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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약속한 1차보고 시점은 내일이었는데 벌써 나왔다니, 혹시 날림으로 조사한 거 아냐? 나는 상대에게 보이지도 않을 눈을 게슴츠레 떴다.
“벌써요?”
“그럼요. 내가 좀 유능합니다.”
약간 으스대는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나온다. 아이고 그러세요. 일단 들어나 보자.
“우선 오베르 가문에 대한 총괄적인 근황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이 집안이 베른에 이주한지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잖습니까?”
“...그렇죠.”
사실 한 몇 백 년 묵은 이 지역 터줏대감 부자일줄 알았습니다. 아니 이 집 분위기 좀 봐요, 이 고 저택을 보면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듯.
“정확한 부동산 기록을 찾아보니 21년 전이었죠. 러셀 오베르 경이 만삭 아내와 함께 거대한 저택으로 이사하면서 유모 등 다양한 사용인들의 고용광고를 신문에 냈던 기록도 남아있었습니다.”
헐. 저 만삭 아내분이 임신한 아기가 설마...?
“그리고 이듬해 여자아이를 출산합니다. 이름은... 로제 오베르네요. 시기상 올해 말이면 성인이 되겠습니다.”
역시 이 몸이로구나!
와, 근데 기분 이상하다. 되게 남 일 듣는 것 같은데 지금은 일단 나네.
“안타깝게도 마담 오베르는 출산 후 사망했습니다. 원인은 정황 상 출산 후유증 같지만...... 주변 입단속을 잘 시켰는지 당시 아무도 언급을 안 했던 모양입니다. 남은 자료가 없군요.”
“예, 예.”
아이고, 바로 돌아가셨던 거구나. 괜히 의뢰를 해서 캐듣는 것 자체가 미안해진다. 이 몸의 어머님 부디 이해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 몸의 보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입니다......
“그 후로 러셀 오베르 경은 꽤 장기간 저택에 칩거한 것 같습니다. 그 저택에서 도로를 이용해 다른 곳으로 가려면 무조건 로만타운을 지나가야하는데, 그 후로 14년 간 타운에서의 목격기록이 끊겼습니다. 그리고......”
조사한 자료를 넘기는지 전화기너머로 팔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몇 초간 들렸다.
“네. 14년하고 반년쯤 지났을 때 갑자기 사회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원래 풍채가 괜찮고 인상이 좋았던 사람인데, 완전히 깡마르고 안광이 퀭해져 만난 사람들마다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요?”
으음. 감정기복이 심했다고 얼핏 들었던 것 같은데, 아마 저 기간 동안 우울증이 심해졌겠지. 그래도 이겨내 보시려고 노력하셨나보다. 끝이 안 좋았던 걸 알아서 그런지 코끝이 괜히 찡해지는군. 게다가 빙의 전 이 몸의 유년기도 좀 걱정된다.
“그렇죠. 주로 큰 학술세미나나 학자들이 자주 모이는 카페 같은 곳에서 목격담이 좀... 있었군요. 그리고 재혼하려고 했던 엠마 자우어도 이 과정에서 만났습니다.”
제가 맞춰보겠습니다. 고고학 세미나?
“꽤 규모가 큰 인류학 세미나였는데,”
아깝군! 그래도 괜찮은 추측이었다.
“그 당시 제법 내로라하는 저명한 양반부터 풋내기 학부생까지 다양한 인사가 많이 참석했었습니다. 그 중에 엠마 자우어도 있었던 거죠.”
“아, 고고학 권위자였나요?”
미련을 못 버리고 한 번 더 질문해봤다.
“흠? 확실히 학위는 있었지만...... 사실 그쪽도 그때 막 이 지역으로 이주한 것 같더군요. 아무래도 지역을 넘으면 어지간히 걸출한 인물이 아니고서야 소식이 끊겨서.”
조사에 시간과 돈이 더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잘 알겠습니다.
“네. 아무튼 그렇게 만난 둘은 굉장히 빠르게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첫 만남 이후 일주일 만에 엠마 자우어가 러셀 오베르 경의 대저택방향으로 함께 이동하는 걸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아하......”
불꽃같은...... 불꽃같은 새 사랑을 하셨나보다.
그래도 딸하고 미리 상의는 하셨겠지? 아무리 그래도 같이 사는 집에 미성년자 딸이 있는데 사춘기 감정을 쌩 무시하고 재혼상대를 데려오진 않았을 거라고 믿고 싶다.
근데 로판에서 이런 부모님 재혼과거가 있으면, 꼭 주인공 의견은 듣지도 않고 그냥 막 밀고나가다가 관계가 망해버렸다는 배경이 많아서 불안한데....... 이, 일단은 다음 내용을 들어보자.
