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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6화 (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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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으로 내려가서 저 위치로 정원을 돌아가려면 10분은 걸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당장 저 얼굴천재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싶다.

“잠시만요.”

“로제, 뭐하시는...?!”

나는 마치 고층 소방훈련을 하듯이 창틀에 매달렸다. 여기 1층이 층고가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에 2층에서는 무리 없이 너끈히 바닥에 착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매달린 탓에 머리 뒤에서 약혼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제, 제가 받아드리겠...”

“읏차!”

나는 가볍게 정원으로 착지했다. 마침 밑이 잔디라서 아주 푹신푹신 안정적이었다.

무릎에 흙도 안 묻었고 신발도 멀쩡하군. 아주 괜찮은 착지였다. 코를 쓱 매만졌다.

“...병약같은......”

“네?”

“말하셨던 대로 병약하지 않고 무척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로제.”

뒤를 돌아보자 입 꼬리를 올리고 있는 약혼자의 얼굴이 보였다. 워후, 가까이서 보니까 더 존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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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진후의 정원 산책도 나름의 고즈넉한 맛이 있구나. 아마 혼자라면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얼굴 구경하느라 바쁘다.

은은한 역광이 비추는 약혼자의 옆모습은 모난 곳 없이 각이 잘 잡힌 데다 입술과 속눈썹의 곡선이 어우러져있었다. 보통 역광에는 얼굴 윤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다가 이목구비가 그림자로 뭉개져서 웃길 수도 있는데, 이 얼굴은 지나친 잘생김에 기가 차서 웃겼다.

당장 200mm짜리 백통을 끼고 4k지원되는 바디를 구매해 세로 풀 샷으로 직캠을 찍어서 얼굴만 클로즈업한 버전하고 같이 저장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이긴 하다. 지난번에 대충 잡지하고 카탈로그를 보니 지금 산업수준이 카메라가 나와준 게 고마운 정도다.

아니 이젠 돈이 있는데 왜 사지를 못하니... 그래도 초창기 필름카메라 비슷한 건 봤으니까 반드시 구매해서 찍고 말테다. 혹시 흑백이면 내가 색도 입혀야지.

부족한 장비는 어떻게 덕력으로 때우면 되는 것이다!

“세상이 고요하군요.”

“그러게요.”

하지만 그쪽 얼굴이 고요하지 않은데요. 꽹가리치며 '이게 바로 내 얼굴이다'라고 외치는 수준입니다 선생님!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참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빛이 없어도 운치 있군요.”

“넵. 그렇군요.”

아, 그러고 보니 정원사 만나보기로 한 걸 잊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약혼자 입에서 그 화제가 나왔다.

“제가 어제, 이 정원이 이토록 아름다운 이유를 궁금해 했었지요.”

“...그랬죠?”

설마 하루 만에 내가 그걸 알아내 왔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아무리 얼굴이 이뻐도 익절 각이다. 다행히 그 얘기는 아니었다. 약혼자는 미소 지었다.

“제 생각을 한 번 말씀드려보고 싶습니다.”

“이 정원이 특별히 아름다운 이유에 대해서요?”

“예.”

약혼자는 왼쪽 장미나무에 손을 뻗었다. 그 장갑 낀 손가락은 큼직한 장미꽃송이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자리가 좋아서가 아닐까요?”

“자리요?”

“네. 이 땅 아래 어딘가가 넝쿨을 살찌우고 장미송이를 도톰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가설 말입니다.”

허허. 생각보다 약혼자가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성격인가 보구나. 나는 어디 계속 말해보라는 뜻에서 흐뭇하게 고개를 끄떡였지만, 약혼자는 갑작스레 화제를 바꿨다.

여전히 장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한다.

“이 저택에서의 삶은 즐거우신가요?”

말도 마세요. 개꿀입니다.

“네... 편하고 윤택한 환경도 좋고 다 좋네요.”

어제 오늘은 약간 쪽팔렸긴 했지만 견딜 만 했다! 아무렴 조별과제 발표자가 당일 잠수를 타서 요약대본만 들고 단상 위에 올라간 것보다야 나았지.

참고로 그 강의는 300명이 수강하고 있었고 나는 상상 이상으로 폭망했다. 그런 적도 있는데, 이 정도야 뭐.

“윤택한 환경이라는 것은 금전을 기반으로 한 말씀일까요?”

“...그렇죠?”

왜 당연한 걸 묻고 그러시는지...?

약혼자는 갑자기 장미에서 시선을 돌려 내 눈을 바라보았다. 크윽. 더 어두워져서 너무 아쉽군.

