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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어 경의 눈이 가쁘게 서약서를 훑었다. 종이를 얼른 받아들려고 너무 힘을 줬는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긴 하지만, 용케 받아든 종이를 안 구기고 있긴 하다.
의외로 표정은 아까보다 나아졌다. 최소한 더 이상 죽은 물고기 눈은 아니군.
아니, 심지어 읽을수록 표정이 좋아지는데? 마지막 문단을 읽을 때쯤에는 거의 눈이 몽롱해져서 번쩍번쩍 빛이 나오는 것 같았다. 무심코 눈을 비벼볼 뻔 했다. 세상에 요정왕이 따로 없구만.
근데 이게 저렇게 낭만적인 표정을 지을 내용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지극히 자본주의적이고 냉정한 내용인데? 내미는 순간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핑크빛 무드도 다 달아날 걸 각오하고 만들었는데?
내가 건넨 서약서의 내용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삼진아웃 제도’
그렇다. 중범죄는 아니지만 상대방에게 기만적인 행위가 벌어질 경우, 두 번까지는 반성과 조정의 시간을 가지지만 세 번째에는 아무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별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원인을 제공한 쪽은 재산 절반을 상대에게 상납해야한다...!
슬슬 무어 경이 ‘기만적인 행위’의 정의와 예시, 그리고 예외 사항을 다 읽은 것 같으니 추가로 적을 것을 이야기 해보자. 약물 같은 중범죄 관련 항목을 신설해야겠다. 으으윽, 설마 이걸 추가하게 될 줄이야... 원래 이 로판, 피폐물이었던 게 아닐까.
약간 현타를 느끼면서, 나는 한 번 헛기침을 해 주의를 끌었다.
우선 펜부터 가져가게 하자. 얘 종이 받아가는 데 정신이 팔려서 만년필을 안 받아갔어. 팔이 아파.
“크흠, 만년필... 좀 받아 가세요.”
“...!”
그러자 화들짝 놀란 무어경이 그때서야 만년필을 내 손에서 받아갔다. 나는 팔짱을 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다 읽으셨습니까?”
“...예.”
“질문하실 거나 추가하실 사항 있나요?”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무어 경이 대답했다.
“이 모든 내용은, 저희의 교제를 전제로 하는 겁니까?”
“제 추가사항이 받아들여지면요.”
무어 경이 장갑 낀 손으로 종이를 쓸었다.
“그, 그렇다면... 그것만 지키면...... 계속, 계속되는 거군요.”
“그렇죠...?”
근데 추가사항이 뭔 줄 알고요...? 내가 오년 뒤에 거세하기 같은 조건을 걸면 어쩌려고...? 최종보스를 싱겁게 물리쳐서 그런가, 이쪽도 현재 행복회로가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계속 함께...”
무어 경이 뭐라고 작게 속삭거리더니 미소를 짓는다. 나른한 그 뉘앙스가 약간 무서울 만큼 고혹적으로 몽롱하다. 요정력이 측정기를 터트리고 뻗어나간다.
순간 약물 사건도 잊을 뻔 했다. 지, 진정하자. 냉정하게 원래대로 간다! 그건 중범죄였어!
“추가사항은 이겁니다. 지금까지 무어 경은 약물 같은 극단적인 수단을 썼잖아요,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완전히 믿기가 좀 어려워졌어요.”
무어 경의 얼굴이 순식간에 식었다. 빠르게 행복회로가 박살나는 기색이 너무 역력해서 안타까울 지경이다. 그래도 할 말은 다 하자.
“제, 제가...”
“그러니까 무어 경은 기회를 하나 차감한다는 추가조항을 신설하겠습니다. 세 번째가 아니라 두 번까지로 고치는 거죠.”
무어 경이 눈을 깜박 거렸다. 어, 또 말 겹쳤네.
“그게... 전부입니까?”
“어, 그리고 물론 지금까지 벌인 일에 대해서 민사적인 보상이 있어야겠죠?”
“예, 예. 물론...!”
무어 경은 다급히 수긍하더니, 조심스럽게 또 되물었다.
“...그리고?”
‘그리고’는 붙일 생각도 없었는데... 으음.
“어, 그 다음은 없는데요... 왜요? 더 붙일까요?”
무어 경이 움찔 놀라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협박으로 들렸나 보다.
아니, 나는 그쪽이 덧붙이고 싶은 항목이 있냐는 뜻이었는데... 좀 머쓱해졌다. 아니 거 잘못은 그쪽이 했는데 왜 내가 압박하는 것 같지.
저 얼굴 때문인가. 역시 얼굴 탓인가.
“그럼 얼른 받아 적읍시다. 을은 종전의 행위에서 비롯된...”
무어 경은 군말 없이 죽죽 내 말을 받아 적었다. 전직 형사 쌍둥이에게 미리 예상지문을 물어둔 어제의 나를 칭찬하자. 아니면 말 더듬고 몇 번 고쳐 쓰다가 숙연해졌을 각이다.
크으, 그나저나 필체도 좋네. 왠지 글자가 필기감이 거의 없이 무슨 인쇄한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서약서의 공식적인 분위기가 사는 것 같긴 하다.
“...고려해 보상한다. 넵. 여기까지입니다.”
나는 완성된 서약서를 보며 뿌듯해했다. 그러자 무어 경도 어쩐지 뿌듯한 표정이다. 아니 선생님은 왜 뿌듯한 표정이세요...? 본인이 쓰고도 필체가 멋지다싶어서...?