“그리고 세달 만에 엠마 자우어는 자신의 어린 딸과 함께 대저택으로 아예 거처를 옮깁니다. 그때당시 임대차계약을 해지했던 기록을 찾았습니다.”
맙소사. 이거 괜찮은 건가. 점점 막장에 가까워지는 설명에 내가 다 식은땀이 난다. 아니 재혼도 안하고 미성년자 딸과 같이 사는 집에 애인가족과 같이 사는 이 내용...... 이거 연재되고 있었으면 아버지 욕으로 댓글창이 터져나갔을 것 같다.
“그, 그리고요?”
“그리고 다시 세달 후로 결혼식 예정을 잡았네요. 제법 거창하게 하려던 것 같습니다. 로만타운에 살던 저명인사들에게 결혼식 초대장이 왔었습니다. 하나 복사해왔죠.”
청년탐정이 초대장 내용을 읽어주었다. 별다른 것 없는 옛스러운 결혼식 초대내용이었다.
“그런데 식 당일 아침, 갑작스럽게 오베르 경의 사망소식이 신문에 났습니다. 축하 하객들은 졸지에 조문객이 됐지요.”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일부러 그런 듯 목소리를 으스스하게 깔았다. 거참 사람 죽은 문제에 이러지 맙시다. 지난번에 후식 새치기부터 이 사람 계속 이러네. 나도 일부러 단답으로 끊어줬다.
“네.”
“......아니 뭐, 그 후로는 별 거 없습니다. 엠마 자우어는 유언장의 내용상 자신이 로제 오베르의 성년까지 보호자가 돼야한다고 주장했고, 저 멀리 타 지역에 있던 오베르 경의 먼 친척들에게서 승소했죠. 그리고 5년이 지났고, 로제 오베르는 지금까지 저택에 칩거 중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저께 외출해서 그쪽을 만났는데요...... 아무래도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서 잘 모르나보다.
“일단 유선 상으로는 이 정도가 전달할만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실물 자료에 좀 더 자세한 내용이 있긴 한데 전화로 다 말하기는 어렵겠네요. 다음 조사로 넘어가기 전에 여기서 궁금한 점들은 더 없습니까?”
앗, 엄청 많습니다.
나는 다른 조 발표 Q&A 시간에 추가질문을 해야만 감점이 없다는 교수님 강의에 들어온 것처럼 질문을 쏟았다.
“유언장 내용이 정확히 어떤 거였는지 알아요?”
“잠시만요,”
또 종이를 뒤지는 소리가 난다.
“당시 신문에는 소송한 핵심 문장밖에 실리지 않아서...... 그거라도 괜찮겠습니까?”
“네네.”
“알겠습니다...... 흠흠, ‘그 박식하고 믿음직한 여인에게 내 딸의 보호를 맡기고 싶다. 딸아이가 성인이 되는 그 날까지.’”
굉장히 명료하다. 과연 승소할 만하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딸 걱정이 확실히 묻어나는군. 적어도 아내의 죽음을 딸 탓이라고 생각해 멀리하면서 자라날 때마다 아내를 닮아가는 딸의 모습에 아내가 생각나 괴로워한다는 슬픈 설정은 아닌 것 같다. 후, 다행이야.
“혹시 오베르 경이 왜 사망했는지는 신문에 안 실렸어요?”
“신문에야 그냥 돌연사라고 적혀있죠. 하지만 특별히 수사가 없었고 사인도 명시되어있지 않았으니까... 보통은 자살일겁니다.”
오, 방금은 좀 탐정 같았다.
“그럼 저기... 그 딸이라던 로제 오베르요. 칩거 중이라면 뭐 학교 다니거나 한 기록도 없나요?”
“내가 살펴본 바로는 없습니다. 아, 가정교사를 구했던 기록은 제법 많네요.”
아마 이 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아버지 쪽이 걱정 때문에 과보호했을 것이다. 음... 그렇게 생각하니 기억상실증이라고 했을 때 양어머니의 극한 과보호와도 연결된다. 두 분 괜히 재혼한 게 아닌가 봐. 똑 닮았네.
“그리고 마담이 데려온 딸 쪽도 마찬가지로 적어도 저택에 들어온 뒤로는 진학기록이 없습니다. 혹시 궁금해 할까 봐요.”
그쪽도 역시 그랬군. 그래서 제릴이 낯선 사람을 어색해했나 보다.
거참. 아무리 걱정돼도 그렇지, 이렇게 무작정 저택에서만 지내게 하는 건 오히려 안 좋은데 말이야. 집순이 집돌이로 사는 건 성인이 된 이후에 선택하게 해주고 최소한 학교는 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나만 지금 빙의해서 꿀 빠는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그러네.
