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판 체험기? -->
약혼자와 응접실에 마주앉아있지만 내 마음은 여기 응접실이 아니라 시간과 정신의 방에 가있다.
그 방에서 지금까지 읽었던 온갖 로판의 줄거리를 끄집어내는 중이었다.
자 생각해보자. 최근 로판의 대표적인 스타일.
1번. 안 좋은 기억(과거든 회귀했든)을 가진 주인공이 갑자기 강하고 잘생긴 식구들의 우쭈쭈를 받으며 힐링하는 힐링물. 보통 어릴 때부터 내용이 시작된다.
이건 나이대도 안 맞고 우쭈쭈해주는 가족도 한 명뿐인데다가 독살시도를 당하고 있으니 패스다.
2번. 주변사람들이나 전 애인에게 홀대받거나 배신당하고 (역시 과거든 회귀했든) 정신적으로 환골탈태한 주인공이 사이다를 퍼 먹이며 뒤통수 때린 놈들이 후회하고 매달리게 만드는 짜릿한 복수물.
애초에 기억이 없어서 뒤통수 맞았는지도 모르는 판이다. 이것도 패스.
3번. 어느 날 회귀하거나 빙의한 주인공이 (그게 오해든 정말 망나니였든 간에) 원래는 사이가 안 좋던 주변사람들과 남주 후보들을 감기게 해서 주조연들 태도가 달라지고 주인공의 평판이 점점 상승하는 것을 보여주는 공략물.
역시 고르자면 이쪽 계열 같다. 여기서 좀 변형된 라인이라고 할까.
사이 안 좋은 이복 오빠와 트라우마 있는 양어머니, 날 독살하려는 하녀와 잘생겼지만 일 년에 한 달만 봐서 데면데면한 약혼자까지 완전 공략하라고 판을 깔아준 것 같은 느낌이다.
근데 문제는 내가 공략할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돈을 펑펑 쓰면서 부유하고 욜로한 삶을 살고 싶다. 내 평판이 어쨌든 간에 원래 몸 주인에게 민폐일 정도로 망할 수준만 아니면 된다는 뜻이다.
근데 오늘 독살시도를 겪은 걸 보니 이거 공략 안 하면 큰일 날 수도 있겠구나싶다. 주변인들의 호감도를 올리고 인연도를 쌓아놔야 내용이 정상 진행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하하...... 이거이거 어쩔 수 없구만. 그동안 쌓아온 K-장르문학 처돌이의 내공을 보여주는 수 밖에.
주조연들을 하나하나 공략하고 정석이벤트를 다 봐서 모든 음모와 갈등을 풀어주고, 이 집에 웃음꽃이 피어나고 이 몸이 사랑받게 해주마!!!
...물론 안 되면 언제든지 금붙이를 싸들고 야반도주할 마음이 넉넉히 있다.
“로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습니까?”
우선 첫 타자는 너다, 얼굴천재 약혼자.
“아, 죄송해요.”
약혼자는 아까부터 말이 없는 내가 걱정되는지 신경 쓰는 눈치다. 자, 여기서 분기가 갈리는 군!
독살시도를 이야기할까, 말까?
음, 이 문제는 호감도고 나발이고 일단 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니 가감 없이 말해놓자.
“사실, 주신 티스푼이 변색됐습니다.”
“그럴 수가!”
“정말이에요. 여기......”
나는 주머니에 넣어뒀던 티스푼을 꺼냈다. 티스푼 아랫부분이 여전히 시커멓다. 약혼자는 진지한 태도로 내가 내민 티스푼을 받아들더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어디서 변색된 겁니까?”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실수로 남은 약을 떨어트렸더니 색이 변하더라구요. 아마 찻물과 약이 함께 닿으면 독으로 변하는 것 같아요.”
“용의주도하군요.”
약혼자가 턱을 괴더니 표정 없이 티스푼을 응시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로제 양의 일신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이득을 보는 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음.......”
당연히 유산분배 문제가 걸린 이복오빠죠! 그리고 용의자 넘버원인 선셋이 걔를 좋아하는 것 같다니까요! 이거 심증만은 아주 오집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단 기억이 없어서 다른 범인 후보들을 놓치고 있는 걸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혹시 아니면 뒷감당이 안 되기 때문에 여기선 오히려 약혼자의 생각을 떠보도록 합시다.
