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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56화 (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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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에 닿은 손가락은 마치 미끄러지듯이 살짝 표면을 지나갔을 뿐이었지만, 남자는 어쩔 줄 모르겠는 충동 속에서도 확실한 달라짐을 느꼈다.

그것은 청명한 해방감이었다.

끈적거리던 녹슨 쇠사슬이 뇌에서 벗겨지는 느낌. 그의 일생동안 함께했기 때문에 당연한 것처럼 존재하던 그 저열한 감시와 구속이 농담처럼 손쉽게 벗겨져 녹아내린다.

단지 살결이 스친 것만으로도.

사생아는 손끝부터 시작해 전신의 극단까지 가득 채우는 경이로움에 작게 몸을 떨었다.

이윽고 그 경이로움의 근원지, 작은 손이 조심스럽게 떨어져나간다.

갈구하듯이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무서울 만치 사랑스러운 인영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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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단 웃자. 나는 내 무고함을 피력하기 위해 열심히 우호의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슬그머니 손을 뗐다.

저는 결코 고의로 흉터를 보려고 한 것이 아니며... 단지 혹시 선생님 손에 문제가 있나싶어서 살펴보려던 게 미끄러져서 장갑을 들추게 된 것입니다...... 결코 음흉하거나 무례한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크흐흡.

하지만 손등의 흉터가 드러나자마자 입술을 깨물던 무어 경은 아직도 대답이 없다...... 아무래도 이 흉터가 유년기 트라우마의 결정체였나 봐! 으아아악!

뭐라도 좋은 말을 생각해내보자 내 뇌야!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일단 왜 흉터가 생긴 건지 떠보는 말은 절대 하지 말고 되도록 걱정스럽지만 너무 과하지는 않은 정도의 뉘앙스로 가자!

“저기, 혹시 아직도 아프세요?”

그러나 장렬하게 실패했다.

방금 대사는 최악이었어. 보기 세 개가 떴다면 그 중에 유일하게 호감도 깎는 선택이었을 거야 아마. 내가 들었어도 싫었을 것 같어.

나는 계약서에 나와 관련된 조항이 추가된다고 해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해탈한 채로 남주의 기색을 살폈다. 이거 호감도를 떠나서 괜히 상처가 됐을 수도 있겠다싶어서 좀 걱정되는데...

하지만 놀랍게도 남주가 흉터에서 눈을 떼더니 이쪽을 마주 봤다! 심지어 웃으려고 애쓰는 표정이야!

“...예.”

이 대답이 내 망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아무튼 그럼 지금은 아프지 않다는 뜻인가? 사랑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전개야?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무어경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어쩐지 병아리가 알 깨고 나오려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다...!

그리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무어 경은 움직였다. 바로 오른손을 들어서, 내가 들춘 왼쪽 장갑을 벗겨내기 시작한 것이다! 떨리는 손이 여기서도 보였지만 괜한 소리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이윽고 선이 도드라지는 손가락이 드러났다. 햇빛을 거의 보지 않았는지 검은 장갑과 대조적으로 무척 하얀 피부였다. 와, 근데 장갑윤곽으로도 길쭉하니 크고 잘난 손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세상에 무슨 손톱도 잘생겼냐.

내가 감탄하는 사이 무어 경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엄지 끝에 잉크를 묻혔다. 그리고 서약서의 서명 란에 꾹 누른다. 이런 방식을 거의 안 해봐서인지 약간 서툰 동작이었지만, 어쩐지 후련하고 벅차 보였다.

근데 왜 날 계속 보고 있지? 아, 나도 서명을 해야 완성이지?

잠시 고민하다가, 나도 지장을 찍어버리기로 결심했다. 통일성 있게 가자.

꾹 눌렀다 떼니 그걸로 서약서가 완성되었다. 빨리 마르라고 후 입 바람을 부는데, 앞에서 반짝거리는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 청보라빛으로 빛나는 눈과 마주치자마자 번뜩 잊고 있던 원래 오늘 계획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반짝거리는 비싼 반지!

“서약서도 다 썼는데, 슬슬 제가 드린 상자 열어봐도 괜찮지 않을까요?”

무어 경도 무릎에 올려뒀던 상자가 퍼뜩 눈에 들어왔는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황급히 상자를 집어 들었다. 무어 경은 아직 잉크가 남은 자신의 엄지가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힘이 들어갔는지 힘줄이 도드라지는 손으로 신중하게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서 부드럽고 반짝이는 파란 빛보라가 물결쳤다.

