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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4화 (14/237)

14화

<리브라 (2)>

북쪽으로 줄지어 향하는 마차의 행렬을 본 사미르가 흥미를 보이며 말했다.

“상당한 명문가들이 많네요.”

“명문가?”

사미르는 라데우스의 집사인 만큼 아는 것도 많았다.

“네. 저건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가인 리브레히트 공작 가문의 문장이에요. 그리고 저건 남방 수인(獸人) 가문으로 유명한 바하무트 가문. 오오, 연금술사 가문인 체펠리 가문의 문장도 있네요!”

‘물론 저것들을 다 합쳐도 라데우스에 비할 바는 못 되죠!’라고 말하긴 했는데…….

‘그럴지도 모르겠군. 명문가라 자처하는 자들이 전부 가문의 육성 시설로 들어온 걸 보면…….’

물론 가문을 이을 진짜 후계자급은 보내지 않겠지만 레이스에 탈락한 이들이나 방계 정도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당연하지만 혼자 도전하는 놈은 거의 없군.’

산맥의 입구에 이르러 딱 봐도 귀한 집 자식으로 보이는 녀석들과, 그런 녀석들을 둘러싸고 있는 호위들이 즐비하다.

네르하는 마차에서 내리며 사미르를 돌려보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물론 전문적인 등반 장비 정도는 갖추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법적인 장비나 전문가의 도움 없이 저 높은 산을 등반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몇 번을 말해? 어차피 가장 주의해야 할 건 호흡 문제뿐이야. 나머지는 딱히 걱정이 안 된다고.”

일반인이나 별다른 무공을 익히지 않은 초짜가 너무 높은 산에 등반했을 때 호흡이 급격히 흐트러지거나 심하면 각혈까지 하는 증상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서장을 넘어 만년설이 내리는 거대한 산맥까지 탐사해 봤던 네르하에겐 그다지 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흠…….”

그렇게 사미르를 돌려보내고 난 뒤, 가볍게 정체를 숨긴 네르하는 주변을 둘러보며 입소 희망자들을 살펴보았다.

‘썩 마음에 드는 놈들이 없군.’

나름 허우대는 멀쩡한 녀석들은 꽤 있었지만 네르하의 기준에 찰 만한 인재는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품고 있는 기운은 제법 많은데 딱 그것뿐인 놈들이로군.’

명문가의 자제들이 흔히 보이는 유형이다.

질 좋은 영약을 잔뜩 처먹고 고급 내공심법을 익힌 탓에 내력은 상당하지만 육체의 단련이 내력을 따라가지 못해 움직임이 영 어설프다.

차라리 전에 마주했던 배커와 제크론이 인재로 보일 정도였다.

‘좀 장래성이 괜찮은 놈들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네르하는 리브라에 들어가서 그냥 자신의 실력 향상만을 목표로 할 생각이 없었다.

거기서 싹수가 있는 놈들을 밑으로 끌고 와 차후, 가문 내에서 세력을 만들 생각이었다.

물론 후기지수 수준으로는 가문을 장악할 때 큰 도움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잘 뽑아 두면 시간이 지날수록 가문의 중추에 오를 가능성도 크지 않겠는가?

‘여기서는 딱히 볼만한 놈들이 없군.’

산맥의 입구가 여기만은 아니니 다른 쪽에서도 사람이 몰려들겠지만 적어도 여기서 네르하의 기준을 통과한 녀석은 없었다.

저벅, 저벅.

‘어, 잠깐?’

순간, 네르하의 눈이 막 산을 오르려는 한 인영(人影)에게로 향했다.

‘혼자인가?’

수행원을 덕지덕지 달고 있는 이들과는 다르게 네르하처럼 혼자서 도전하고자 하는 기세가 느껴진다.

네르하는 그 상대에게 흥미를 느끼고는 관찰을 위해 조금 다가갔다.

‘여자로군!’

아무렇게나 묶은 금발 사이사이에 머리카락을 거칠게 자른 흔적이 보인다.

‘검수인가? 육체의 단련 방향을 보면 딱 검을 배운 것 같은데?’

전신을 방한 장비로 무장하고 있지만, 네르하의 눈을 속일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눈에 보이는 별다른 무장이 없는 데다 본격적으로 검을 배운 이가 마법사 육성 기관에 들어갈 리는 없으니 오판일 가능성도 있었다.

