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축복이 가득했음을
(201/208)
201화. 축복이 가득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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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화. 축복이 가득했음을
2022.04.04.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에 혼자 생긴 사람은 없어요.”
레나가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존재하기 위해선 반드시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해요. 가혹한 세상을 혼자 헤쳐나온 것 같아도, 정말 혼자는 아니었을 거예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많은 사람의 손을 타고 지금의 자신이 된 거죠.”
세상으로부터 버려졌을 때 레나를 살린 것도 결국 타인이었다.
이미 죽은 왕의 반쪽짜리 의지, 어느 시인이 과거에서 보낸 시, 그리고 아픔을 딛고 고요히 기도하던 자들.
“인간은 타인의 관계를 통해 존재할 수 있고, 그 존재를 정의하는 게 바로 이름이에요.”
“그래서 이름을 부르면 성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건가요?”
유니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아직 이해가 덜 됐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레나가 빙긋 웃으며 부연했다.
“무덤은 이곳보다 더 본질적인 세계예요. 겉치레는 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죠.”
그래서 망자들의 모습도 그토록 제각각이다.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존재, 뱀과 용처럼 피가 서늘한 존재, 짐승처럼 난폭한 존재, 불타는 벌레처럼 맹목적인 존재. 그리고 손을 뻗어 기도하는 존재들까지.
“그래서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그 세계에선 이름이 절대적인 힘을 갖는 거예요. 타인에게 불릴 때 비로소 존재하는 게 우리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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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도 루벨은 당혹감과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딸은 지옥에서 돌아와 자신을 끌어내리더니, 이젠 아들까지 지옥으로 쫓아왔다. 역시나 아비인 자신을 패대기치기 위해서였다.
이 가당치도 않은 상황에 카르도는 격분하며 궁리했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아낸 거지?’
아까 남부공과 나자의 진영에서 하는 말을 엿듣고 그는 스스로의 귀를 의심했다.
내 진짜 이름을 기억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스스로도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인데, 그 이름을 대체 어떻게.
그나마 자신의 과거와 연결된 자라면 라울, 추적을 끝까지 피한 쥐새끼. 하지만 그자도 내 이름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애당초 날 인간 취급도 안 하던 작자니까.
‘그런데 대체 무슨 수로……!’
카르도는 엔지가 왕들의 이름을 알아낸 일을 떠올리고 더 분노했다. 두려움을 참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의 감정을 따라 성밖의 망자들은 더 거세게 날뛰었다.
앙상한 사지를 가진 카르도의 망자들이 이쪽으로 향해 달려오는 것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냉랭한 얼음 가시와 나자의 흉포한 용들은 그 공격을 치열하게 막아냈다.
이대로라면 저들이 성 앞까지 당도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카르도는 망자의 시선을 빌려 이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자들을 쏘아보았다. 증오스러운 플레누스 형제와 그 사이에 앉은 엔지 루벨이 보였다.
훌쩍 큰 엔지를 보며 카르도는 잠시 심장이 멈추는 기분을 느꼈다.
문득 옛날 일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그날은 엔지가 태어난 날이었다.
―아드님이십니다, 주인님!
그날은 저택의 모두가 기뻐했고, 나 역시 후계자의 탄생에 환희했었다.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물론 준비해놓았다. 엔지 루벨. 아들을 위해 아주 예전부터 고민한 이름이었다.
―아가씨는 레나, 도련님은 엔지. 여왕과 용이군요.
집사의 감탄에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 마음이었다. 너희가 그렇게 성장하길, 그렇게 높이 오르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지금, 레나는 그라샤를 지배하던 여왕의 목을 쳤고 엔지는 용을 타고 무덤에 내려왔다.
카르도는 이 모든 게 공교로워, 마치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휘둘리는 것 같아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콰앙! 굉음과 함께 카르도의 성이 진동했다.
드디어 놈들이 도달했다. 남부공의 얼음이 카르도의 성을 얼리며 벽을 세웠다. 나자의 용들은 얼음 방벽 사이사이에 서서 카르도의 망자들을 경계했다.
그리고 엔지 루벨은, 비로소 도착한 아버지의 성에 조용히 손을 뻗었다.
