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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거짓말처럼 오늘 저녁식사는 나 혼자 하게 됐다.
“......실화냐?”
집사인 퍼킨스 부인(나이 지긋한 여성 분이셨다...... 아버지의 배다른 형제 가설은 우선 폐기하자.)이 전하기로는, 양어머니는 언제 돌아오실 수 있을지 아직 기약도 없다고 한다. 워낙 사업상 급하고 중대한 사안이라는 것 같다. 당연히 저녁식사에는 불참.
그리고 이복 오빠는 식사 직전에 식욕이 없다는 이유로 그냥 거절했다고 한다. 허허, 그럼 평소에는 퍽이나 식욕이 있어서 샐러드나 깨작거리다 돌아갔던 거겠어, 응? 사실 지금 나한테 질문폭격을 받을 걸 예상하고 미리 회피한 거 아니야 이거?
아무튼 그래서 넓은 식탁에 나 혼자 덩그러니 앉아 음식을 서빙 받는 중이다. 상당히 민망했다. 이복 오빠는 불참할 거면 차라리 좀 빨리 알려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나는 투덜거리며 음식을 앞에 두고 침을 삼켰다.
오늘의 메인 요리는 이름 모를 작은 가금류를 통째로 오븐에 구워낸 따끈따끈한 통구이였다. 잘 구워진 바삭한 겉면이 샹들리에 불빛에 거의 황금빛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리고 곁들이는 음식으로 잘 구워진 사과와 버터, 꿀이 준비되었다. 그 농후한 향들이 섞여서 코끝을 찌르자 침이 줄줄 흘렀다.
나는 그저 식기를 손에 들지 않기 위해 온 힘을 썼다. 이건 완전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독살의 위험이 사라질 때까지만 참자, 참아보는 거야!
그래서 그 힘겨운 싸움의 끝에 받게 된 보상이 빈약한 샌드위치라는 것을 알게 되자, 짜게 식은 눈으로 약혼자를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로제? 시장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놈은 아직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야, 니가 주인공이고 내가 공략캐릭터였으면 넌 여기서 호감도가 떡락하는 판이었어, 알아? 남주 후보였으면 주식이 종이쪼가리 되는 것도 순식간이고 말이야. 응?
나는 든 것도 별로 없는 디저트용 샌드위치 조각을 흔들어 보이며 약혼자에게 외칠 뻔 했다. 기왕 사오는 거 좀 더 맛있거나 볼륨 있는 건 안 됐겠니? 돈 때문이냐? 그럼 내가 줄 테니까 당장 이 도시에서 가장 맛있는 걸 웃돈 주고 가져오란 말이다, 어?!
...물론 기껏 사와 준 사람에게 그런 폭언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몹시 침착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그러게요. 몹시 시장하군요. 잘 먹을 게요.”
“예. 천천히 드시고......”
우걱우걱. 나는 두 입 만에 샌드위치를 끝냈다. 손을 털며 고개를 들자마자 본 약혼자는 말문이 막힌 표정이다. 금방이라도 동공지진이 일어날 것 같다. 음, 이런 상황에서는 저 미친 얼굴도 큰 소용이 없군. 감흥이 덜해.
그나마 플러스는 뻗은 손에 내게 주려던 건지 찻잔이 들려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찻잔을 가져와 원샷했다. 캬, 이 몸은 목구멍도 튼튼한 것 같다. 뜨거워도 멀쩡하네. 역시 병약은 컨셉이군!
“잘 먹었습니다.”
“예......”
“혹시 소식하시는 편인가요?”
약혼자는 내 질문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약간 날카로운 어투로 내게 대꾸했다.
“크게 먹는 것을 가리지 않고, 신경 쓰지도 않는 편이긴 합니다. 왜 그러십니까?”
“그렇군요.”
나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몹시 대식가이며 먹는 것에 엄청나게 신경을 씁니다.”
“......”
“사는 이유에 먹는 것이 한 3할은 차지하는 것 같아요.”
“예......”
“아니, 4할 정도,”
“......”
“음, 4할 5푼?”
약혼자는 이후 대꾸가 없었다. 나는 구차하게 더 말을 덧붙여 그에게 압박을 주지 않기로 했다. 그저 약혼자가 내 말을 깊이 숙고하고 다음부터는 맛있는 것을 사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참 마음 넓은 대장부의 기세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배고파.”
나는 퀭한 눈으로 침대 속에서 중얼거렸다. 어찌나 이 몸이 잘 먹고 잘 살았는지, 한 끼 대충 먹었다고 꼬르륵 소리가 자기주장 한 번 요란하다. 크윽, 딱 야식이 땡기는 타이밍이다.
하지만 무슨 수로 야식을 먹는단 말인가? 독이 들었을까봐 경계되는 건 둘째 치고 이 야밤에 밥 달라고 일하는 분을 부른다는 것 자체가....
“헛, 그렇지!”
내가 직접 부엌으로 가면 되잖아? 나는 오른손을 불끈 쥐었다. 이번 기회에 부엌에 루트를 좀 뚫어두면 좋잖아. 운 좋으면 독 관련 증거를 발견하는 전개가 있을 지도!
나는 슬그머니 침대에서 일어났다.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 아직 컴퓨터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 할 SNS도 없는 사람들은 다들 일찍 잠자리에 드는 건지 저택이 조용했다.
