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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히는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목소리를 큼큼 다듬은 다음에 최대한 부드럽게 문 안쪽의 사람을 불렀다.
“저기? 다 수습 됐어?”
“......”
대답은 없었다. 아직 일하는 분들이 나오지 않아 복도는 다행히 적막했다. 괜히 한 번 두리번거려본 나는 문을 슬쩍 두드렸다. 똑. 똑똑 똑똑똑.
“나랑 대화 좀 해줄래?”
하마터면 ‘나랑 눈사람 만들래?’라고 말할 뻔 했다.
이번에는 반응이 돌아왔다.
“...꺼져.”
한 풀 누그러든 목소리였다. 다시 들어보니 확실히 여자치고는 목소리가 낮구나. 설마 그래서 저녁식사에서도 말을 거의 안 한 건가? 아무튼 나는 다시 한 번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물어볼 게 있어서 왔는데, 그것만 물어보고 얼른 갈게.”
“......”
침묵은 긍정이겠지?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복오빠(추정)는 아까 넘어져있던 커다란 원목의자를 도로 세워서 거기 앉아있었다. 어디서 공수해 온 건지 화려한 무늬의 담요를 몸에 두르고 있는데...... 아, 자세히 보니 저거 카펫 같은데?
“어머니 찾으러 왔는데 혹시 어디 계시는 지 알아? 여기 계실 거라고 들었는데.”
이복오빠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새벽에 급한 출장 때문에 나가셨어.”
“그, 그래?”
정말 열심히 일하시나보다...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손에 쥔 카탈로그를 부채처럼 사용했다.
“아니... 뭐 좀 사려고 물어보려고 했지.”
“어차피 니가 뭘 사던 어머니께선 그러라고 할 텐데 뭐가 문제지?”
왠지 아까부터 이 악물고 내 말에 대답하는 것 같은 건 착각인가?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자면 나도 왜 새벽부터 남의 서재에 들어와 있는 건지 추궁할 수 있다!
하지만 우선 한 번은 참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취향이 들킨 탓에 몹시 당황한 탓일 거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해주자.
“사실 사려는 게 사진기라서. 한 번 여쭤보고 구매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랬지.”
“사진기......?”
아무래도 이 사진기 미신이 제법 핫했던 게 분명하다. 이복오빠의 표정에도 의미심장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소년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내게 되물었다.
“왜, 왜 사려고 하는데?”
남의 여장취미도 봤는데 이 정도는 말해주는 게 예의겠지? 나는 흔쾌히 진실을 말해줬다!
“어. 약혼자 사진 좀 찍으려고.”
“뭐?”
하지만 상대의 반응으로 봐서는 왠지 이쯤 또 시비를 걸 것 같군. 안 되겠다, 빠르게 철수하자!
나는 목소리가 다시 커진 이복오빠에게 보험약관 광고가 마지막에 불리한 점을 랩하듯이 빠르고 사무적인 목소리로 줄줄 마무리 인사말을 읊었다.
“아무튼 나는 오늘 본 건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것이며 개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앞으로도 우리 모두 즐거운 취미생활을 즐기며 서로에게 의미 없는 비방은 하지 말자. 그럼 이만!”
“잠깐, 기다려! 너 약혼자......”
나는 빠른 손놀림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경보로 내 방으로 돌아갔다. 휴우, 오늘 아침에는 무조건 단 걸 먹어서 당황한 내 마음을 달래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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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짐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차를 주문했다.
“꿀을 많이 가져다 줘.”
아주 있는 데로 몽땅 쓸어와 줬으면 좋겠군. 내 진지한 태도에 선셋도 진지하게 대답해줬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거의 배불뚝이 노란 곰의 꿀단지만큼 커다란 꿀통이 다기와 함께 배달되었다. 선셋이 차를 타서 내 앞에 놓아주었다. 나는 꿀통에서 꿀을 듬뿍 떠올려 그 안에 넣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약혼자가 준 티스푼이 바로 이 테이블 보관함에 있지. 나는 보관함에서 그 티스푼을 꺼냈다. 여전히 은빛으로 빛나는 섬세한 물건이었다. 조심스럽게 티스푼을 찻잔에 넣고, 차에 넣은 꿀이 잘 섞도록 휘저었다. 음, 좋은 굿즈 개시였다.
그리고 잠시 차가 식을 때까지 기다린 뒤, 무슨 술 마신 다음날 아침에 꿀물을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근심걱정이 가시는 단맛이었다. 크으, 역시 먹는 게 최고야.
“드시는데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응. 좋았어.”
사실 꿀을 너무 타서 그냥 차향만 나는 꿀물 맛이었지만 아마 다기를 정리하느라 못 본 모양이었다. 선셋은 내가 다 마신 다기를 유심히 보더니, 정리하려는 듯 제스처를 취했다. 응? 너무 빠른데?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더 마시려고 하니까, 다 마시고 나면 부를게.”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당수치를 걱정해주는 건가? 운동도 안 하면서 과당을 너무 섭취한다는 건가? 나는 조금 민망한 기분으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끝까지 머뭇거리던 선셋은 곧 방을 나갔다.