“이건......”

엄지손톱만한 사각형 다이아몬드가 박힌 그 하얀 반지는 몹시 우아하지만, 알도 테도 굵어서 안정감이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이아몬드가 파란색이다. 엄청 비싸더라. 오죽했으면 자본력을 과시하고서야 소개해주더라고. 사실 파란 다이아가 있다는 것도 어제 처음 알았다.

“제가 정말 열심히 골랐습니다.”

나는 주접을 최대한 억누르며 뿌듯하게 한 문장만 말했다. ‘보는 순간 무어 경 눈색이 떠올라서 질렀죠! 가격이요? 어후, 석유왕이라는 걸 아는데도 계산할 때 손이 떨렸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하하하!’ 같은 말은 머릿속에서만 하도록 하자.

다행히 무어 경은 충분히 감명 받은 표정이다! 좋았어!

“껴보시고 잘 맞는지 알려주세요!”

“예, 예......”

무어 경은 홀린 것처럼 내 말대로 자신의 드러난 맨 손가락에 반지를 꼈다. 다행스럽게도 딱 맞았다!

......사실 중지에 낄 줄 알고 어림짐작해서 한 건데 약지에 꼈다는 건... 영원히 비밀로 하자. 무어 경은 내 예상보다 뼈대가 튼실했다......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지! 너무 뿌듯하구만!

스스로에게 건배를 보내는데, 반지를 다 낀 무어 경이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연다.

“로제의 반지는... 제가 끼워드리고 싶습니다.”

“......?!”

제... 반지요?

......안 샀는데?

맙소사 저 반지 보고 흥분해서 지르느라 내 걸 사는 걸 깜박했다.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무어 경을 쳐다보았다. 무어 경은 내 표정에 감격에서 벗어나 약간 당황한 눈치다.

어휴, 그냥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나는 어깨를 늘어트리며 우물거렸다.

“그게... 깜박하고 못 샀어요.”

“예?”

“아니, 그 반지 사느라 신나가지고......”

“......”

무어 경은 약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자신의 반지와 나를 번갈아보았다. 그리고는 살짝 시선을 내리깔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제가 구해드려도 될까요?”

“어, 무어 경이요?”

“예. 괜찮으시다면 제가 꼭, 가져오고 싶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신다면.”

이렇게 적극적으로 패물을 구해오겠다고 하다니, 좀 감동적이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같이 나가서 사요!”

무어 경은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눈을 들었다.

“예.”

그리고 눈썹을 찌푸리며, 흐드러지게 웃었다.

“꼭, 같이요.”

그러더니 약간 주저하면서도, 반지 낀 맨 손을 들어서 내 손등 위에 살짝 올렸다. 장갑 끼고 있을 때도 제법 했던 동작인데 생으로 하니 어쩐지 더 설레는 맛이 있다. 생각보다 감촉이 거친 것도 어쩐지 좋구만.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또 뿌듯해했다.

좋은 엔딩 클리세였다...!

이제 외전쯤에서는 사실 내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걸 밝히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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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자우어는 아주 평온한 상태였다. 저택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죄악과 마주했지만, 그런 죄책감에서 비롯된 고통은 지난 광증에 비하면 감미로울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을 마주할 때면, 평온 속에서 질식할 것 같기도 했다.

가령, 사용인들.

그들은 결국 옛 영주의 권속으로 완전히 변이하여, 무어 가의 사생아의 퇴거 주문에 의해 이 땅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하다못해 그들의 유가족들에게 보상해 줄 것도 없었다. 무어가의 선조가 이 저택을 지을 당시부터 걸어놓은 주문의 영향으로, 그들은 이미 모든 그들의 지인들로부터 잊혔던 것이다.

이 저택에서 오래 근무할수록, 변이가 진행될수록 그들은 인간이었을 때의 관계와 기억으로부터 멀어지는 그 섬뜩한 주문은, 정말로 섬뜩하리만치 깔끔히 상황을 정리해줬다.

