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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52화 (52/237)

52화

<아녜스 (2)>

네르하는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다.

‘보자마자 대놓고 날 지목하다니.’

갑작스런 아녜스의 행동에도 엘림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잠깐. 이 일행의 책임자는 나요. 터무니없는 착각을 한 듯싶군.”

“착각이라고요?”

아녜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은은한 노기가 흘러나왔다.

“제가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하나 사람을 잘못 볼 정도로 눈이 삐지는 않았습니다.”

페텔과 헤젤에게서 듣긴 했지만, 그 말마따나 귀족으로 보이는 것치고는 입이 꽤 걸쭉한 소녀였다.

“협상권자는 저분이 맞습니다. 계속 절 기만하시겠다면 더 이상의 협상은 없습니다.”

아녜스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네르하와 다른 일행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내 실력을 간파한 건가? 저 어린 소녀가?’

그 누구도 이렇게 만나자마자 네르하의 진면목을 보진 못했다.

단순히 찍기라고 보기엔 지나칠 정도의 확신.

‘상대의 실력을 알 수 있는 특수한 마법이나 동술을 익혔나? 그렇지 않고서야…….’

뭐가 되었든 상대가 저렇게 나오자 엘림은 한 발짝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저 친구가 우리의 우두머리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를 물을 수 있겠소?”

대답은 금방 들려왔다.

“기품(氣品).”

엘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당신의 부하라고 보기엔 힘들 정도로 오만할 정도의 자신감. 그리고 타인의 위에 선 자만이 내보일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 저는 저 사람에게서 그런 기품을 읽었습니다.”

엘림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매우 놀랐는지 눈을 부릅떴다.

사실, 그들에게 있어 네르하의 존재는 임무와는 별개로 정말로 그 설명에 걸맞은 위치에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내 실력을 알아챈 건 아니군.’

그래도 네르하 역시 나름 놀랐는지 새삼스러운 눈으로 아녜스를 바라보았다.

‘내게서 그런 분위기를 읽었다는 건 본인 역시 그런 환경에서 자라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일 텐데 말이야.’

상대가 네르하 본인처럼 환생 혹은 전생 같은 특별한 일을 경험하지 않는 이상에야.

뭐가 되었든 네르하가 나서지 않는 이상 상대는 대화를 이어나갈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이 자리가 파투 나면 곤란해지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인지라 엘림은 살짝 곁눈질로 네르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의 의미를 모를 네르하가 아니었다.

“눈썰미가 좋군.”

마치 처음부터 아녜스를 시험했다는 어조로 네르하가 천천히 앞으로 나와 엘림의 앞에 섰다.

“내 이름은 하르넬이다.”

네르하라는 이름을 뒤집어 철자 몇 개 붙인 것이었지만 나름 보편적인 이름이니 딱히 의심할 건더기는 없었다.

“하르넬 님이시군요. 저는 아녜스라고 합니다.”

“좋아. 이쪽에 앉지.”

네르하는 아주 자연스레 비어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아녜스를 향해 반대 자리를 권했다.

그와 동시에 아크의 마법사들이 네르하의 뒤에서 충성스러운 표정과 함께 ‘부하다운’ 연출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이번 일은 유감이라고 말해 두지. 저들은 내 가문에서 나름 기대를 받는 유망한 인재들이거든.”

리브라에 들어와 전투 마법사 교육을 받는 만큼 어쨌든 네르하의 말엔 틀린 게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아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재치고는 너무 허접하던데요?”

“……아직 실전 경험이 모자라서 말이야.”

뒤에서 페텔과 헤젤이 부들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뭐, 확실히 죽이지 않았던 게 정답이었군요. 뒷골목의 두목치고는 지나치게 젊다 싶더니?”

“그렇기에 우리가 이렇게 한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지.”

네르하와 아녜스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어쨌든 이쪽 역시 이번 일은 대단히 유감입니다. 저희는 이번 일을 길게 끌 생각이 없으며, 적당한 선에서 보상을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녜스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맺혔다.

“그쪽의 가문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정확히 알려 주신다면 더욱 원활한 협의가 가능할 듯싶습니다만.”

……어쭈?

“너무 날로 먹으려는 것 아닌가? 그쪽이야말로 자신들의 이름을 밝힐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말이야.”

