공이 마주 앉아 체스를 두던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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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느긋하게 지내고 계셨을 줄은.”

예상과 동떨어진 무덤의 풍경을 두고 이우라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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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 루벨은 두 분이 카르도 루벨과 싸우고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싸우기는커녕 무덤을 황궁처럼 꾸며놓고 체스를 두고 있다니.

이우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자 나자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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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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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도 루벨과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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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 됐네. 그전까진 집행자의 말대로 전쟁통에 아수라장이었지.”

이우라가 반신반의하며 되묻자 남부공이 덧붙였다. 그러자 이번엔 루비드가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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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벨과 합의라도 했다는 뜻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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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닐세. 카르도가 전략을 바꾸고 물러난 것뿐이네. 여길 돌파할 수 없는 걸 깨닫고 히엠스 그라샤의 심장을 부숴서 버렸지. 새로운 왕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야.”

남부공의 말에 루비드와 엔지는 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반면 이우라의 눈은 가늘어졌다.

카르도는 이 얼음벽을 깨기 위해 수백 번을 시도하고 딱 그만큼 실패했다.

그는 니힐처럼 다른 왕들의 심장을 빼앗아 자신의 권능으로 삼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전력은 남부공과 나자가 형성한 공동전선을 뚫지 못했다.

그래서 카르도 루벨은 차라리 도박을 결심했다. 반쪽짜리 심장을 차라리 부숴버리고, 온전한 심장을 가진 새 왕과 손을 잡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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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엠스 그라샤나 프리무스에겐 이미 원한을 사서 동맹이 불가능하니, 새 왕을 탄생시켜 그자와 손을 잡을 생각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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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동맹은 체결되었습니까?”

이우라가 성급하게 물었지만 남부공은 느긋이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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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아직은 감감무소식이군. 잘되면 어련히 먼저 찾아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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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방관해도 될 사안입니까?”

남부공의 여유만만한 모습에 이우라가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나자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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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이 가장 바라는 게 우리가 여길 비우는 거다.”

나자는 그렇게 말하며 창문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살아 있는 인간은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노려보며, 나자는 나직이 으르렁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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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을 결성하든 어쩌든 상관없다. 혼자 오든 같이 오든 찢어버리면 그만이니까.”

나자의 살벌함에 살아 있는 자들 중 절반은 움찔 겁먹고 나머지 절반은 조용히 납득했다.

무덤의 안락한 광경에 내심 당황했는데, 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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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포는 충분히 풀었으니 본론으로 넘어가지. 여기까진 어인 일인가?”

남부공이 이우라를 비롯한 손님들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저 불청객들을 여기까지 안내한 나자가 대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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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도 루벨의 진짜 이름을 알아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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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도 루벨의?”

뜻밖의 소식에 남부공의 눈썹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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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알아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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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 루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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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같이 왔군. 하긴, 과거 왕들의 이름을 알아낸 것도 자네였지.”

남부공은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엔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다소 짓궂게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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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도 루벨의 이름인 건 확실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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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실은 그게…….”

엔지는 증거를 보여주려는 듯 가방을 열었다. 하지만 남부공이 그의 행동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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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도 루벨이 여길 감시하고 있을 걸세. 그러니 설명하지 말고 확실한지만 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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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요……?”

카르도가 보고 있다는 말에 엔지는 급히 주위를 두리번댔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더 두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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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 보고 있다니 긴장되는 모양이군.”

남부공이 창백해진 엔지를 보고 중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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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왜 직접 온 겐가? 뒷일은 북부공에게 맡겨도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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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겠다고 했어요. 아버지의 일은 직접 매듭짓고 싶어서요.”

엔지는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또렷한 주장에 남부공의 눈가에 주름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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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대는 겁을 내더라도 도망치지는 않는 자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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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저는 전혀…….”

남부공의 치사에 엔지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차마 토로할 수 없는 후회를 입안에 머금었다.

제가 정말 도망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저하를 해치는 일도 없었겠죠.

엔지는 클라비스와 아버지의 모의를 알고도 침묵한 일을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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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를 고발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남부공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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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비를 감싸면서도 날 도우려고 했네. 그건 연약한 게 아니라 다정한 거지. 그게 무정한 것보다는 한참 나으니 풀 죽지 말게. 게다가 결국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아들로서 매듭을 짓겠다고.”

남부공의 격려에 엔지는 표정이 기묘해졌다.

소년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로 남부공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시선에 염려하던 마음은 이미 녹듯이 사라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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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얻은 엔지가 다시 단단해진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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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이름은 확실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성까지 안내해주세요. 성을 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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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를 알려주는 건 쉽네만 동행해줄 수는 없네. 우리가 자리를 비우면 그자가 틈을 노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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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망자들로 호위를 붙여주겠다.”