“후우, 가 볼까?”

네르하의 또래로 보이는 금발의 소녀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본격적으로 산에 오르려는 듯 보였다.

그때였다.

“이보시오, 아가씨.”

“……?”

누군가의 수행원으로 보이는 호위가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 호위는 손가락을 들어 어떤 귀티 나는 소년을 가리켰고, 뭐라뭐라 손짓 발짓을 하며 소녀를 설득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거절합니다. 저 혼자 힘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살짝 인상을 쓰며 고개를 내저었고, 한번 거절당한 호위는 그대로 돌아갈 줄 알았더니…….

“당신을 초대하신 분은 리브레히트 가문의 셋째 도련님이시오. 그분께서 정중하게 아가씨를 초대하셨으니 순순히 응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소녀를 둘러싸며 두 명의 남자가 추가로 붙어 버렸다.

‘개판이군.’

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주변이 전부 동기나 경쟁자가 될 수도 있는데 저런 추태라니.

“말귀를 못 알아들으신 겁니까?”

“거칠게 손을 쓰고 싶지는 않소.”

“제겐 일행이 있습니다.”

“일행?”

호위 한 명이 피식 웃으면서 그녀를 비웃었다. 확실히 딱 봐도 혼자 올라가려던 것이 눈에 보였는데 무슨 그따위 변명을 하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실례지만 그 일행분이 누구시오?”

“저분이십니다.”

“……어?”

네르하는 순간, 멍하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방향. 그건 바로 네르하 본인이 서 있는 방향이었다!

소녀는 신형을 돌려 네르하에게 다가왔다.

‘어? 왜 나한테 와?’

순간, 네르하는 소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강인한 눈매는 여전했지만 동공 안에 ‘제발 도와주세요’라는 간절한 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네르하가 짜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 어느새 네르하의 눈앞에 도착한 소녀는 대번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먼저 리브라에 올라가신 줄 알았습니다!”

“…….”

“이 루시아, 도련님께서 길을 잃으셨을까 봐 무척이나 걱정했어요.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

혹시나 말이 어긋날 때를 대비해 자기 이름까지 밝히는 치밀함. 그리고 애먼 사람을 길치로 만들어 버리는 저 뻔뻔함.

‘허 참.’

이쪽의 뭘 보고 대체 저런 시답잖은 연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르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네르하는 살짝 헛기침을 하며 말을 받았다.

“그래. 루시아,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걸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올라가려 했느냐?”

만약 다른 어중이떠중이가 이런 짓을 했으면 아주 철저하게 개쪽을 줬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하긴, 네 덜렁거리는 성격을 고치는 건 정말 어렵지. 암, 그렇고말고.”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루시아는 눈을 부릅뜨며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네르하는 ‘뭐, 어쩌라고?’라는 눈으로 마주 보아주었다.

짧은 시간 동안 두 남녀의 신경전이 이어졌고, 당연히 먼저 항복 의사를 밝힌 건 루시아였다.

“그, 그렇지요. 도련님께서 신경 써 주시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하고…….”

“그래그래, 그러니 앞으로는 너무 앞서 나가지 말았으면 좋겠어.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곤란하잖아?”

“…….”

루시아라고 이름을 밝힌 소녀가 홀로 있는 웬 소년과 다정다감하게 대화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리브레히트 가문의 셋째인 알페온 리브레히트는 속이 뒤집히는 걸 느꼈다.

“뭐가 도련님이야! 저 새끼도 혼자잖아!”

나름 예리한 지적이었다. 명색이 도련님이라 불리는 이들은 못해도 다섯 이상의 수행원들을 데리고 왔으니까.

모자로 머리카락 색을 숨기고 적당히 껴입은 탓에 그 누구도 네르하의 정체를 추측하지 못했다.

은갈색의 머리카락은 라데우스의 상징이었으니 모자만 벗었어도 아마 정체가 까발려졌겠지만…….

“보탄! 날 능욕한 저 잡놈들을 잡아 와!”

“알페온 도련님,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좋지 않습니다. 보는 눈이 너무 많습니다.”

“닥쳐! 다른 삼류 가문 출신들이 뭐라 하든 난 리브레히트다! 당장 명령에 따르지 못해?!”