설사 상대가 가문 이름을 밝힌다고 해도 이쪽은 밝힐 수가 없다. 라데우스의 상징인 은갈색 머리카락은 이미 평범한 갈색으로 염색했으니 들킬 일이 없을 터.

네르하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아녜스를 노려보았다.

“보상을 운운했으니 먼저 우리의 요구 조건을 말하지. 우리 쪽의 소중한 인재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은 관계로, 그 치료비와 위자료를 포함해 금화 10만 골드 정도가 적당하겠군.”

“시, 십만?!”

“미래의 대마법사가 될 인재들인데 그 정도는 받아야지 않겠나?”

우리가 그 정도로 유망했나?라며 두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건 살며시 무시하고.

아녜스 역시 말도 안 된다는 듯 탁자를 내리치며 거칠게 항의했다.

“웃기는 소리! 이 일은 저들이 저를 무단으로 미행하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애초에 잘잘못을 따지면 그쪽이 먼저 잘못한 것인데 무슨 되지도 않는 바가지를 씌우는 겁니까!”

“저 두 사람이 아무런 확증도 없이 널 미행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데? 분명 뭔가 수상한 점을 발견했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

아무런 확증도 없는 미행이 맞았다.

하지만 정황만으로 보면 나름 타당한 의견이기도 했다.

“그, 그건…….”

“너희들이 이 도시에서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미행 조금 했다고 죄가 되진 않지. 그렇지?”

“무, 무슨! 당신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흑마법의 흔적……. 아차!”

“아가씨!”

뒤에 있던 중년의 기사가 아녜스를 책망했다.

동시에 네르하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고작 10만 골드라는 말에 낚여 곧바로 허점을 드러내 주다니.

“흑마법사라, 그게 뭔데?”

“아, 아니… 그게…….”

아녜스는 순간, 말문을 잃고는 허둥지둥거리기 시작했다.

‘저 꼬마의 허접한 협상 능력과는 별개로 저놈들이 속해 있는 가문, 혹은 조직의 정보 수집 능력은 제법 대단하군.’

더 이상 두고 보기 힘든지 뒤에 있던 중년의 기사가 자리에 난입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책임자’들끼리의 대화에 무슨 참견이지?”

잔뜩 심술이 붙은 네르하의 말투에 상대는 더더욱 시선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방금 전, 아가씨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중년의 기사는 자신의 이름을 ‘오르닐’이라고 밝힌 후, 정중하게 네르하에게 허리를 숙였다.

“저희는 당신들의 행사를 방해할 생각이 없습니다. 훼방을 놓을 생각 또한 없습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저희 가문에 관련된 누군가를 찾으러 왔을 뿐 절대로 다른 마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더 이상 두고 보다간 완전히 말려들겠다 싶었는지 오르닐이란 중년 기사는 솔직하게 이 도시에 온 목적을 밝히며 사죄를 청했다.

“사죄금이 필요하시다면 저희의 여비를 모두 털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이대로 넘어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기사로서의 자존심을 굽히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

주군을 위하는 부하의 모습에 감동을 받……기는 개뿔.

‘신무조’라면 어느 정도 참작을 해 주겠지만 지금은 ‘네르하’의 입장이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지.”

“……무엇을 원하십니까?”

오르닐의 표정이 무너졌다.

동시에 뒤에 있던 엘림이 조마조마한 기색으로 네르하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너희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거 없고, 제안 한 가지만 하지.”

“무슨 제안 말씀이십니까?”

“만약 우리가 일을 벌일 때 너희들이 그때도 이 도시에 남아 있다면, 딱 한 번에 한해 너희들의 무력을 빌려주었으면 좋겠어.”

“그건.”

“아, 물론 공짜는 아니야. 만약 그런 상황이 오면 그에 걸맞은 대가는 지불하지. 너희가 말한 흑마법사는 대륙의 공적이니, 대륙 협약에 따라 협조할 의무가 있잖아?”

“처음부터 대가를 받으실 생각은 없으셨군요.”

네르하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하아, 좋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만약 당신들이 흑마법사와 전투를 벌일 시, 우리가 그 장소에 있다면 얼마든지 힘을 빌려 드리죠.”

“너와 네 주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나?”

오르닐이 고개를 돌려 아녜스를 바라보았다.

아녜스 역시 그 제안을 듣고는 잠시 고민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선선히 승낙했다.