자, 그럼 생각해보자.
지난번 저녁 식사가 끝나고 트레이가 이동하던 위치를 볼 때, 부엌은 식당에서 약간 떨어진 외곽에 있다. 아마 식재료와 음식물쓰레기가 밖으로 편하게 왔다갔다하기 위해 뒷문이 있겠지. 아마 이 저택을 빙 둘러싼 정원은 그쪽과도 연결이 되어있을 테니, 그렇게 가는 게 가장 눈에 덜 띄면서 은밀히 다녀오는 방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나는 화장대에 놓여있던 가스랜턴을 챙겨서, 우선 조심스럽게 창밖으로 떨어트렸다. 다행히 소리 없이 폭삭한 곳에 무사 착지했다. 그리고 약혼자와의 지난번 정원에서의 만남처럼 창틀에 매달려 정원 아래로 살짝 뛰어내렸다.
한 번 해봤던 거라 그런지, 랜턴불빛이 비추는 가운데 오히려 지난번보다 안정적으로 착지할 수 있었다.
자, 이대로 정원으로 돌아가서 부엌 뒷문을 공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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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은 확실히 병약하지는 않다. 하지만 한 가지 노답인 부분이 있다.
바로 방향치라는 것이다.
“여기가 어디여......”
나는 허탈한 심정으로 분수대에 주저앉았다. 다행히 랜턴 불빛이 충분히 밝은데다가 요 며칠 맨날 걸어 다닌 탓에 워낙 익숙해서 무섭지는 않았지만, 이 넓은 정원에서 길을 잃어버린 상황자체가 너무 난처했다. 일단 어두워서 어느 쪽이 저택인지도 잘 모르겠거든.
잘못하다간 여기서 날밤 새게 생겼다. 와, 어쩌지?
그때 근처에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흥얼거리는 소리와 잎사귀들이 쓸리는 소리가 섞여 경쾌하기까지 하다. 와, 일하는 분들 중에 누가 밤 산책 중인가 보다! 나는 화색이 돼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장미넝쿨이 우거진 담을 돌아갔을 때, 나는 예상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어?”
웬 사람이 장미넝쿨을 다듬고 있었다. 나처럼 가스랜턴 같은 빛나는 휴대용 전등을 하나 매달아 놓고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상한 잎사귀 같은 것들을 잘라내고 있다. 입고 있는 작업복과 작업용 장갑이 모양은 조금 달랐지만, 저택에서 일하는 분들과 비슷한 유니폼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때야 나는 깨달았다. 정원사 분인가 보다!
지금 일하고 계시니 그 때 아무리 뒤져도 못 만났던 거였구나! 그런데 왜 이 야밤에 일을 하고 계신 걸까?
헉, 설마 정원을 즐기는 고용주들하고 마주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지금 작업하고 계신 걸까? 지금 시대적으로 노동인권 같은 게 현대만큼 대두되지는 않을 것 같으니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저런.
나는 안타까운 감정에 슬그머니 그쪽으로 다가갔다. 격려도 할 겸, 괜찮다면 낮에 근무하도록 시간을 조정해보자고 말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가갈수록, 의외의 사실을 발견하고 발걸음이 느려졌다.
아니, 얘 어리잖아. 나는 완연한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는 정원사를 보고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미성년자가 혼자 야외에서 야간 근무라니...... 이거 인륜적으로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저, 저기.”
결국 굉장히 당당하지 못한 목소리로 정원사 소년에게 말을 걸게 됐다. 소년은 마치 내 목소리를 듣지 못 한 것처럼 잠시 작업을 계속했지만, 곧 불빛을 보고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마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모자 때문에 코 위로는 그림자가 져서 보이지 않았지만, 소년 입은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베르 아가씨시네요. 안녕하세요.”
“그, 그래, 안녕.”
하마터면 ‘저 아세요?’라고 말할 뻔했다. 자기가 관리하는 정원의 저택에 사는 사람인데 아마 인상착의정도는 알고 있었겠지 뭐. 아니면 나는 모르지만 예전에 안면이 있던 걸지도 몰랐다.
아무튼 간에, 정원사는 막 정리를 마친 넝쿨에 달린 동그란 장미송이 하나를 다정한 손길로 톡 건들며 내게 물었다.
“이 한 밤 중에 정원에는 무슨 일이 신가요? 다른 사람들이 말리지는 않았나요?”
“하하, 사실 그냥 조용히 혼자 나온 거라서, 아마 모를 것 같아.”
잠깐, 설마 이 소년이 정원사로 위장한 암살자고 내가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 내 행방을 모른다고 했기 때문에 암살을 시도하는 전개......는 당연히 무리수고 일어나지 않는군. 소년은 단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렇구나. 정원에 볼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여기서 부엌 찾으러 가려다 길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산통 다 깨겠지? 대신 여기 정원관리 노하우나 좀 알아보자. 내가 너의 기쁨을 위해 이 정도까지 하고 있다 얼굴천재 약혼자야. 다음에는 진수성찬을 사와야 할 것이다.
“그냥, 장미도 볼 겸해서. 여기 장미가 특별히 아름답잖아. 아, 혹시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 거야?”
“비결이요?”
소년이 내 쪽을 돌아봤다.
“있지요. 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