남부공이 대답하는데 나자가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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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성문을 열면 내가 곧장 가겠다. 하지만 문을 여는 데 실패하면, 거기서 살아 돌아오는 건 전적으로 너희 몫이다.”

나자가 내건 조건은 냉혹했다. 자신이 없으면 이제라도 포기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우라나 엔지뿐만 아니라 루비드와 다른 기사들도 이 오랜 싸움을 그만 끝내기로 결연한 상태였다.

그들의 각오를 확인한 남부공과 나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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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도 루벨의 성은 저 방향일세. 어차피 시간이 답보하는 세계이니 걸어가도 무관하겠지만, 기왕 이렇게 됐으니 순식간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지.”

남부공이 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러자 황궁의 벽 한 면이 녹듯이 사라지며 무덤의 붉은 하늘과 검은 땅이 드러났다.

그곳을 향해 남부공이 손짓하자 된서리가 쏟아졌다. 이윽고 그것은 얼음 길이 되어 검은 땅을 가로질렀고, 때마침 하늘에선 한 무리의 거대한 용들이 날아왔다.

강처럼 뻗은 얼음 길도, 비늘을 몸에 두른 용의 위엄도 대단한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앞에 둔 엔지는 왠지 불안해졌다.

.
.
.

엔지의 불안은 곧 실체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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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어어얼어 죽을 것 같아요! 으아아, 저하, 살려주세요!”

엔지가 가방을 꽉 끌어안은 채 비명을 질렀다. 정면에서 마구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숨도 쉬기 힘들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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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우면 입을 다물어, 이 촉새 자식아!”

엔지의 엄살에 루비드가 버럭 소리쳤다. 그러면서도 엔지에게 쏟아지는 바람을 막으려는 듯 몸을 더 세웠다.

그들은 지금 달리고 있었다. 아니, 미끄러지고 있었다.

카르도 루벨의 성으로 향하는 그들을 위해 남부공은 빙판을, 그리고 나자는 용을 마련해주었다. 그래서 지금 그들은 용을 썰매처럼 타고 빙판 위를 미끄러지고 있었다.

날개를 뒤로 젖히고 발톱으로 바닥을 미는 용은 화살처럼 빠르게 빙상을 가로질렀고, 하늘에서 나는 스무 마리의 용은 그들을 철저히 호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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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하, 전방에 성이 보입니다!”

가장 앞에 앉은 기사가 소리쳤다.

엔지도 소리를 듣고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말마따나 검은 언덕 저편에 성이 보였다. 칠흑색으로 물든 거대한 성, 카르도 루벨의 은신처였다.

엔지가 그걸 보고 마른침을 삼키는데, 하늘을 날던 용 한 마리가 돌연 땅으로 돌진했다.

콰앙! 굉음과 함께 땅이 울렸다. 놀라서 돌아보니, 하늘에서 내려온 나자의 용이 헐벗은 망자들과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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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을 나왔군.”

이우라가 중얼대기 무섭게, 몸을 숨기고 있던 카르도의 망자들이 전면에서 달려들었다.

***

같은 시간, 유니는 대청마루에 누워 청명한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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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들어갔으려나…….”

유니의 혼잣말에, 옆에 앉아 빨래를 개던 린이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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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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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랑 이우라 아저씨요. 다시 무덤에 간다고 그랬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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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레나의 저고리를 마저 곱게 접었다.

유니는 누워서 린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겉으로는 침착한 척하지만 내심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유니는 주인님이 무슨 생각을 하나 헤아리다가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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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이름을 알아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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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냥 법칙 같은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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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그렇게 생각하면 쉽죠. 모든 건 세상의 법칙이죠.”

유니의 큰 실망에 린은 다시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한다고 해서 모르는 걸 알게 되는 건 아니었다.

애당초 린은 성문의 열쇠가 왜 왕의 이름인지 궁금해한 적조차 없었다.

왜 하필 이름인가.

한참을 고뇌하던 린은 결국 한발 슬쩍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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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레나가 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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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를?”

그때 마침 레나가 돌아왔다.

산책 겸 숲에 다녀온 레나는 치마폭에 무언가를 가득 담고 있었다. 산달을 앞둔 탓에 품이 큰 동부의 옷을 겹겹이 걸쳐 입었지만, 레나의 걸음은 여전히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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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다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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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요. 진이가 따줬어요.”

레나는 린과 유니가 있는 마루로 가 앉았다. 그러곤 잠시 떨어졌던 남편의 뺨에 입을 맞추고, 유니에게는 빨갛게 익은 사과를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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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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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름을 알아야 하는지 물어봤어요.”

레나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자, 유니가 린에게 했던 질문을 레나에게 반복했다.

곧 맥락을 이해한 레나는 짙게 웃었다. 그러곤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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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존재하려면 이름이 필요하니까요. 특히나 사람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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