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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통로로 들어가면 다른 타입의 말미잘들이 더 나올까봐 걱정했지만 놀랍도록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이상한 점이라고는 원래 벽에 빼곡했던 문자들이 사라지고 매끈해졌다는 부분밖에 없었다. 제릴에게 그 부분을 설명하자 벽에서 최대한 떨어져서 가운데로 걸어가려고 애쓰고 있다.
슬슬 우리 이렇게 쫄보인데 드래곤 하트를 총으로 쏠 수나 있을지 걱정된다. 무직인 우리 둘이서만 파티를 하지 말고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 찾았어야했던 거 아닐까? 내가 지난번에 드래곤 층간소음 한번 차단했다고 너무 주인공 보정을 믿고 있는 건가?
드래곤 하트에 함정 설치해놨으면 어쩌지? 공격하면 막 튕겨 나와서 내 배에 총알이 도로 박힐 수도 있잖아. 으윽, 심란해지는데.
혼란한 마음과는 별개로 발은 착착 통로 끝을 향하고 있다. 일단 살펴보기라도 해보자 심정으로 통로 끝까지 걸어가서 고개를 쑥 내밀었다.
“워,”
저 끝에서 드래곤 하트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다!
어쩐지 지난번에는 랜턴 들고 간신히 왔다 갔다 했던 통로였는데 어스름히 보이더라. 여기서부터 빛이 들어오고 있던 모양이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붉은 빛으로 가득 찬 수정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붙은 근육은... 더 커진 것 같다. 이젠 거의 근육이 아니라 무슨 덩어리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리고 수정이 담긴 상자는 이제 황금이 아니라 무슨 다 녹슨 황동 같은 색이다. 수정이 번쩍번쩍 빛나서 대조된 탓인가?
근데 이걸 어떻게 박살내야할지 모르겠네.
“혹시 벽에 무슨 부수는 방법 같은 건 없었어?”
“......아니. 없었어.”
멍하니 대답하던 제릴이 갑자기 억울한 눈으로 이쪽을 쏘아본다. 뭐여.
“애초에 그건 이걸 숭배하는 글이었다고...! 그런 게 적혀 있었을 리가 없잖아!”
아니 우호적인 글이어도 ‘물에 닿으면 녹으니까 조심하세요.’같은 문장이 있었을 수도 있잖아 왜 화를 내고 그래! 하지만 같이 화내면 답이 없을 것 같아서 사회생활 경험 많은 내가 참기로 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래!”
씩씩대던 제릴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뭐야 또.
입을 꾹 다물고 아래를 보던 제릴이 머뭇거리다 작게 중얼거린다.
“미안...... 부, 불안해서.”
“괜찮아, 괜찮아.”
솔직히 불안할 만도 하다. 지금 온갖 이상한 일이 다 벌어지는데다가 의붓오빠는 지난 몇 년간 괴롭힌 층간소음 당사자가 연쇄살인마 지망 싸이코패스라는 걸 방금 알았으니 더 무섭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는... 괜찮아?”
“나?”
그러고 보니 그다지 무섭지가 않다. 갑자기 주변에 미인이 넘치고 석유왕이 되더니 마법까지 나와서 현실감이 사라져버려서 그런가, 그냥 VR로 로판 체험하는 느낌에 가깝다.
원래 몸으로 돌아가 보니 여기서 지낸 시간 동안 내가 행방불명이었고, 출석이 망해서 F가 줄줄 뜨는 바람에 복구하느라 취준도 못하고 편의점 알바를 전전하다가 학자금 못 갚고 파산하는 게 차라리 더 무서워......
생각하니 좀 오싹해졌다. 여기서 이 몸으로 죽으면 그게 정말 현실이 될 수도 있으니 힘내서 꼭 저 드래곤 하트(추정)를 터트리자.
“나도 괜찮아. 그냥 꼭 저걸 박살내고 싶은 마음뿐이야...!”
“그, 그래......”
나는 의지로 불타는 눈으로 시뻘개진 수정을 노려보았다.
일단 총을 장전하고...... 혹시라도 진짜 튕겨 나올 수도 있으니까 시험 삼아 주변을 한 번 쏴보자.
탕!
제릴의 얼굴에 경악이 가득 찼다. 새삼스럽게 얜 또 왜 이러는 거지.
“너, 너 지금......”
“걱정 마, 빗나간 게 아니라 일부러 옆을 쏴본 거야.”
“그게 아니라 그렇게 갑자기 쏘면......!”
“아니 어차피 박살내려면 이런 거 외에는 우리 다른 방법도 없잖아!”
혹시 무어 경처럼 마법 쓸 수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윽하게 바라보았지만 절대 아니었는지 고개를 휘젓고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그리고 점차 의붓오빠의 얼굴에서 경악이 사라지고, 대신 혼란이 가득해진다.
“그렇, 그렇지...... 근데 그건 너무 위험한데, 왜, 왜......”
“어?”
“......왜 나는, 널 데리고 여기에 온 거지?”
-날 위해서.
혀를 날름대는 소리가 났다. 뭐야? 고개를 돌리자 드래곤 하트 주변 근육에 뭔가 사람 얼굴 같은 게 튀어나와있다! 으어어어억!! 미친 뭐야 이게!
-하하하하하하
사람 얼굴이 꾸물꾸물 거리는 게 아까 본 말미잘들 같은 질감이다. 설마 저게 그 말미잘들의 대장인가?