“좋아. 계약 성립.”

* * *

“네르하 라데우스, 네 목적은 처음부터 저놈들의 배제였군.”

모든 협상이 끝나고 엘림이 네르하에게 말을 걸어왔다.

“네. 어차피 이런 일로 거대한 대가를 받을 수도 없고, 원래라면 서로 적당한 선에서 모른 체하며 갈라섰을 겁니다.”

“그럼에도 굳이 조건부로 뭔가를 얻어 낸 건…….”

“겸사겸사죠.”

네르하는 서늘한 표정으로 아녜스와 그 기사들의 모습을 상기했다.

“놈들이 우리의 정체를 알지는 못하지만, 흑마법사를 언급한 시점에서 얼추 눈치 정도는 챘을 겁니다.”

“으음.”

“다만 일의 선후가 반대로 된 것이, 저들은 이미 우리보다 먼저 이 도시에 와서 깽판을 쳤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와중에 흑마법의 낌새를 느꼈을 겁니다.”

페텔과 헤젤의 말대로 혼자 돌아다니는 아녜스가 아무런 해코지도 당하지 않았다는 건, 이미 대략적으로 청소가 끝났다는 의미였다.

‘이거 전략의 수정이 좀 필요하겠는데.’

네르하가 원래 세운 계획은 어디까지나 암흑가를 수중에 넣고 점차 정보망을 확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저들이 먼저 암흑가 쪽을 일부나마 청소했다면, 후발 주자로 그쪽에 접근했을 때 정체와 행적이 노출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또한 ‘흑마법사’가 아닌 ‘흑마법’을 언급한 건 저들 역시 얻어 낸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라는 뜻.’

생각을 정리한 네르하는 엘림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가 됐든 저들이 말한 자신들의 목적이 사실이라면 우리와 얽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빠르게 일을 정리하고 이 도시를 떠날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꼼짝없이 관계없는 일에 휘말릴 테니까.”

“네. 선뜻 제 제안을 받아들인 걸 보면 저들은 이미 이 도시에서 할 일을 대부분 마쳤을 겁니다.”

결국 이번 협상에서 네르하가 얻은 것은 변수의 제거.

변수가 될 수 있는 12인의 실력자들을 판에서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후우, 다행히 별 탈 없이 저놈들이 친 사고를 수습할 수 있게 되었군.”

엘림과 아크의 마법사들은 큰 고비를 넘겼다는 듯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향해 네르하는 멋쩍은 미소로 거대한 돌덩이를 투하해 버렸다.

“그게, 어쩌면 일이 더 복잡해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뭐? 어째서지?”

“어디까지나 우리는 비밀 임무를 위해 이 도시에 왔죠.”

“그렇지.”

“하지만 정황상 저 기사 놈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깽판을 치며 이 도시 내부를 휘젓고 다녔을 겁니다.”

아녜스가 아무런 노림도 받지 않은 걸 보면 확실하다.

고위 마법사인 엘림이 평가하길, 아녜스를 따르던 오르넬이란 기사는 자신조차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실력자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놈들이 열 명 이상.

그 말인즉, 이 도시 내부에선 누가 와도 어찌할 수 없는 재앙과도 같은 무력을 가졌단 소리다.

“설마?!”

“네. 놈들의 행적은 도시 상층부나 지하 조직들의 정보망에 무조건적으로 포착되어 있을 겁니다.”

그런 놈들이 마침 우리와 접촉했네?

그 순간, 네르하 일행에 대한 정보가 노출되었을 것이 분명했고 뭐가 됐든 어디에선가 분명 반응이 올 것이다.

“실례하겠습니다.”

똑똑똑!

그리고, 그 반응은 네르하조차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찾아왔다.

“그렌 타운 시장, 켈릭스 라구엘 님의 비서인 고바라고 합니다. 위대하신 라데우스의 영웅들을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

“…….”

“시장님께서 라데우스의 영웅분들을 만찬에 초대하셨습니다. 부디 거절하지 마시고 만찬에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시면 후대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시장의 비서라는 놈의 입에서 ‘라데우스’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엘림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페텔기우스! 헤젤!”

그리고 그 분노는…… 사고를 친 당사자인 두 명의 선배에게로 향했다.

‘어음…….’

네르하는 조짐당하기 시작하는 두 선배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임무, 망한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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