“아버지, 들리세요?”
거대한 성을 사이에 두고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르도는 변성기에 접어든 아들의 음성에 부득 이를 갈았다.
“제게 화 내고 계시죠?”
그러자 카르도의 기분을 읽기라도 한 듯 엔지가 속삭였다.
“저도 화가 났었어요. 아버지가 실망스럽고 원망스러웠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이젠 슬픈 마음이 더 커요. 아버지가 거기까지 간 건, 그때까지 막아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뜻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엔지의 눈은 여전히 순하고 선했다.
여기까지 와서 저런 눈빛이라니.
카르도는 기가 막혀서 아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걸 까맣게 모르는 엔지는 여상히 속삭였다.
“이제 제가 막을게요. 아버지가 더 잘못하지 않게.”
엔지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망자들이 다시 아우성쳤다.
아직, 아직이다.
카르도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새로운 왕과 동맹이 결성되면 안 그래도 성을 버리고 본체로 남부공과 나자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성이 열리면 저들의 먹이가 될 뿐이다.
절박해진 카르도는 아들의 입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빈번히 막혔고, 이어지는 소란 속에서 엔지는 기어이 하나의 이름을 불렀다.
“아델.”
짧은 호명에 카르도의 눈이 커졌다.
카르도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얼떨떨하게 상황을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성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방금 엔지가 말한 건 카르도의 진짜 이름이 아니었다.
“하…….”
카르도는 엔지가 헛다리 짚은 걸 알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마른 웃음은 곧 광소로 이어졌다.
카르도는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엔지와 플레누스 가의 형제들을 조롱했다.
멍청한 것들, 확실하지도 않은 걸 가지고 여기까지 왔구나.
카르도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다시 성 밖을 바라보았다. 시건방진 플레누스 형제들이 낭패한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카르도의 예상과 달리, 이우라와 루비드의 표정은 침착했다. 마치 엔지가 틀릴 줄 알았다는 투였다.
‘뭐지?’
카르도가 그 모습을 미심쩍게 바라보는데, 엔지가 다시 중얼댔다.
“아드넥.”
그건 또 다른 이름이었다.
“아르도, 에온.”
소년이 낯선 이름을 연이어 부르며 가방을 열었다. 그러곤 거기서 커다란 책을 꺼내 펼쳤다.
그 책에는 사람의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카르도는 놀라서 책을 살펴보았지만, 그 정체를 알아챌 수 없었다.
당연했다. 사제가 아닌 한 존재조차 알기 어려운 저 책은, 교회에서 보관하는 세례자의 명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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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 전, 아직 봄이었다.
“라울이라는 자를 찾았다. 하지만 그자도 카르도의 진짜 이름을 모른다.”
카르도의 이름을 찾기 위해 단서를 쫓던 이우라가 드디어 성과를 가져왔다. 아직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한 반쪽짜리 성과였다.
하지만 엔지는 실망하지 않고 편하게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예요.”
그 태연함에 이우라가 의아해하자, 엔지는 웃으며 덧붙였다.
“그 사람에게 다른 걸 물어봐 주세요. 저희 아버지가 천애 고아였는지, 만약 부모가 있다면 어느 지역에서 살았는지요.”
“태어난 지역을 조사하겠다는 건가? 서부라면 이미 폐허가 되었을 수도 있다.”
“네, 작은 마을들은 아마 살아남지 못했겠죠. 하지만 교구를 관리하는 교회는 큰 도시에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교회?”
뜻밖의 말에 이우라가 고개를 기울이자, 엔지는 다시금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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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샤의 아이들은 태어나고 한 살이 되면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귀족이든 평민이든 구별 없이 교회의 세례자 명단에 이름이 오른다.
신의 고결한 섭리로 세상에 온 아이들을 사제들이 매일 축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엔지는 서부의 교회에서 이 책을 빌려왔다. 카르도가 태어난 시절, 그 지역 아이들의 이름이 모두 적힌 책이었다.
“모르비, 뮤토, 루멘.”
엔지는 책장을 넘기며 수천개에 달하는 이름을 차례로 호명했다.
쾅! 카르도의 망자들은 그것을 저지하려는 듯 얼음 벽에 몸을 던지고 용에게 덤벼들었다.