-오베르를 여기까지 잘 데려왔어. 참 쓸모가 있구나. 버러지야.
끈적끈적한 목소리에 제릴이 입을 틀어막더니 몸을 웅크렸다. 목소리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넌 제일 마지막에 공양해주마.
탕!
워억 제릴이 총을 쐈다! 총을 잡은 팔과 받친 팔이 모두 벌벌 떨리는 게 내 눈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의붓오빠가 오늘 처음 쏘는 그 총은 얼추 그 얼굴 근처에 맞기는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말미잘 얼굴은 지나치게 멀쩡했다. 시벌, 저거 뭐야? 나도 쏘려고 총을 들어 올리는데, 그보다 먼저 근육이... 뜯어지더니 바닥으로 튀어나왔다.
“!?!?”
어어억, 안 본 눈이 너무 사고 싶은... 광경이다...!
옆에서 견디지 못했는지 제릴도 쓰러졌다. 나도 쓰러져서 눈이라도 가리고 싶지만 상황이 위험한 것 같아서 차마 그러지 못하고 내적비명만 질렀다. 그아아악!!
철썩. 떨어져 나온 근육이 바닥에 박혔다. 그리고 휙 사라졌다.
갑자기 어디서 등장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제릴이 비틀거리면서 일어난다. 회복한 건가? 슬쩍 눈만 돌려 확인했다. 그리고 내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일어선 제릴의 이마에 찢어진 세 번째 눈이 펄떡 거린다.
“아, 아... 안녕하세요. 오베르 아가씨.”
으아아 저거 선셋이잖아...! 설마 아까 떨어진 근육이 저 눈깔 근육인가? 저게 본체였던 거야?! 얼른 총구를 그쪽으로 들이댔지만 솔직히 당장 쏠 수가 없다. 저거 몸은 제릴이잖아......
“생각해봤는데, 역시 전리품이 있어야 돼요.”
“뭐?”
제릴의 얼굴로 선셋이 히죽 웃었다. 이쪽으로 한 발짝 걸어오는데 발밑에서 말미잘 가닥 같은 게 끈적거리며 떨어졌다 다시 발로 들어간다. 미친 와 이거......
“네 몸은 전리품으로 써야지. 그리고 네 작고 보잘 것 없는 정신은 뜯어다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영원히 생지옥에서 살게 해줄 거야. 하하하......”
선셋이 끔찍한 말을 줄줄 뱉더니 한 손을 번쩍 들어서 드래곤 하트를 가리켰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음울한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무어 경이 말미잘 다 날릴 때 썼던 거랑 느낌이 비슷한데, 그것보다 더 음침하고 상황도 이러니 느낌이 몹시 싸했다.
와 근데 진짜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역시 주인공 보정을 믿은 건 형편없는 판단이었나?
일단 제릴이 당장 죽지는 않게 팔이라도 쏴서 막아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총을 들어 올릴 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로제!!”
“무어 경?!”
와 대박 타이밍 봐라!! 통로를 뛰어오던 무어 경이 나와 제릴을 목격하고 즉시 손을 뻗더니 거칠게 알 수 없는 말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어 경이 통로를 거의 다 지나왔을 때쯤, 제릴의 몸이 무너지더니 바닥에 처박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근데 더 질리는 것은 그 와중에도 그 음산한 웅얼거림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떨어지십시오!”
반사적으로 제릴에게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달려오던 무어 경이 몇 번 비틀거리더니 입에서 피를 울컥 토한다. 아니 이 동네 무슨 주화입마 들어가는 게 기믹이여? 왜 다들 피를 토하는 거야!? 이쪽도 걱정되고 저쪽도 걱정되고 아주 미치겠다!
“늦었...어! 하하하!, 하하하하!!”
선셋이 발작적으로 외치며 머리를 바닥에 처박는다. 무어 경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반쯤 쓰러지더니 뭔가를 참아내는 것처럼 땅을 손을 긁는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나야...... 자, 지금 이 상황에서 제릴과 무어 경에게는 피해가 없으면서 선셋만 잡을 수 있을만한 방법이 분명 있다. 이건 소설 안이니까 분명 해답지가 있을 거라고!!
그 순간, 뒤에서 빛이 번뜩였다.
선셋의 발작적인 웃음을 뒤로 한 채 고개를 돌리자, 붉게 빛나는 수정이 보인다.
...아까 선셋이 여기서 떨어져 나온 건 확실하지?
그럼 혹시?
나는 총을 들어 올리다가 내렸다. 총은 아까 제릴이 쐈을 때도 통하지 않았다.
대신 챙겨뒀던 구불거리는 단검을 꺼냈다.
“...역시,”
신비한 힘을 가진 도구가 등장해서 주인공 손에 들어왔으면, 역시 이렇게 연결되는 거지!
나는 단검을 들고 드래곤 하트로 달려들었다.
“로제! 안 됩니다!! 멈춰!!”
그리고 빛나는 수정을 단검으로 세차게 내리찍었다. 선셋의 웃음이 경악어린 비명으로 바뀐다.
***
근무수칙
14. 2층 작은 서재 가장 왼쪽 서랍장은 사용인의 청소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별도의 요청사항이 있을 때까지 접근하지 마십시오.
15. 이것도 좀 질리는...(거칠게 지운 흔적)
========== 작품 후기 ==========
롤러코스터 로제 호, 클라이맥스로 질주합니다! 모두 로판 필터를 꼭 잡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