“그건 사실 잘 모르겠는데요. 기억이 완벽하지 않다보니까 모든 게 확실하지가 않아요. 혹시 무어 경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 생각 말입니까.”
약혼자는 몹시 신중히 생각하듯, 눈을 내리깔고 상념에 잠겼다. 와, 무슨 화보컷 보는 것 같다. 독살 이야기하면서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수준의 미모다.
“......우선, 마담 자우어에게 로제의 부친이신 오베르 경으로부터의 상속권은 없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군요.”
“...예?”
예고도 없이 양어머니가 돌아가신 이 몸 친아버지의 재산을 못 받는다는 썰이 나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야기가 세 단계쯤 뛰어넘은 것 같은데 착각인가?!
다행히 약혼자의 대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부가설명이 줄줄 이어진다.
“결혼식 전에 부친께서 돌아가셨다보니, 정식으로 부부가 되시지 않아 두 분의 성도 여전히 다르시죠.”
......‘자우어’라는 게 양어머니의 이름이 아니라 성이었나 보다. 그럼 진짜네. 이 몸은 성이 오베르인데, 양어머니와 성이 다르다! 맙소사, 법적으로 재혼이 완료된 게 아니었나?
새롭게 밝혀지는 비밀에 나는 그저 입을 벌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와중에도 약혼자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제가 알기로는 유언장의 내용을 폭넓게 해석해 로제 양께서 성인이 될 때까지 마담께서 이 저택과 자산을 관리 중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만일 로제 양께서 법적 성인이 되신다면, 정당한 상속권자로서 마담과 그 딸을 이 저택에서 쫒아낼 수도 있을 겁니다.”
“그, 그렇죠.”
처음 알았습니다.
“네. 그리고 독살시도가 있었던 오늘, 공교롭게도 마담께선 자리를 비우셨군요.”
“어...... 그렇지요?”
그거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인데요? 나는 약혼자의 말이 내포하는 의미를 상상하며 동공지진했다. 약혼자는 심통한 표정이었다.
“저도 이런 의심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정황 상 고려할 것은 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 물론 어떤 심성 나쁜 사용인의 단독 범행이나 독을 위장한 장난일 수도 있습니다. 단지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군요.”
약혼자는 돌연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빼내어 내 손등 위에 덮었다. 장갑의 매끈한 촉감이 느껴졌다. 헉, 갑작스러운 스킨십! 걱정에서 나오는 감정적 변화인가!
“로제, 괜찮으시다면 제가 앞으로 식사는 따로 봐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모르니까요.”
갑자기 내 머릿속에 선택지가 떠오른다. 그 동안의 플레이한 미연시와 장르소설 다독에 따라 구성된 것 같다.
A. 승낙한다. (약혼자 호감도 + 15, ‘이 집안의 비밀’ 루트 닫힘‘)
B. 거절한다. (‘이 집안의 비밀’ 루트 열림, 독살 이벤트 발생 가능성 증가)
흠, 이 경우에는 이런 선택이 좋을 것이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약혼자의 표정이 환해진다.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근데 괜히 의심하는 것 같아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요, 혹시 몰래 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다. 게임에서 보통 한 3회차부터 나오고, 루프물 로판이라면 한 5회차부터 생각해내는 선택지지. 둘 모두의 이득만 취한다!
“......예.”
약혼자가 잠시 뜸을 두고 대답했다. 너무 지혜로운 대답이라 놀랐나보다. 하하, 이걸로 또 호감도가 늘었겠군. 약혼자 공략은 금방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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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자는 괜찮은 식당을 섭외하고 오겠다며 외출했다. 그리고 나는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맹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양어머니와 이복오빠는 상속권이 없고, 이 몸이 성인이 되면 둘 다 쫒아낼 수 있다.’라...... 와, 이건 너무 전형적이라서 보자마자 ‘이 놈들이 날 죽이려는 범인이에요!’라고 말할만한 설정이다.