네르하는 알페온 리브레히트의 땡깡을 보며 살짝 입을 벌렸다.

‘……와.’

나름 동갑 정도로 보이는데 저 나이가 되도록 저렇게 개념이 없는 건 정말 간만에 본다.

아무리 망나니라도 하다못해 바깥에서는 품위 정도는 신경을 쓰기 마련인데 말이야.

“미안하오.”

알페온의 어거지에 결국 호위들은 네르하와 루시아를 포위했다.

“얌전히 도련님께 용서를 구하시오. 그러면 큰 화는 면할 것이오.”

“…….”

네르하는 순간, 갈등에 잠겼다.

‘어떻게 할까?’

확실히 명문가의 호위라서 그런지 하나같이 실력이 만만치 않다. 기습을 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겠지만 정면으로 붙으면 압승을 장담하긴 힘든 상대.

‘그냥 정체를 밝힐까? 이 꼬맹이도 그걸 알아차리고 내게 붙은 것 같으니…….’

하지만 결과적으로 네르하가 먼저 정체를 밝히지는 않았다.

돌아간 줄 알았던 사미르가 마차에서 튀어나오며 네르하에게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네르하 도련님! 이거 놓고 가셨……. 어라?”

“네, 네르하? 네르하 라데우스?!”

호위들은 경악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 기수에서 라데우스의 유일한 직계인 네르하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었다.

“어라?”

사미르는 네르하를 중심으로 갑자기 썰렁해진 장내의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그렇게 분위기는 정리되었다.

알페온 리브레히트는 ‘새끼’라고 욕질을 한 도련님의 정체가 네르하인 걸 알자마자 꼬리를 내렸다.

아무리 알페온이라도 라데우스를 상대로는 승산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네르하 도련님.”

“흐음.”

그리고 금발 말총머리의 소녀, 루시아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네르하에게 감사를 표했다.

“내 정체가 네르하 라데우스인 걸 어떻게 알았지?”

네르하의 물음에 루시아는 살짝 웃으면서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제가 좀 눈썰미가 좋거든요. 아무리 모자를 써도 라데우스의 상징인 은갈색의 머리카락을 완전히 가리진 못하셨으니 당연히 눈치챌 수밖에요.”

“호오?”

그게 말이 쉽지, 특정하게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보지 않는 이상 알아차리기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색감은 좀 다르더라도 이번 년도에 입소하는 은갈색 머리카락이 네르하 혼자가 아니었기에 더더욱.

“하지만 내가 순순히 도와줄 거란 예상은? 그냥 무시하거나 아예 더한 쪽을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했잖습니까?”

루시아의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전 눈썰미가 좋다고.”

“무슨 뜻이지?”

“그렇게 뜨거운 눈으로 절 보셨으니 그냥 타인처럼 넘어가진 않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

“물론 그 시선이 그 알페온이란 놈처럼 욕망이 섞인 탁한 시선이 아닌 탓도 있지만요.”

‘이거 놀랍군.’

설마 그 거리에서 자신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이용해 먹었나?

여러모로 이 나이대가 보일 만한 눈썰미가 아니다.

‘상당한 재능이다.’

마법사가 아니라 스카우터나 레인저 같은 직업을 골랐으면 아마 대성하지 않았을까?

네르하는 루시아란 소녀에게 받은 흥미가 더욱 깊어지는 걸 느꼈다.

“혼자 올라갈 생각인 것 같은데 심심하면 내가 말 상대나 되어 줄까?”

“죄송하지만 추파는 사양이라서.”

“그런 의미는 아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가 편한 건 사실인지라.”

루시아는 자연스레 네르하에게서 멀어지며 산맥의 입구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은혜는 언젠간 갚겠습니다. 당신도 리브라에 들어가실 테니 곧 다시 만나게 되겠죠. 시간은 많으니까요.”

“저, 저, 저런 은혜도 모르는 여자가!”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사미르는 루시아의 태도에 손가락질을 했지만 네르하는 피식 웃으며 사미르를 제지했다.

“괜찮아. 저 녀석 말대로 시간은 많으니까.”

뭐, 어지간해서 떨어질 일은 없을 테니 짧아야 오늘 안에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네르하 역시 천천히 팔라레스트 산맥에 등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반나절이 지난 후, 네르하는 무사히 리브라에 도착했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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