부고소식을 전할 단 한 사람과의 관계도 남겨놓지 않고, 전부 망각 속에 파묻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 전직 형사라는 쌍둥이들이 쫒던 실종자 중에 이 저택의 사용인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로제에게 굳이 사용인들이 원래 인간이었다는 점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원래부터 괴물이었다는 전제 하에 대화를 진행했다. 괜한 부채감이나 죄의식을 주지 않으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엠마 자우어 역시 굳이 그 사실을 떠들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는 이 저택에서 사로잡힌 자신이 그들에게 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사용인들의 변이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저택 곳곳에 주술적 공간을 마련했었다. 너무 많이 변이되면 만일의 경우 제물의 숫자가 부족할 수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지나치게 많이 진행된 이들은 육류를 만지고 식사를 조리하게 만들어 오히려 오염에 더 노출시켰다. 일종의 버리는 패로 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마다 사용인들을 선별했던 것이 가장 역겨운 일이었다. 무어 가의 망령, 선셋에게 보내기 위해서.

이 모든 과정에서 그들이 맞이할 끔찍한 최후를 알았지만 매혹과 공포로 거부할 수 없었다.

생존에 대한 매혹, 권능에 대한 매혹.

죽음에 대한 공포, 권능에 대한 공포.

“......”

혹자는 어쩌면 그 역시 세뇌와 광기로 이용당한 희생양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엠마 본인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그는 이 사태의 유일한 생존자라고 볼 수 있는 로제에게 최선의 속죄를 하기로 했다.

“저기요,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요.”

무엇을 말하든지 묵묵히 따르기로.

“저 쌍둥이가 그러는데, 본인들이 하는 일에 꼭 고고학 지식이 필요하대요. 그래서 말인데,”

따르기로......

“저 둘하고 같이 일하시는 게 어떨까 하는데요?”

“......”

마담 자우어는 로제 오베르의 뒤에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애송이들을 보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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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도 다 정리했고 양어머니와 동업도 정해졌겠다, 쌍둥이는 바로 다른 지역으로 떠나기로 했다. 좀 아쉽지만 전화나 편지로 연락도 자주 할 거고 철마다 보고하러 온다니 깔끔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래서 드디어 오늘 아침 일찍, 둘을 배웅하기 위해 기차역으로 나왔다! 고풍스러운 기차역에서 이러고 있으니 모 마법학교 열차를 타는 애들을 배웅하러 온 가족이 된 기분인 걸?

마침 매표를 마치고 돌아온 해서가 자신의 남자 쌍둥이에게 표를 건넨다. 그리고 양어머니에게도 건네자, 아주 천천히 표를 받아들었다.

아, 물론 양어머니도 함께 간다. 내 요청에 묵묵히 고개만 끄덕인 뒤로 말이 없긴 한데, 특별히 싫은 기색을 비치지도 않는다.

제릴도 별 다른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배웅을 하러 온 걸 봐서는 큰 문제는 없는 것 같긴 한데... 어쩌면 월급 절반이 압류되는 것이 슬슬 실감나게 다가오며 마음이 심란한 걸지도 모른다.

“편지는 그 저택 주소로 보내면 되는 겁니까?”

“네넵.”

날이 더워진 만큼 가벼운 반팔셔츠 차림의 마이어가 씩 웃었다. 진짜 탐정이 된 그 금발미남은 약간 갈등하는 기색이었지만, 곧 조심스럽게 권유를 꺼낸다. 어제도 들었던 말이다.

“음, 이사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껄끄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괜찮아.”

아마 내 트라우마를 염려해주나 보다. 하지만 난 빙의한 몸으로 승리한 기억밖에 없어서 아주 괜찮다! 나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아, 근데 장미는 다 없애고 새로 심으려구요.”

사과나무 심기로 무어경하고 이미 합의 봤다. 봄에 사과꽃 피면 그 아래에서 이브닝키스해야지! 크으, 완전 시대극 한 장면 같을 듯.

나는 오늘의 쇼핑을 잔뜩 고대하고 있는 게 분명한 무어경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사람들을 배웅하고 나서 내 반지를 보러가기로 했거든!

장갑을 벗은 그 손에 내가 준 반지가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 잡고 있다. 반지가 어찌나 휘황찬란한지 손등의 흉터가 눈에 안 들어올 지경이다.

아니, 실은 반지가 아니라 얼굴이 휘황찬란한 것 같기도... 아니, 같은 게 아니라 그게 맞다. 얼굴이 이기고 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슬슬 그걸 안 꺼내오면 늦겠는데?

