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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44화 (4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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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말문을 열면서도 의붓오빠는 그야말로 오초 뒤에 혼절할 것 같은 기색이었다. 분명 병약한 부잣집 자제로 대우받던 건 이 몸이었는데 어째 이쪽이 더 병약하게 느껴져!

“어어, 괜찮아?!”

“견딜만해.”

제릴은 부축하려던 내 손을 과민하게 피하더니 심호흡을 몇 번 했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저거..., 저거. 아예 없어진 건 아닐 거야.”

불길한 복선이 깔리고 있다. 으아악.

그래도 이 정도는 나도 예상했던 전개다. 역시 무어 경 쪽으로 갔을까? 나는 최대한 신중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왜, 왜? 혹시 아까 뭐 본 거라도 있어?”

“봤지.”

몇 번의 심호흡 끝에 제릴의 안색이 좀 괜찮아졌다. 한결 차분해진 태도로 의붓오빠는 품에서 다 구겨진 종이를 꺼냈다. 저거 내가 찍은 벽 사진의 문자 번역한 거 아니야? 왜 갑자기 이 타이밍에 저게 나오지?

심지어 시간이 촉박했던 탓인지 완전히 번역된 게 아니라, 단어와 문장들이 적었다 지웠다한 흔적과 함께 연결되지 않고 난잡하게 퍼져있었다. 게다가 얼마나 급하게 적었던지 원래는 유려했을 필체가 완전히 망가져서 휘갈겨 쓴 티가 났다.

어디보자,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건...... 위대한 혼돈, 부르는 의식, 옛 영주의 영토? 그 외에는 단어 뜻도 모르겠는 것들이 즐비하다. 대체 부등변다면체가 뭘까. 오타인지 아니면 내가 악필 때문에 제대로 못 읽는 건지도 모르겠어.

다행히 여기 번역자가 직접 있다. 심지어 지금 설명해주려고 입을 열고 있어. 고마워요 제릴!

“네가 준 사진에 그런 내용이 있었어. 이 저택 밑에 그...... 인간이 아닌 존재는, 어떤 유물로 부르는 건가 봐.”

“유물?”

“......부등변다면... 쿨럭!”

으어어 갑자기 제릴이 피를 토했다!! 나는 얼른 제릴을 붙잡아서 앉히고 내 쪽에 기대게 만들었다. 물, 물 찾을 방법 없나?? 아니 공간이 다 뒤죽박죽이라 부엌이 어느 쪽인지도 모르겠어! 급한 대로 등을 쓸어주자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일단 더 토하고 싶으면 있는 거 다 토해! 혹시라도 기도나 이런데 막히면 안 되잖아!”

“...괜찮아. 이건... 이건 그런 건 아니야.”

등을 토닥거리고 있자니 제릴의 목소리가 의외로 빠르게 평온을 되찾았다. 혹시 내 손에 무슨 힘이라도 있는 건가? 그렇게까지 보정을 줬을 것 같지는 않지만 갑자기 내 손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그래도 우선순위가 있지. 일단 무시하며 최대한 제릴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래서, 그 유물은... 네가 사진 찍은 그 통로 끝에 있는 것 같아.”

“그거......”

그거 드래곤 하트잖아. 그 막 이상한 근육 붙어있던 거.

이건 완전 드래곤 하트 작살내서 드래곤 잡으라는 복선이잖아.

“그걸 파괴하면,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의붓오빠는 꽤 의지어린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그리고 나는 반사적으로 지하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간이 다 깨져있지만 운이 좋았는지 아까 말미잘 터지면서 생긴 검붉은 물이 고여 있는 게 선명히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나 부엌 같은 곳은 찾을 길이 막막한 것과 달리 저쪽으로는 찾아가려면 굳이 못 찾아갈 것도 없을 것 같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다. 이 난장판에 해볼 만한 힌트는 이것뿐이야!

나는 아까 던져놨던 구불거리는 단검을 도로 주웠다. 이런 특이한 아이템은 함부로 버리고 갔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낭패를 볼 수도 있다.

“그럼...... 가볼까?”

“...그래.”

이렇게 드래곤 잡으러 가는 이인팟이 급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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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가의 사생아는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가 고정시키고 있는 이 기생 망령은 아마 그가 손을 떼는 순간 이 속박주문을 찢고 다시 이 땅에 구현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건 정신을 무너트리는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남자를 찍어 누르려 애쓰고 있다. 아마 그에게 제물낙인이 없었다면, 이 뇌를 녹일 만큼 치명적인 파동이 이성을 무너트리고 한계를 넘는 공포와 공황의 수렁으로 그의 머리를 처박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공포와 공황을 모르는 남자는 문득 한 생각을 떠올렸을 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괴이한 힘에 굴종했는가.

혹은 저런 괴이한 힘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공양했는가.

아마 그런 남자의 내면을 눈치라도 챈 듯, 기생 망령은 곧 자극 방법을 바꾸었다.

“이 속박주문... 강력하지만 시전자도 함께 못 움직이는 주문이에요.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면, 남자는 충분히 ‘계속 이렇게 있을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이 주문을 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에요. 이백년 만인가? 하하.”

“......”

“그렇지, 이것도 내 유물에서 찾은 주문이죠? 이봐... 저기요. 내 유물을 잘 쓰고 있어요?”

소년의 목소리가 간살스럽게 변했다.

“위대한 옛 영주께 하사받은 내 알 아지프의 서. 그걸 번역하려고 쓸모없는 학자들이 200마리나 필요했어요. 하나같이 이틀을 못 버텨서 매번 그 정신 나간 쓰레기들을 처리하느라 얼마나 번거로웠는지. 다 끝나면 한 번에 도살하려고 했는데 그 잠깐을 못 참아 주더라니까요?”