“서둘러!”
망자들의 기세가 거칠어지자 루비드가 재촉했다.
쾅쾅대는 소리가 얼음 벽을 어지럽게 울렸다. 기사들은 엔지를 중심으로 전열을 갖추고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했다.
그 안에서 엔지는 묵묵히 낭독을 이어갔다.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침착하게 축복을 받아 쓰인 이름을 불렀다.
사냥꾼의 손자라고 했다.
어머니가 죽고 루벨 자작의 성으로 찾아온 아이.
자작의 아들 대신 전장에 나갔던 청년.
그게 라울이라는 남자가 알려준 아버지의 정체였다.
엔지는 그 얘길 듣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교회 명부에 이름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에게도 가족이 있었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비록 지금은 스스로 지워버렸지만, 당신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당신을 돌봐준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엔지는 안도하고 또 안도했다.
“라우라, 레티스, 리에스.”
굳게 닫힌 성 앞에서 엔지는 계속해서 아버지의 이름을 찾아 불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이해했다.
고귀한 자와 천한 자가 구분된 세상이었고, 당신은 밑바닥에서 순응하기엔 너무 영리했다.
당신 덕분에 안락하게 지내온 나는 감히 당신을 비난할 수 없다.
그래서 다만 묻고 싶다.
혹시 다른 방법은 없었는지.
그저 우리가 올라서는 것이 최선이었는지.
그러기 위해 이름을 버리고 다른 존재가 되어서 정말 괜찮았는지.
다른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괜찮았다면 여기까지 치닫지 않았을 텐데.
엔지는 서글픈 마음을 삼키며 속삭였다.
“리시오.”
그 순간 굳건했던 성벽이 돌연 흔들렸다.
그것은 마치 바람을 만난 호수처럼 일렁이며 엔지를 잡아 삼키려 했고, 엔지가 그 안으로 끌려가기 전에 이우라와 루비드가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방금 움직였어.”
“마지막으로 부른 이름이 뭐였지?”
이우라의 물음에 엔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시 책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조심스레 발음해보았다.
“리시오.”
그러자 부름에 응하듯 카르도의 성이 다시 한번 진동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엔지는 맥빠진 목소리로 탄식했다.
“이게 아버지의 이름이었어요.”
리시오. 카르도가 버린 그 이름은 웃음이라는 뜻이었다.
이름을 들킨 카르도의 망자들이 더 거세게 날뛰었다. 산 자들을 감싼 얼음벽이 깨지고 용들이 추락했다.
하지만 엔지와 플레누스 가의 청년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미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얼음바닥을 가르는, 화살보다 더 예리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왔다.”
이우라의 읊조림과 함께, 저편에서 검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용을 타고 달려온 나자였다.
약속대로 나자는 카르도의 본명이 밝혀지자마자 빙상을 건너 나타났다.
망자들의 눈과 귀를 빌려 지켜보고 있던 나자는 곧장 카르도 루벨의 성으로 진격했다.
성 안에서 천둥이 치듯 굉음과 충격이 인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하늘이 흔들리고 땅이 무너졌다.
망자의 왕들은 격렬히 부딪혔고, 살아 있는 자는 휘말리지 않게 용을 타고 하늘로 몸을 피했다.
세상이 부서질 듯 두려운 진동이 이어졌다. 살아 있는 자들은 정말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한참 후,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엔지의 귀에 이우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났다.”
그 짧은 한마디가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두려움에 떨던 엔지는 용기 내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카르도 루벨의 성이 차츰 무너지고 있었다. 왕이 죽었다는 의미였다.
엔지는 아버지의 성이 무너지는 걸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자기도 모르는 새 눈물이 뺨을 적시고 있었다.
결국 그의 아버지는 두 번의 죽음을 맞이하며 소멸되었다.
그 사실을 차마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던 엔지는, 서둘러 눈물을 닦고 마지막으로 기원했다.
비록 투쟁으로 얼룩진 삶이었지만, 그러기 위해 스스로의 이름마저 버렸지만.
그럼에도 당신의 이름엔 축복이 가득했음을, 부디 기억하길.
소년은 눈을 감고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