“저기, 저 잠시 군것질거리 좀 사러 갔다 오겠습니다. 맛있어 보이는 걸 봤어요.”

“그럼......”

“얼른 갔다 올게요, 잠시만요!”

나는 같이 가주겠다는 말을 꺼낼 것 같은 무어경을 말리고 얼른 뒤돌아 달렸다. 아까 캐비닛에 넣어뒀으니 멀쩡하겠지? 기차오기 전에 얼른 가져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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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자우어는 로제 오베르의 지시를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삶을 포기했다.

결국 옛 영주에게 죽을 운명이 되다니, 이것도 전부 업보일 것이다... 그는 퀭한 눈으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죽을 자리 찾아가는 여행이 되겠구나.

어제부터 그 기색을 눈치 챈 마이어가 그제야 말을 붙였다. 진짜 탐정이 된 그 전직 형사는 탐험욕에 가득 찬 상태였다!

“너무 표정이 안 좋군요. 마담. 그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

“그쪽이 해서처럼 조종당하는 와중에도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한 것을 이미 알고 있거든요.”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엠마 자우어는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힌 채 뺀질거리는 금발 애송이를 돌아보았다.

마이어는 계속 가방에 넣어두었던 카드목록을 휙 꺼내들었다. 그리고 쾌활하게 외쳤다.

“이 근무수칙, 사용인들이 괴물로 변하는 속도를 늦추기 위해 만든 것 아닙니까? 최대한 사람으로 남아있게 도우려고!”

아니다. 엠마 자우어가 사용인들의 변이를 조절하려고 했던 이유는 완전히 변하면 제물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로제는 변이가 생각보다 잘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대로 더 사로잡히게 만들기 위해 변이를 부추기는 조치를 했었다. 주기적으로 정원에 접촉시키고 육류 위주의 식사를 반드시 꼬박꼬박 챙겨 먹이며 결국 약까지 썼었지.

“아니야.”

하지만 탐정은 이미 넘치는 탐구욕으로 근무수칙을 머릿속에서 뒤적거리며 짜 맞추고 있었다. 저택을 치우며 주워들은 고대지식들을 바탕으로 얼추 추론을 시도해본 것이다.

가령 정원은 그 눈 세 개 달린 괴물의 영역이라 출입을 삼가게 만들었고, 정원사가 바로 그 괴물이라 접촉을 금지했던 것이다. 또 카메라는 괴이한 현상을 확인하며 오염이 더 빨라질 까봐 반입 금지였겠지?

하지만 몇 가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근데 몇 항목은 도무지 연관성을 못 찾겠습니다. 왜 정원에서 휘파람은 안 되는 겁니까? 그 괴물을 부르기라도 합니까? 실명은 왜 말하면 안 되고?”

“그리고 왜 15번은 없고 16번은 삭제된 건지도 궁금하군요. 의도적으로 공포심을 조장해 더 수칙을 잘 따르게 만들려는 심리트릭입니까?”

탐정의 본분에 맞는 자세였다. 적어도 마이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엠마 자우어는 갑작스러운 회상에 빠져들었다. 저 애송이가 처음 거론한 두 가지는 모두 그 정원의 망령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 소름끼치는 오래된 망령. 자칭 선셋. 자신이 숭배하던 유물처럼 붉은 빛깔의 장미에 집착했다. 아마 과거 융성했던 시절에는 무어가문의 상징물로 쓰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신의 황금기에 대한 집착이 옮겨간 듯이, 그 망령은 장미정원은 오로지 자신만 소유하고 즐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실명을 떠드는 건 암시에 잘 걸리지 않는 체질이라는 뜻이니,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그날 즉시 선별과정 없이 망령에게 넘겨졌었지.

그러나 이 모든 회상을 끝내도, 마담 자우어는 여전히 탐정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단순히 귀찮았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만든 적이 없는데.”

그가 저 근무수칙이라는 카드목록 자체를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조절을 위해 했던 모든 교묘한 지시는 집사를 통해 불문율처럼 전달되었으며, 아예 수칙으로 만든 적이 없었다. 나중에 바꾸기도 어렵고 증거도 남는 그런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예?”

잠시 스산한 침묵이 흘렀다.

신참 탐정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니, 이 카드목록... 해서도 받았던데, 그 저택 사용인들에게 배부되는 근무수칙 말입니다.”

마담 자우어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나는 배부한 적이 없구나.”

