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최대한 너그럽게 상황을 판단해보기로 했다. 일단 털어만 놓으면 후딱 정리하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테니 얼른 찔리는 걸 전부 털어놔보아라 계략 남주야!
하지만 상대는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 말이 없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많이 당황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이럴 때는 내 쪽부터 떡밥을 던지는 게 좋겠지.
“마음에 걸리는 일 있나요?”
이번에는 작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이 없다. 내가 건넨 상자를 손가락이 하얗게 되도록 움켜쥐고 있을 뿐이다.
이 반응 뭐여. 받은 패물이 아까운 거냐 아님 다 털어놓으면 망할까봐 무서운 거냐. 영앤리치 남주인데 설마 전자는 아닐 거라고 믿는다.
좋아. 좀 부드럽게 다시 접근해보자!
“저한테도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는 것도 좋고요.”
그러나 이 대사는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무어 경은 도리어 시선을 내리깐 채로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없습니다.”
“정말요?”
“예.”
여전히 시선을 상자에 고정시킨 채, 무어 경은 말을 이었다.
“정말로... 없습니다.”
어허이. 이 상황을 회피하는 것으로 차후 외전에서의 갈등을 심화시키지 말아라 남주야!
결국 내가 한 번 더 정리해야하는군.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새로운 국면을 구상했다.
“사실 이미 좀 들은 게 있어요.”
“......예?”
“거, 눈 세 개 달린 선셋이 엄청 떠들더라구요.”
무어 경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일단 약혼자라고 속인 건 공식적으로 사실 맞죠?”
이건 심지어 본인도 대놓고 들었는데 어떻게 여기서 할 말이 없다는 소리가 나오냐. 나는 더 말할 것도 없이 그저 물끄러미 무어 경의 얼굴을 응시했다.
저 얼굴에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기 위해 미리 열심히 봐두어 익숙해질 생각이었지만 크으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 여차하면 나도 적당히 다른 곳 보면서 말해야겠어.
그리고 긴 침묵 끝에 떨리는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그렇, 그렇다면... 방금 말씀하신 건, 그건......”
“예?”
“이걸 위해... 하신 말씀이었군요.”
무어 경이 표정 없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절 문책하시기 위해서.”
예...?
나는 기겁했다.
아니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일부러 철회하려고 고백하다니...! 내가 그런 사람 괴롭히는 인격파탄자로 보였단 말인가...?
지금까지 줄곧 현대인의 도덕성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틀어진 거지!? 역시 양어머니한테 종신노동형을 선고해서 그런 건가! 아니야, 그건 합리적이었는데!
“아니 그건 아니구요. 남이 고자질한 걸 그대로 두고 상대를 판단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짓이잖아요. 그러니까 직접 이야기해보자는 말이었어요.”
그것도 중간 흑막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고 사이가 벌어지는 건 너무 고구마 클리셰잖아. 그 짓에 당하기에는 유사전개를 너무 많이 봤다.
그래서 단호하게 덧붙였다.
“사과할 거나 정리할 게 있으면 같이 솔직하게 터놓자는 거죠. 그걸 전제로 함께하는 인생계획에 대한 제 제안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과한 걱정 말고 지금까지의 권모술수에서 찔리는 점을 털어놔 보자구!
“......”
무어 경이 가쁘고 옅게 숨을 내쉰다.
그리고 곧 입을 달싹였다.
--
사생아는 쥐고 있던 상자 안에 들어있을 물건의 형태를 궁금해 하던 몇 십초 전의 자신에게 애타는 질시를 느꼈다. 그리고 농도 깊은 절망 속을 뒹굴었다.
마치 버려진 우물 속에서 눈가까지 물이 차오른 채 기다리는 것과 같다. 다음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난다는 것을 전신으로 실감하며 도망치지도 못하는 그런 상황.
그런데 갑자기 그 위로 가느다란 노끈이 내려온다면 어떨까.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추락한 상황에서 작고 끊어질 것 같은 희망이 한 가닥 내려오면,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붙잡게 된다.
아마도 의미 없는 발버둥으로 끝날 것이라고 짐작하면서도, 그 작은 기대를 포기할 수가 없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매달리게 된다.
그래서 공포와 희미한 희망이 섞여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남자는 문장을 내쏟았다.
“마, 맞습니다. 제가... 제가 당신에게 해가 되는 존재로 이 저택에 들어온 게. 당신을 이용해서... 해, 해쳐서, 제 이득을 채우기 위해 약혼자 행세를 했던 겁니다.”
“음, 네.”
그는 말을 멈추면 비명을 지를 것 같아서 계속 단어를 토해낼 수 있었다.
“흠, 어떤 이득을 위해서 그러셨던 건데요?”
