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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른 전화기에 대고 다다다 말을 뱉었다.
“아, 잠시만요. 지금 전화 계속하기가 좀 힘들어서요. 만나는 건 내일 점심 어때요?”
“괜찮습니다. 점심 좋죠. 그럼 정오에 볼까요?”
그리고 탐정은 간단하고 명쾌하게 식당 위치를 찍어줬다. 타운입구에서 오른쪽 골목... 흠, 오케이.
“네. 그럼 그때 봐요.”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어지간히 맛있나보구나. 나는 입맛을 다시며 빠르게 전화를 끊고 얼른 뒤를 돌아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벌컥 문을 열었다.
그러자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약혼자가 바로 앞에 서있다! 그것도 똑같이 문고리에 손을 대고 있는 게 같이 열었나봐!
크, 멋진 로판 장면같았다.
“여기 계셨군요. 로제, 괜찮으십니까? 대문에서 경찰들이 마담을 이송하는 것을 봤습니다.”
약혼자가 약간 숨을 몰아쉬며 걱정 어린 미소를 지었다. 이마주변 머리카락이 젖어있고 옷이 흐트러진 게 아마 급하게 날 찾아왔나보다. 크윽, 감동적이다.
그리고 약혼자는 잡고 있던 문고리를 툭 놓더니, 갑작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마치 위로라도 하듯이, 손등을 엄지로 한번 쓸어내린다. 장갑의 매끄러운 감촉이 손등에 미끄러진다.
어억.
아니 물론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어쩐지 좀 스킨쉽이 끈적, 음, 끈적해진 것 같다? 혹시 이건 신호인가? 아닌가, 내가 음란마귀가 껴서 그렇게 느끼는 건가.
“사용인이 로제 양께서 방에 계시지 않다고 해서 걱정했습니다. 충격이 크실 테니......”
“네, 네. 그래도 괜찮습니다.”
아니 나도 말하면서 뭐가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정말 의식의 흐름대로 말이 되는 대로 튀어나온다. 머릿속이 혼란하다 혼란해......
“예. 모쪼록 로제 양께서 이번 일에 너무 마음 쓰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그렇죠. 마음 편하게 먹으면 좋죠.”
설마 흔들다리 효과인가? 내 상태를 걱정하며 뛰어오는 도중에 느낀 긴장감으로 인한 흔들다리 효과로 약혼자의 친밀도가 깊어졌나? 이대로 공략완료인가?
약혼자가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우와악 얼굴에 모공도 안 보여. 무슨 보정된 연예인 홀로그램 보는 것 같아.
“심신이 지치셨을 텐데...... 저희 본가로 하루 빨리 모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아직 공모자가 남아있을지도 모르니 걱정이 큽니다.”
헉, 아직은 아니야. 조사결과도 마저 받아야하고 여기서 할 게 많다. 퍼뜩 정신이 돌아오네.
“아, 일단 그래도 경찰이 주시하고 있으니까 별 일 없을 것 같아요. 좀 상황이 정리되고 혹시 재판에라도 들어가면 저도 증언해야할지도 모르니까요.”
“증언은 대리인을 보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로제 양의 안전이 우선이지요. ...사실, 그 마담의 딸이 아직 이 저택에 남아있는 것도 좀 신경 쓰이는 군요.”
어 맞다, 제릴! 양어머니가 잡혀갈 때 자리에 없던데 자기 방으로라도 돌아간 걸까? 한 번 찾아봐야겠다. 너무 충격 받지는 않았을까 걱정되는데.
우선 걱정 많은 약혼자부터 달래놓자. 이쪽은 완전히 의붓오빠의 인상이 수상한 사람으로 박힌 모양이다.
“에이, 언니는 괜찮아요. 그리고 아직 범인이 확정된 것도 아닌 걸요. 수사진행을 확실히 봐두고 싶어요.”
그래야 그 사이에 누가 진범인지 추리를 하지!
내 말을 들은 약혼자는 미소가 희미해졌다. 어쩐지 마지못한 기색이다.
“......예. 그래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그럼요!”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한 발 슬쩍 물러나자, 저 파괴력 넘치는 얼굴로부터의 안전거리가 확보되었다.
후우후우. 방금 완전히 로맨스가 넘쳤던 거 맞지? 약혼자의 얼굴이 판타지라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로판다웠다. 심장에 무리가 오지만 굉장히 좋았어. 역시 로판이 짱이야.
“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혹시 제가 무기를 좀 구할 수 있을까요?”
만일의 상황이 들이닥치면 역시 무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약혼자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역시 걱정이 많았나보다.
“물론입니다. 제가 최대한 괜찮은 호신용품을...”
“아, 그런 게 아니라 살상이 가능할 걸로.”
“......”
자고로 애매한 저항보다는 확실한 협박이 낫다. 한방에 상대방이 반죽음될만한 걸로 줘라.
아까 경찰들 보니까 허리춤에 총도 있었다. 안 그래도 지난번에 외출해보니 이 동네 완전히 근대 미국풍 맞던데, 총기소지합법이면 총이 제일 좋겠어. 내가 총을 쏴서 혹시 안 맞더라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어느 정도 제지할 수 있겠지?
“권총 구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로제. 좋은 선택이십니다.”
예이! 총기소지합법 맞았나보군!