탐정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주변 사람들을 살폈다. 하지만 누구하나 이걸 만들었다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 이가 없었다. 오로지 해서만 그처럼 질린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탐정은 오싹한 기분으로, 미지의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이건......”

“자자, 이게...... 엥?”

탐정은 열차가 들어오며 불어 닥친 강풍에 근무수칙이 적힌 카드를 놓쳤다.

그리고 하필 그 카드는, 이쪽으로 다가오던 로제 아가씨의 얼굴에 정통으로 부딪혔다!

“맙소사...!”

탐정은 근무수칙에 적혀있던 마지막 수칙을 떠올리며 탄식했다. 그리고 뛰었다.

“억, 이게... 헉,”

고용주한테는 보여주면 안 된다고 적혀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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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물건을 들고 조심스럽게 걸어오던 도중에, 갑자기 웬 두꺼운 종이 쪼가리가 바람에 내 얼굴 위로 철썩 부딪힌 것이다.

난 단지 숨겨뒀던 서프라이즈용 기념 케이크를 무사히 초에 불 붙여서 운반하고 싶었을 뿐인데!

굉장히 민망하고 분위기 깨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

좋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종이를 때내고 케이크를 내밀자!

“억, 이게... 헉.”

그러나 실패했다.

한 손으로 종이를 떼어내다가, 초에서 앙증맞게 타오르던 불꽃이 카드에 옮겨 붙은 것이다.

완전히 망했다... 우아아악! 게다가 종이가 활활 타올라!

뜨거워!

“던져버리십시오!”

사람들이 당황해서 우왕좌왕 내 쪽으로 달려오는데, 무어경이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이거 잘못 던지면 기차역에 불날 것 같은데!

와악, 나도 모르겠다...!

나는 불붙은 종이를 케이크에 처박았다.

“......”

이미 거의 다 탄 종이를 너무 세차게 처박은 탓인지, 케이크가 엉망진창이 됐다. 새 출발을 기념하는 의미로 큼지막한 놈으로 골라왔는데... 한순간에 음식물 쓰레기가 됐어.

주변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상당히 민망하다.

그 와중에 제일 빨리 도착한 무어 경이 크림 범벅된 내 손을 뒤집어 살핀다. 저기, 그 비싼 반지에 크림이 묻고 있는데요...

아뇨 아무 것도 아닙니다. 흐뭇하니까 계속해주세요. 나는 돈에는 초연해지기로, 주변 시선에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네... 아주 멀쩡합니다......”

대신 케이크가 박살이 났다. 아쉽게 바라보는데, 마이어가 탄성인지 침성인지 모를 요상한 소리를 내더니 결국 허허 웃었다. 그리고 양어머니는 중얼거렸다.

“이런 거였군......”

의미심장한데...? 잠깐, 혹시 이거 중요한 종이였나? 나는 케이크 안에 처박힌 종이를 집어 들었다. 복원의 요정이 와도 뭐가 적혀있었는지 절대 알아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꼴이다.

“이거 중요한 종이였나요?”

집문서 같은 건 아니었겠지? 그런 크기는 아니었는데!

제릴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전혀 아니었어.”

“그, 그래.”

아니 자기 물건도 아닌데 이렇게 확답을...? 하지만 탐정도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다행이구만.

마지막으로 무어 경이 내가 집어든 종이 쪼가리를 부드럽게 빼내더니, 아예 우그러트려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행커치프를 꺼내서 내 손을 꼼꼼히 닦아낸다. 집중하는 표정이 도리어 아주 편안해보였다.

“다 됐습니다.”

무어 경이 내 손을 닦아낸 행커치프를 대충 챙겨넣더니, 크림 때문에 아직 매끈거리는 내 손가락 끝에 살짝 입 맞추었다.

크으윽, 너무 달달한 거 아닌가? 아냐, 즐기자! 이 정도는 공공장소에서도 괜찮지?

그리고 이 광경을 점잖게 외면 중이었는지, 해서가 제일 먼저 상황을 파악했다.

“열차가 도착했군요.”

이 와중에 또 열차가 역에 완전히 멈춘 모양이다. 감동적이고 멋진 배웅은 완전히 물 건너갔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래도 개그와 로맨스를 동시에 잡긴 했어. 이것도 전형적인 엔딩씬이지!

〈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 完

========== 작품 후기 ==========

로제와 함께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 편 후기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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