“저는 어릴 때부터 이 금전이라는 것에 불안을 느꼈습니다. 이 세상 무엇과도 환산 가능한 이 거대한 가치는, 절대 종속되지 않고 영속성이 보장되지 않더군요.”

원래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죠. 절 보세요. 거지였는데 갑자기 금수저 백수가 됐죠, 크으.

“로제. 당신은 그런 생각해본 적 없습니까? 지금 이 저택에서의 풍요가 당장 5년 뒤에라도 혹여 어떤 종국을 맞게 될지...”

약혼자는 몹시 진지했다. 그래서 나도 진실하고 솔직한 답을 해주기로 했다.

“음... 그건,”

“그건?”

약혼자의 되묻는 목소리가 커졌다. 나는 진중하게 대답했다.

“5년 후에 제가 알아서 하지 않을까요?”

일명 '미래의 나야 잘 부탁해!(찡긋)' 방법이다. 모든 시험기간과 주말 밤에 통용된다.

“......”

“......?”

“그렇, 그렇군요.”

약혼자는 대답을 더듬었다. 이 시대 사람에게는 너무 진보적인 방법이었나 보다.

이후 산책은 고요 속에서 천천히 진행됐으며, 약혼자는 별 말이 없었다. 아마 내가 한 대답을 깊이 생각해보고 있나보다.

점점 날이 어둑해져서 산책을 하기 힘든 수준이 되자, 우리는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 의외로 일하는 분들도 없다. 아마 다들 저녁식사를 준비하거나 드시러 가셨나보다.

약혼자는 나를 2층으로 배웅해 주었다.

“내일, 떠나기 전에 꼭 아침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요, 그래.”

“그럼 떠나기 전에 사용인에게 말을 전해두겠습니다.”

나야 좋지.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밝은 곳에서 보니 더 좋은 얼굴..., 아니 약혼자와 작별인사를 했다.

아, 그러고 보니 곧 저녁 식사인데 같이 하자고 해볼까? 하지만 의외로 약혼자는 거절했다.

“급히 처리해야할 일이 생겨서 오늘 저녁은 책상에서 서류와 함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급하면 돌아갈 법도 한데 굳이 이 집에 머물겠다는 게 대단하다. 정말 대단한 인성이야. 게다가 거절하면서도 또 예쁜 말을 덧붙였다.

“다음에도 꼭 초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때는 식사자리에 꼭 참석하겠습니다.”

“그럴게요.”

나는 일하면서 먹더라도 많이 골고루 먹으라고 덕담했고, 약혼자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져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좋은 산책이었다. 마치 미연시에서 이벤트 스케줄 하나를 끝낸 것 같군. 이제 카탈로그에서 살 카메라를 고르자.

내가 그렇게 카탈로그를 심여를 기울여 뒤적인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에,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저녁? 저녁 먹으라고 부르는 건가?

“저녁식사 시간입니다, 아가씨.”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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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오늘도 즐거운 하루였나요?’라는 어머니 전매특허 저녁 식사 멘트가 나와야할 타이밍인데.

“로제. 식전 약을 반드시 복용해야 해요.”

대신 다른 말이 나왔다. 음, 충분히 이해 가능한 상황이다. 하지만 약을 먹기는 좀. 나는 일하는 분이 물이 담긴 유리잔과 함께 서빙해준 검은 알약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어머니를 슬쩍 보자 내가 먹는 걸 꼭 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보고 있었고, 이 몸의 언니(추정)도 의외로 굳은 표정으로 내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 그 시선들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약과 물잔을 집어 들었다.

“잘했어요, 로제. 이제 식사를 시작해요.”

내가 빈손과 빈 물잔을 보여주며 테이블에 내려놓자 어머니는 안도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저녁식사가 차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몸의 언니는 여전히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눈을 부릅 뜬 채 입을 벌리고 있는 걸 보니, 아마 봐버렸나 보구나.

그래, 실은 먹는 척 옷 속에 굴려 넣었다! 정상인 사람이 먹으면 어떻게 될 줄 알고 정신과 약을 복용하겠는가! 다른 선택지가 없다!

하지만 의외로 당장 어머니한테 말할 것 같던 언니는 고개를 숙이더니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 병이 더 악화되길 바라는 건가...? 에이, 그런 섬뜩한 심리는 아니었겠지.

나는 그렇게 극도로 찜찜한 기분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물론 15분 뒤 서빙된 미디엄 굽기의 안심 스테이크에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긴 했다. 소고기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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