아무튼 그냥 궁금했던 가벼운 질문으로 전화 마무리나 해보자.
“로제 오베르의 약혼자에 대한 이야기는 없나요?”
“약혼자?”
탐정의 목소리에 의아함이 가득하다. 처음 듣나보다.
“뭐...... 아직도 부자들은 그런 고리타분한 관습을 지킨다고 듣기는 했지만, 로제 오베르의 약혼은 최소한 이 동네에 알려진 사실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 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정말 온 가족이 다 같이 사회활동을 안 해버렸나 봐. 그래도 양어머니는 꾸준히 일하신 것 같은데 정말 입도 무거우시구만.
“2차 보고할 때는 그것도 한 번 알아봐줄까요?”
“음, 네. 그러면 좋죠.”
미안하다 약혼자야. 결코 네 인성을 의심하는 게 아니야. 그냥 무어 가문이 어떤 곳인지만 좀 알아볼게. 지난번에 너무 충격적이었어. 난 악역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와 결혼하는 그런 장르를 직접 경험하는 건 별로 찬성 안 한다......
“저도 좋습니다. 그러면 아가씨가 그걸 포함해서 2차로 더 깊게 조사할 것들을 좀 집어주면 되겠군요. 만약에 지금처럼 금방 받아보고 싶다면, 1차 보고를 바탕으로 세부내용 두 가지 정도는 사흘 내로 자세히 찾아보지요.”
“음......”
어떻게 할까?
일단 가장 중요한 양어머니와 하녀 선셋이었던 해서 화이트의 정보는 의뢰를 해놨으니까, 나머지는 좀 더 앞서 간 정보를 찾아보자.
“우선 오베르 집안이 이곳으로 이사하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의뢰하고 싶고요.”
로판이라면 역시 예상외의 인맥과 숨겨진 능력을 위해 주인공 가문에 특이한 혈통이 섞였을 수도 있다. 한 번 알아보는 것도 좋겠지? 장미요정 정원사가 사실 이 집안에 요정의 혈통이 흐르고 있어서 정원을 돌봐준다는 설정, 음, 가능하다.
“네. 그리고?”
“그리고 오베르 집안이 사는 대저택의 내력과 현재 부동산 가치 좀.”
“......예?”
마지막은 내 사심이다. 하지만 한 점 부끄럽지 않다. 정확한 환산금액을 알아야 나중에 투자할 때도 사기를 피하지.
청년탐정은 좀 당황한 것 같았다.
“아가씨 혹시 오베르 집안 저택이라도 인수하려고 의뢰 넣는 겁니까?”
“아뇨 뭐...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어요.”
무난한 대답이지?
탐정은 떨떠름한 기색이지만 알았다고 대답했고, 나는 안심했다. 이걸로 부동산에 입문했다!
하지만 동시에 부쩍 피로해지기도 했다.
글로 읽을 때는 보통 이렇게 정보 얻는 장면에서 대화 몇 마디 하다가 정보가 적힌 두루마리 받고 그 다음 컷에서 이미 읽은 내용을 주인공이 설명해줬단 말이지. 근데 실제로 통화로 일일이 들으니까 생각보다 집중해야하는 시간이 길어서 힘들다.
게다가 이거 아무래도 좀 까먹을 것 같아서 실물 자료를 받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혹시 1차보고로 정리한 자료를 받을 수 있을까요?”
탐정이 흔쾌히 대답했다.
“사실 이건 수집한 자료랑 녹음내용하고 같이 들어야하는 게 맞긴 하죠. 저녁에 시간 괜찮습니까? 내가 괜찮은 식당을 알고 있거든요.”
“그건 맛이 괜찮다는 뜻이죠?”
탐정이 호쾌하게 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그럼요! 지난번에 만났던 레스토랑같이 고급스러운 곳은 아니지만, 좋은 곳입니다. 주인장 솜씨가 훌륭하죠.”
아니 혹시 이건 인심 좋은 여관주인이나 식당주인을 만나서 사실 그 사람이 은퇴한 모종의 고수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전개로 이어지는 건가.
“추가 의뢰로 돈도 벌었겠다, 내가 사겠습니다. 어때요?”
흠,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구나. 서브남 집중 기간인가. 물론 내 쪽에서 서브남을 시켜줄 마음이 없어서 괜찮다. 오늘은 난리가 났었으니까 좀 쉬면서 심신을 안정시키고 내일쯤 만나보는 건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일단 긍정하려고 전화기를 들었다.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로제 양? 로제?”
어, 약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