...근데 이거 다시 생각해보면 나도 총 맞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설마 주인공을 죽이기야 하겠느냐만, 공격을 대신 맞고 쓰러져서 혼수상태가 길어지며 주변사람들의 염려와 감정이 깊어지는 흐름은 많이 봤다. 굳이 경험하고 싶진 않으니 앞으로 수상한 사람을 만날 때 소지품을 유심히 봐둬야지.
약혼자는 최대한 빨리 구해보겠다고 말을 정리하더니, 문득 창문가를 바라보았다.
“제가 잠시 의복을 정돈하고 와도 괜찮을까요?”
“당연하죠! 푹 쉬시고 우리 저녁식사쯤 봐요!”
“그렇게 길게 휴식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만...... 네, 그러면 저녁까지 로제 양께서도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시길 바랍니다.”
약혼자가 옆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하, 창문에 비친 자기를 봤나보네. 얼굴에 묘한 표정이 스쳐지나가는 게 아마 흐트러진 모습을 자각해서 조금 민망하거나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귀엽구만.
나는 흐뭇하게 손님방으로 향하는 약혼자를 배웅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간 빠른 걸음으로 약혼자는 방에 들어가 버렸다. 저것도 귀엽네.
그리고 마침내 혼자가 되자 두 손을 비비며 생각했다. 좋아좋아. 이제 제릴을 만나서 위로도 하고 양어머니 관련해서 좀 물어봐야겠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심문한다고 느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나는 양어머니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다’는 식으로 접근해야 호감도도 올리고 정보도 알아낼 수 있겠지?
음 좋았어. 오늘도 공략을 위해 힘내자구. 조금만 지나면 미남과 미식이 함께하는 즐거운 금수저 백수의 삶이 업그레이드되어 다시 나를 기다린다! 나는 스스로를 격려하며 복도를 힘차게 걸었다. 그리고 계단 앞에서 멈췄다. 창문 밖 정원에 모자 쓴 인영이 아른 거렸다.
어? 쟤 장미요정(추정) 정원사 아냐?
참고로 지금은 아직 늦은 오후다. 저거저거 아주 간이 부어서 이제는 낮에도 막 무단 작업을 하는구나. 아무래도 정식으로 고용을 하든지 해야겠다.
나는 잠시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것을 보류하고 정원으로 힘차게 나갔다. 얼마나 작업에 열중한 건지 내가 지척에 갈 때까지 소년 정원사는 돌아보지도 않는다.
어, 그러고 보니 얘도 자기를 선셋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지? 겸사겸사 하녀 선셋에 대해서도 물어보자!
“선셋?”
“오베르 아가씨.”
거 놀라지도 않고 돌아보는 구나. 어쩌면 내가 다가올 동안 아닌 척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정원사는 여전히 모자 그림자가 턱까지 드리워져있고, 근무복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장미를 손으로 톡하고 한 번 건들며 나를 본다.
“안 그래도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음, 뭔데?”
일단 좀 이야기를 받아주면서 분위기를 풀고 타일러야겠다. 내가 되묻자 소년은 옆에 둔 공구함을 뒤적거리더니, 웬 나무함을 꺼냈다. 납작한 모양새에 모서리마다 원뿔장식이 솟아있었고, 새 것처럼 멀쩡했지만 군데군데 흙이 묻어있었다.
“이게 뭐야?”
“정원 밑에 묻혀있었어요.”
너 땅까지 팠냐. 나는 한 소리 할 목록이 갱신되는 소리를 들으며 나무함을 받아들었다. 생각보다 가벼웠다.
잠깐, 이거 설마 요정이 나한테 선물을 주는... 그런 건가? 그렇지. 드디어 판타지다운 물건이 나올지도 모르겠어. 나는 약간 설레며 나무함을 열었다. 잠금장치가 없었는지 부드럽게 열렸다.
“......음?”
안에 든 것은 웬 지저분한 종이쪼가리다. 뭐야 이게.
아냐 당황하지 말자. 충분히 있을 법한 전개다. 사실 이 종이에 적힌 게 특별한 내용일 수도 있어. 나는 침착하게 종이를 들어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뒷면에 뭐가 적혀있긴 하다.
“......”
근데 읽을 수가 없네. 뭐야. 원래 이 몸도 모르는 문자인가보다. 나는 동공지진하며 고풍스러운 필기체로 적힌 페이지를 한참 들여다봤다. 정말 모르겠다. 반사적으로 종이를 매만지자, 종이가 갈라진다. 어?
아, 이거 두 장이 붙어있던 거구나. 나는 새로 나온 페이지를 확인했다. 아까보다는 덜 낡은 종이긴 한데, 이번에는 뭘 흘리기라도 한 건지 종이가 군데군데 흑갈색으로 변색됐다. 게다가 너무 번진 곳은 알아볼 수가 없다. 그래도 대충 내용은 읽을 수 있구나. 다행이군.
-부어라 부어라 부어라
열리는 닫히는 열리는 길
부정함이 부정하는 ......한 일이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밑으로 잠기는
어둠 빛나는 ...... 황금 속
부르는 ...... 소리 속으로
가득 담아라 ......는
변이의 날 것.
그리고 맨 아래에 와인 병과 직사각형이 그려져 있다.
오올, 운율 맞춰 적어놓은 미스테리한 내용의 쪽지와 기호라......
황금이 언급된 것을 보면 이건 완전 보물찾기용 수수께끼 같잖아?
드디어 나도 남들이 모르는 비공식적 자금줄이 생길 가능성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