모르겠다. 아무튼 이제 사인을 해라. 남주야.
“그럼 저기 아래에 서명해주시면 됩니다.”
“......”
“무어 경?”
무어 경이 쥐고 있던 만년필이 종이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조심스럽고 어두운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루카스 무어가 아닙니다.”
“...? 아, 그렇군요. 그럼 본명을 적으시면 되죠!”
루카스 무어는 그 위장용 이름이었나보다. 잘 됐다, 이참에 원래 이름도 알겠네. 나는 멀뚱멀뚱 남주를 쳐다봤지만, 여전히 만년필은 움직이지 않는다.
혹시 본명이 좀 거시기한가? 사생아라서? 막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돌쇠 같은 이름이야? 걱정 마세요. 얼굴이 요정왕이면 돌쇠도 오래 전 인간친구에게 받은 고풍스럽고 귀여운 이름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무어 경은 작고 딱딱한 목소리로 부정했다.
“...없습니다.”
“예?”
“본명이, 없습니다.”
“어... 그럼 어릴 때 불리던 호칭이라도...?”
“......”
침묵이 좋지 않은 과거사 떡밥이 되어 허공을 비상한다. 그러고 보니 사생아였다면 별로 좋은 호칭으로 불리진 않았을 것 같다.
무어 경은 결국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유년기 트라우마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탈룰라를 시전 했다.
“생각해보니까 본명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것 같아요. 현재 자기가 쓰고 싶은 이름이 중요하죠!”
저도 로제라는 이름을 쓴지 몇 주 안 됐거든요! 야 너두? 야나두!
“쓰고 싶은 이름 있어요?”
“......배우자의 이름으로 원하시는 게 있다면 그걸 쓰고 싶습니다.”
없다는 말을 참 세련되게 돌려 말하십니다.
아니 사실 저도 이 몸에 빙의한지 얼마 안 돼서요. 이 자리에서 뚝딱 이 세계관과 시대상에 딱 맞게 좋은 이름을 집어낼 수가 없어요..... 도무지 능력 밖입니다.
나는 머쓱하게 한 번 더 대답했다.
“아니 뭐... 이름이 중요한가요. 사람이 중요하지. 내가 아는 루카스 무어는 당신뿐이니까요. 그래도 찝찝하면 나중에 같이 멋진 이름을 만들면 되는 거죠 뭐.”
그리고 아직 법적 신분은 루카스 무어니까 이 서약서가 공증 효력이 있으려면 그 이름을 써야한다는 사소한 점이 퍼뜩 떠올랐다는 건 굳이 말하지 말자.
무어 경은 어쩐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가 아직도 빨갛다.
음, 그래도 가명으로 사인하는 건 찝찝할 수 있겠지? 그럼 대안을 쓰자!
“서명이 좀 그러면 지장을 찍는 건 어떨까요?”
“......”
왜 이번에도 대답이 없냐. 대체 남주의 불우한 과거사는 어디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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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는 검은 장갑 아래의 손등을 의식했다. 가죽의 밀도 높은 촉감이 스치며 흉터의 윤곽 또한 느껴졌다. 일괄적인 작업을 통해 인두로 새겨진 제물 낙인이었다. 지금은 그때의 통증도, 살이 타는 냄새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근래의 끔찍한 공포와 두려움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는 계속 손등을 의식하며, 눈앞의 로제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분명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가뜩이나 실망시킨 일이 많았는데, 이번에야말로 그 한계선에 다다를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손등의 문양을 보여주는 것도 싫었다. 그가 로제를 만나기 전에 느끼던 평이하고 단순한 ‘싫음’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그건 아주 복잡한 감정뭉텅이의 수렁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단어였다.
이 흉터처럼 보이는 낙인이, 그의 출생을 노골적으로 느끼게 만들지 않을까. 로제가 지금까지 말로만, 지식으로만 정리한 그의 과거를 더 적나라하게, 현실감 있게 느끼게 된다면.
그 수치심과 불안이, 논리적이지 않은 공포가 손등을 파먹는 기분이다.
하지만 남자가 간신히 ‘손가락의 장갑만 잘라낸다’는 얼토당토않은 방안을 떠올릴 때 즈음에, 로제가 덥석 장갑을 잡았다.
그러니까, 자신의 손을 잡은 것이다.
“...!”
“혹시 지문이 없는 건 아니죠?”
“아..., 아닙니다......”
그리고 로제는 장갑 낀 손 위를 주물렀다. 손가락 끝과 마디 사이, 그리고 바닥까지 꾸욱꾸욱 눌린다.
“...”
남자는 피부에 직접 닿은 것도 아닌데도, 마치 그 위에 촛농이 부어진 것처럼 참을 수 없이 뜨겁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이라는 고등단계에 접어들지 못한 흐느적거리는 감상들을 토해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로제의 손아귀에서 장갑이 밀려나는 것도 직후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밀려난 장갑 아래 맨살에 손가락이 닿았다.
“...!”
흐늘거리는 이상한 감각과 참을 수 없는 충동 같은 것이 손을 타고 전신을 돌아다니는 압도적 현상에 남자는 혀를 깨물 뻔 했다.
그 느낌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그는 그 부위가 손등이라는 것도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흉터에 손가락이 스쳤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