목소리는 점점 격해졌다.

“와중에 도망간 걸 도로 잡아오는 것도 정말 하나같이 신경질 나는 일 투성이었어요. 설마 그게 미완성 판본 하나를 빼돌렸을 줄이야.”

남자는 자신의 신화서를 떠올렸다. 반쯤 탄 초라한 몰골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는 순간 미치고 매료될 지식과 주문으로 가득 찬 서적.

아마 기생 망령의 말이 맞을 것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판본을 빼돌린 자에 의해 돌고 돌아 결국 운명의 장난처럼 남자가 살던 작업장 쓰레기 밑바닥 틈까지 오게 됐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내 후손의 손에 들어가다니! 정말 신기해요. 그렇죠?”

사생아가 가축이라고 단언하던 망령은 부들부들한 어휘를 싹싹 골라내 사용했다. 필요한 건 자그만 틈이었다.

그러나 사생아의 정신은 미동도 없었다. 망령은 화제를 약간 비틀기로 했다.

“지금 루카스 무어로 둔갑한 것도 거기 적혀있던 주문이네요. 살의 수수께끼. 음, 기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이미 죽였으면 가죽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테니까... 세달? 두 달?”

“......”

“한 달? ...어쩌면 일주일? 그것보다는 길려나? 보름?”

“......”

이거다.

“보름 남았구나!”

선셋의 목소리에 이상야릇한 환희가 섞였다.

“보름이라니... 이제 루카스 무어로 살 수 있는 기간이 보름뿐이에요! 이럴 수가!”

“닥쳐.”

동요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결국 남자의 입에서는 이 악문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하하하... 잘 생각해요. 너무 간단한 일인 걸요? 나는 후손의 계획을 알고 있고, 그걸 도와줄 수 있어요. 우리 같이 가장 위대한 혼돈의 힘을 받아서 불사가 되는 거죠. 어차피 나는 곧 불사가 될 거야. 그 분이 깨어나시고 있어... 난 이제 제대로 된 육체만 받으면 돼.”

선셋이 히죽 웃었다.

“그리고 그 육체는... 역시 마지막 오베르가 좋을까. 굴욕의 전리품!”

“......!”

순간, 남자의 주문에 아주 작은 비틀림이 생겼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망령은 알고 싶었던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익숙하고 증오스러운 피의 기척이 위대한 제단에서 느껴졌다. 제 발로 오베르가 제단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편한 공양이 될지!

“하하하... 이 오베르 버러지들은 주제를 모른다니까!”

선셋은 기쁨에 가득차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알아서 제단으로 가주다니, 너무 고마운 일이에요.”

선셋은 가운데 눈이 사라질 만큼 커다란 미소를 한가득 얼굴에 그려 넣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자신의 정신이 귀속된 곳으로의 귀환주문. 육체를 버리는 위험 때문에 절대로... 쓰지 않을 것이라고 남자는 예상했었다.

그러니까, 이건... 그 위험을 무시할 만큼 확실한 일이 벌어질 것이란 뜻이다.

남자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제단으로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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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 안은 말미잘 흔적으로 개판이었다. 아니, 개라는 표현을 쓰기가 멍멍이에게 미안해진다. 우리 멍멍이들은 인간보다 귀엽고 깨끗한 경우가 훨씬 많은데 자꾸 이 표현을 써서 미안하단 말이지.

그리고 신기한 점이 또 있다면 지하실로 발을 들이는 순간 공간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거다! 와우!

근데 대신 뭔가...... 전체적으로 촉수 같은 게 휘감고 간 흔적이 있어서 좀 비위가 상한다. 이것도 아까 말미잘들의 흔적인가 봐. 나와 제릴은 혹시 모를 말미잘의 2차 어택을 주의하며 천천히 지하실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갔다. 최대한 검붉은 웅덩이를 안 밟으려고 주의하고 있는데 이거 쉰내가 너무 심해......

어, 그러고 보니 이 쉰내 어디서 맡아본 적 있는 것 같다. 음... 그게...... 오, 맞아! 지하실에 있던 와인들! 그걸 깼을 때 이런 비슷한 냄새가 났던 것 같다.

......그럼 말미잘들은 오래돼서 다 쉬어빠진 와인들로 만든 드래곤 하수인이란 말인가...... 갑자기 총알도 잘 안 박히던 강력하고 징그러운 몬스터에서 애잔한 재활용 몬스터로 이미지가 바뀐다. 어쩌면 이 드래곤 거지인가 봐.

아니나 다를까 도착한 지하실의 제단문이 활짝 열려있다. 무어 경이 그 몬스터들 날려버리고 남은 웅덩이가 선반 안에 들어가며 자동으로 열린 모양이었다. 역시 상한 와인이 본체였어. 뒤에서 제릴이 침을 삼키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얘 너무 긴장한 것 같은데, 가뜩이나 방금 피도 토해서 걱정된다.

“왜, 왜?”

“일단 우리 마음의 준비 좀 하고 들어가자. 긴장된다.”

나는 보고 따라하라는 의미로 SNS에서 봤던 최소동작 체조를 각 잡고 시범으로 보여줬다. 과제하다가 새벽 3시에 담이 온 다음날 찾아서 배워뒀던 거다. 경직된 몸을 풀어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제릴은 따라하는 대신 얼빠진 표정으로 보더니, 체조 루틴을 한번 끝내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말고 따라 해라.”

“됐어. ...고마워.”

제릴이 한결 편해진 안색으로 밑의 통로를 응시한다. 졸지에 몸개그로 긴장을 풀어준 꼴이 됐군.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니 대충 넘어가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총과 단검을 잘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통로로 접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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