...많이는 말고 한 잔만 더 마시도록 하자. 나는 아직 티팟 가득 남은 찻물을 차에 따르고 아까보다는 좀 자제해서 꿀을 적당량 넣었다. 이제 식을 때까지 좀 기다려볼까.
“그 김에 이것도 처리하자.”
나는 아침식사 때도 나온 예의 그 검은 알약을 슥 꺼냈다. 이번에는 옷소매에 숨겼는데 아주 성공적이었다. 어떤 일하는 분도 못 알아차리셨다는 데에 곧 내가 주문할 사진기도 걸 수 있다.
자, 그럼 이걸 어디다 버리면 잘 버렸다고..., 엇.
“헛.”
실수로 알약을 놓쳤다. 알약은 공교롭게도 식히고 있던 찻잔 안에 퐁당 떨어졌다. 찻물 위로 알약이 풀리며 뽀르르 기포가 올라왔다.
아이고, 이건 버리고 다시 마셔야겠다. 어디다가 버려야하지? 그래! 화장실에 버리자. 하는 김에 어제 저녁에 남은 알약도 같이 버리면 되겠군.
좋은 생각이라고 자화자찬하면서 찻잔을 얼른 들어올렸다. 아직 잔에 열기가 강해서 살짝 손을 떨자, 안에 있던 찻물이 흔들리며 스푼도 같이 흔들린다.
그리고 보고야 만 것이다,
찻물과 닿은 부분이 거멓게 변색된 티스푼을.
“히이이익.”
들던 찻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머릿속이 핑글핑글 돈다.
자, 잠깐. 생각해보자. 이거... 은인가?
은빛으로 빛나고 섬세한 세공이 되어있는 금수저 선물용 티스푼이라면 당연히 은이겠지?
그럼 독 때문에 변색된 건가?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맘 편한 날백수 금수저 라이프가 박살나는 추측에 나는 황급히 행복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어디 책에서 읽었는데 계란 노른자에도 은을 변색시키는 물질이 들어있댔어. 아마 약에 계란노른자가 들어갔을 거야!
...내가 말하긴 했지만 너무 행복회로를 돌리다 못해 회로가 탈 것 같은 추측인데?
이, 일단 다시 한 번 실험해보자.
나는 황급히 서랍 구석에 박아뒀던 다른 알약을 꺼냈다. 어제 저녁에 안 먹고 챙겨온 약이다. 조심스럽게 물에 개어서 은스푼의 아직 변색되지 않은 부분에 닿게 해보았다......
“...반응이 없다?”
설마 찻물 자체인가? 근데 아까 차만 휘저었을 때는 아무 반응 없었는데.
헉. 설마 두 개를 섞으면 독이 되는 건가?
나는 티팟에 남아있던 찻물을 저녁 알약을 물에 개어놓은 잔에 부어봤다.
은스푼이 더 변색되었다. 히익.
“도, 독살이다.”
이건 독살 각이야. 꼭 약을 복용한 직후 차를 마셔야 반응이 일어나는 이 용의주도함, 누군가 이 몸의 유산을 노리는 건가! 나는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 일단 일하는 분을 불러서 이걸 보여준 후 독살시도가 있었다고 말하고 대책을...
아니지. 이거 누가 가담하는지도 모르는 마당이다. 양어머니도 지금 여기 안 계시고, 사이 나쁘고 비협조적인 이복오빠만 있는 이 상황에선 막 일을 키우고 알리다간 자칫하면 증거인멸 각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증거가 인멸되고 범인들이 다들 입 싹 닦은 판에 양어머니가 이 보고를 받으면, 가뜩이나 전적(기억 오락가락함)이 있는 내가 드디어 피해망상까지 왔다고 의심해서 이번에야말로 요양원이라고 이름 붙은 정신병원행이 결정될 수도....
안 돼! 이건 혹시 이 몸 주인이 나중에 다시 돌아와도 수습이 안 돼!
치, 침착하게 생각해보자...... 역시 오늘 저녁에 돈 될 만한 걸 다 챙겨서 이 저택을 뜨는 게 답인가? 그건가?
전혀 침착하지 않은 계획을 세우며 나는 방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방을 도는 횟수가 스무 번이 넘었을 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선셋이다.
“아가씨?”
헉, 설마 죽었는지 확인하러 온 건가. 어쩐지 오늘 차 마시는 걸 유심히 보고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고 하더니 일말의 양심이 외치는 소리였냐고요.
우선 증거 보존! 나는 급한 대로 변색된 은스푼을 끄집어내 책상 안쪽 서랍에 던져 넣었다. 안 먹은 약을 넣어뒀던 그 장소다. 그리고 남은 찻물들은 얼른 화장실에 부어버렸다. 이 모든 일은 초인적인 빠르기로 5초 안에 일어났으며, 나는 그 후에야 목을 가다듬고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응. 왜?”