오히려 그래서 아닐 것 같다는 말이지. 요새 드라마에서도 이렇게 너무 뻔한 설정은 또 답이 아니다. 여기서 한 번 비틀어서 ‘사실은 둘이 아니라 집사 누구누구가 범인이다! 그는 로제의 친부인 오베르경의 배다른 형제!’ 뭐 이런 전개가 요즘 더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흠, 어렵군. 나는 양어머니와 이복오빠를 번갈아 떠올리다가, 문득 엄청나게 까칠한 이복오빠의 태도가 떠올랐다.
이걸 새침데기로 봐야하는가, 아니면 정말 악감정이 있는 걸로 여겨야하는가? 만약에 전자면 여장취미부터해서 이쪽도 설정과다군.
혹시 서브남? 서브남 각인가?
“...거참.”
아니겠지. 설마. 나는 손 사레를 쳤다. 그쪽은 너무 호리호리해서 내 취향도 아니다.
근데 이복 오빠는 원래 남자인 걸 다들 아는 상태로 여장을 하고 있던 걸까, 아니면 완전히 숨기고 여자로 살고 있던 걸까?
어느 쪽이든 무서운 집념이다. 게다가 지난 일주일 간 저녁식사 시간에 어머니가 동요도 없던 점을 보아 이미 완전히 정착된 생활이라는 건데... 나는 어느 쪽이어도 생각보다 하드코어한 취미생활에 식은땀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이, 설마 내가 이 몸에 들어온 일주일 간 빡세게 즐기던 거고 그 전에는 왔다갔다 했겠지?
아냐, 그러고 보니 약혼자가 이복 오빠를 보고 큰 따님이 어쩌구 했어. 대외적으로 진짜 성별을 숨기고 있다는 쪽이 더 가능성 있다. 그럼 혹시 취미가 아니라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이럴 때는 이복 오빠에게 남다른 감정이 있는 것 같은(추측) 선셋을 불러 속을 떠볼 겸 슬쩍 물어보자.
보통 로판에서 ‘주인공을 죽이려했지만 끝까지 망설임을 보였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회유가 가능하다! 그래서 무섭긴 하지만 한 번 정도는 공략을 시도해보는 게 후회가 안 남을 것이다.
선셋은 놀라울 만큼 빠르게 내 호출에 답했다. 나는 차를 부탁하는 척 하며, 각종 화제를 돌리다가 은근히 물어보았다.
“우리 또래가 이 저택에 별로 없어서 물어보는 건데, 선셋이 보기에는 나랑 그... 이복 언니랑 사이가 어떤 것 같았어?”
“......의붓자매이신 제릴 자우어님을 지칭하시는 것이지요?”
헉, 그렇구나.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이복 언니면 이 몸의 친아버지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말이잖아. 그냥 피가 안 섞이고 법적으로만 남매인 게 정황상 맞고 내 정신건강에도 좋다. 나는 식겁해서 대답했다.
“마, 말이 잘 못 나왔어. 맞아. 제릴... 언니.”
의붓 오빠의 이름은 제릴이구나. 그럼 본명은 제랄드쯤 되려나? 아무튼 정말 피 안 섞인 거면 서브남 각이 더 또렷해지는데?
내가 머릿속의 좋지 않은 추측을 잠재우고 있을 때, 선셋은 따르던 차를 멈추더니 잠시 고민 후 말을 이었다.
“사용인으로서 함부로 말씀드리기 어려운 주제입니다만......, 두 분은 서로 나쁜 사이는 아니신 걸로 보였습니다.”
“그, 그래.”
“예. 단지 상황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겠지요.”
나는 선셋이 그 말을 하며 기분 나빠하거나 좋아하는 기색이 있나 열심히 살펴봤지만, 선셋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미치겠다. 서로 술이라도 한 바탕 마시고 싶은 심정이다.
결국 가시적 성과도 없이 선셋이 도로 나간다음, 나는 손도 대지 않은 다기들을 피해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이 몸의 양어머니, 빨리 돌아와요! 물어볼게 너무 많아!
※※※
근무수칙
7.월요일 오전 9시에는 마담 자우어에게 아침인사를 하기 위해 현관에서 대기해야합니다.
8.아침인사 중에 마담 자우어과 눈을 마주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