권능, 복수, 흥미.
다양하게도 이기적인 이유였다. 그리고 남자는 가장 크고 원초적인 이유를 본능처럼 말했다. 솔직하고 저열한 욕구였다.
“오, 오래 살고 싶어서......”
그가 육체적, 사회적 전성기에 도래할 때 즈음에 제물낙인은 성숙기간의 끝을 감지하고 그를 제물로 송환할 것이다. 그리고 대단히 원초적이고 사악한 방식으로 잡아먹힐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타인을 희생시켜 벗어나고자 했다.
자세한 설명은 더 큰 경멸을 부를 뿐이라는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삼켰다. 그리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너절한 변명과 사정을 절박하게 이었다.
“하지만... 그건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는 결국 당신을 위해 움직였잖아요.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러니까... 조, 조금은, 제게 관용을 베푸실 수도,”
“......음, 네. 그렇죠. 근데 그것뿐인가요?”
그 되물음에 한 행위가 희망을 찢고 머릿속으로 떠오른다.
아주 결정적이고 용서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악의적 행동.
그 말은 혀끝에서 도저히 나오지 않고 있었다. 가장 치명적인 사실이 알려지며 우그러트릴 미래와, 이미 상대가 알고 있었는데도 말하지 않았기에 나락에 떨어질 미래가 예감 속에서 서로를 물어뜯었다.
우위를 가릴 수 없는 그 필사적인 팽배함을 무너트린 것은 말을 이어나가던 관성이라는 작은 요소였다. 결국 남자는 사실을 토로했다.
“제가...... 전에 드린 약은 사실, 정신을 흐리게 하는 독이었지만, 아니, 독이었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
“하, 하지만... 영향이 장기적인 건 아닙니다. 앞으로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그러, 그러니까......”
남자는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로제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섬뜩한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본 적 없는 경악이 그 얼굴에 가득했다.
--
일단 순서대로 생각해보자면, 저택 잠입 건은 그럭저럭 진심어린 반성과 보상을 받으면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동기가 사랑이 아니라 생존인 점에서 좀 놀랐지만 오히려 그쪽이 선셋을 통해 들었던 짠내 나는 과거사에 비추어볼 때 더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단지 이 야망과 피폐 서사를 극복하고 공략을 성공한 내가 놀라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 약물 건은, 좀 그렇지...?
그 건은... 좀 너무 나갔구만. 나는 뜨악한 표정으로 무어 경을 쳐다봤다. 이 정도면 계략을 넘어서 살짝 어, 개자식 수준에 발 담갔다가 빠져나온 거 아닌가?
게다가 내가 진짜로 마셨으면 완전히 전개 다 꼬이고 멍청이가 된 나는 중간에 리타이어하고 말미잘이 세계 정복하는 결말로 이어지는 거잖아. 어후.
일단... 좀 더 질문을 해보자.
“그건 또 왜 먹인 건데요?”
“......의심하게 하려고... 주변 사람들을.”
“독살조작하고 연결해서요?”
“......”
대답은 없었지만 이쯤 되면 침묵이 긍정이다. 독살 조작도 사실이었나보구만. 흠, 이건 좀... 나는 턱을 긁적였다. 이걸 그냥 ‘사과 받았으니까 됐어~ 후회하니까 됐어~’하는 건 형평성에 어긋나는 거 아닌가...?
슬쩍 무어 경 얼굴을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물기 없는 얼굴이다. 울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본인도 느끼나보다.
좋아, 그럼 이 건을 해결하려면 역시 그 방법뿐인가.
혹시 몰라 준비했던 것을 꺼내려는데, 갑자기 무어 경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나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성심성의껏 사과하려는 준비인가?
그런데 다시 보니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게 아니다. 눈이 초점이 없어.
무슨 죽은 생선 같은 눈으로, 무어 경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무슨 도살을 기다리는 소처럼 얌전히 몸을 굳히고 서 있다.
정말 지극히 반성어린 태도긴 한데, 그래도 일단 준비한 건 써야겠다!
후, 약물이라니. 계략 남주 클리셰를 정리하면서도 설마설마했던 극단적인 상황을 만날 줄이야! 미리 대비해두길 잘했네. 아니면 준비하느라 또 한나절은 걸렸겠어.
나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서랍에서 꺼낸 것을 무어 경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읽고, 동의하시면 제 말 받아 적으세요!”
바로 서약서와 만년필이다.
공증 가능한 양식을 찾으면서도 솔직히 양어머니하고나 쓸 줄 알았지. 결국 연애상대와 첫 시작을 함께할 줄은 몰랐다. 크흡.
무어 경은 오초쯤 반응이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계속 굳어있더니,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종이를 받아들었다. 좋아. 얼른 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