“......무어 경께서 아가씨께 만남을 청하십니다.”
맞아. 아직 약혼자가 저택에 있었지. 새벽부터 너무 스펙타클에서 잊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약혼자한테는 말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최소한 이 몸이 죽어도 특별히 이득 볼 게 없는 사람이잖아! 일단 인성이 괜찮아 보이니까 최악의 경우에 도망갈 때 마차라도 수배해주겠지.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서랍에 넣었던 은수저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그래.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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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응접실로 안내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현관으로 안내했다. 솔직히 날 어디 저택 으슥한 곳으로 안내해서 덤벼들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기야 그렇게 용의주도하게 독살을 시도한 사람이 그런 아마추어 같은 일을 하진 않겠지.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용의자 우선순위 첫 번째인 내 또래 소녀를 바라보았다.
굳이 본인이 원한이 있어서 죽이려는 게 아니라도, 사람이 여러 사정이 있으면 이런 무서울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 협박당하는 걸 수도 있고, 아니면 돈 문제일 수도 있고!
차라리 후자면 원만히 합의 볼 수도 있겠는데 혹시 전자면 나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어쩔지 모르겠다...... 이런 시발 이럴 줄 알았으면 정치외교학과로 갈 걸 왜 점수 맞춰서 노어노문학과를 갔던 걸까. 여긴 마더로씨아가 아예 없단 말이야!
내 속이 어떻든 간에 선셋은 나를 착실히 현관으로 안내했고, 거기서 나는 오늘 나를 환장하게 한 첫 번째 사람도 만나게 된다.
“너......”
“약혼자 보러온 거야. 오해 마.”
나는 이복오빠를 보고 빠르게 대답했다. 이복오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맨 차림으로 현관을 몰래 나가려던 것 같았다. 여장은 안 한 것 같은데, 너무 싸매서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한테 들킨 것이 몹시 당혹스러운 듯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헛, 잠깐. 혹시 내 독살을 사주하고 알리바이를 위해 황급히 저택을 나가고 있던 건가? 나는 의심가득한 눈으로 아래위로 그를 훑어보았다,
“로제.”
“어, 무어 경.”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적응 안 되게 놀라운 얼굴이 보였다. 이 판국에도 얼굴이 눈에 들어오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약혼자는 빙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제 일이 해결되어서, 한동안은 이 저택에 계속 머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
내 반응을 떨떠름함으로 해석했는지 약혼자는 속눈썹을 내리깔며 말을 덧붙였다.
“혹시 폐가 된다면 근처에 머물만한 곳을 매입하겠습니다.”
“아뇨, 저야 좋죠.”
크, 재력 봐라. 집 산다는 말이 턱 나오는 군.
아무튼 약혼자가 이 집에 계속 있어준다면 나야 좋다. 좀 더 실질적인 상의를 할 수 있겠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그리고 약혼자는 그 때야 이복오빠를 발견한 듯, 그쪽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그쪽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말을 붙였다.
“마담 자우어의 큰 따님이시군요. 제가 로제의 약혼자로 이렇게 따로 만나 뵙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이복오빠는 표정 없이 약혼자를 쳐다보더니, 대답도 없이 약혼자를 지나쳐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이런, 수줍음을 많이 타는 분인가 봅니다.”
“.......”
아니, 그냥 남자인 걸 안 들키려고 빨리 사라진 게 아닌 게 싶은데요... 외출은 포기한 건가.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복오빠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다 흠칫했다.
선셋이 히죽거리면서 이복오빠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 본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도 저렇게 크게 웃는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마치 사람이 달라진 것 같은 그 모습에 놀란 것도 잠시, 갑자기 나는 머릿속을 강타하는 어떤 큰 그림에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 선셋은 이복오빠를 좋아해서 저쪽에 유산을 몰아주려고 날 독살하려고 한 건가?!
와 미친, 설마 아니겠지. 이런 감정서사만 한 바가지인 극단적 이유가 답일 리가...... 자, 잠깐.
내가 여기 와서 경험한게 매번 이런 감정과잉 서사 아니야?
“허억.”
“.......로제?”
그렇다. 그때서야 나는 알아차렸던 것이다. 이 상황의 전말을!
돈도 많고 사연도 많은 한 부모 가정의 병약한 주인공, 온갖 인기설정이 다 붙은 얼굴천재 약혼자와 트라우마 있는 아름다운 계모에 사이나쁜 여장취미 이복오빠, 그리고 치정문제와 독살시도!
결정적으로 빙의까지!
그렇다. 내가 한 게 바로 빙의지, 빙의가 따로 있겠는가!?
이 사람의 말초신경을 찌르는 자극적인 맛! 욕하고 눈물 줄줄 흘리고 고구마를 처먹게 되더라도 곧 나올 사이다를 기대하며 다음편을 클릭하게 만드는 미친 설정과 전개의 냄새!
이건 K-로판이다!
난 로판에 들어온 것이다!
========== 작품 후기 ==========
드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