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크림슨 (1)>
‘의외로군.’
네르하는 잘근잘근 짓밟히는 페텔과 헤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도시 시장의 정보력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야.’
이런 범죄 도시에서 시장이란 지위가 의미하는 것은 단 두 가지다.
범죄 조직의 괴뢰, 그게 아니면 실질적인 지배자.
아녜스 일행과의 협상이 끝나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리 찾아온 걸 보면, 아무래도 후자 쪽에 더 무게가 실린다.
‘우리 정체가 라데우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라.’
이렇게 되면 도시 상층부가 판데모니움과 연결되었냐에 따라 임무의 난이도는 극과 극으로 나뉠 게 분명했다.
‘가능하면 아니면 좋겠는데 말이야.’
네르하는 페텔을 구타하는 걸 멈춘 엘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엘림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뭐라 확답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겠지. 이미 이번 미션은 실패 직전에 몰려 있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돌파구는 단 하나뿐이다.
“엘림 대장님!”
“응? 뭐, 뭐냐, 네 아니, 하르넬.”
“시장님의 제안을 수락하시죠. 이 도시에 오기까지 뭔가 제대로 된 걸 먹지도 못했잖습니까?”
“그러, 냐?”
“저와 선배님들은 이곳에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수습인 저희가 가봐야 별로 할 것도 없고, 시장이나 돌아다니면서 ‘편하게’ 배나 채우겠습니다.”
“……!”
네르하의 말에서 뭔가 계획이 있다는 걸 느낀 엘림이 눈을 반짝였다.
“으음, 우리가 빠진다면 너희도 ‘마음껏 편하게’ 있을 수 있겠지.”
“하하하…….”
네르하는 속셈이 들킨 악동처럼 헤프게 웃음을 흘렸다.
엘림이 고개를 돌려 비서인 고바를 바라보았다.
“좋소. 다만 지금 당장 좀 곤란하고…… 만찬을 준비하는 데도 시간이 걸릴 테니 준비되면 그때 다시 오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저녁에 다시 오겠습니다.”
고작 반나절의 유예 시간을 준 고바는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여관을 나섰다.
그리고 엘림은 고바가 멀리 떨어졌다는 걸 확인하자 굳은 표정으로 네르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르하 라데우스, 네 뜻대로 시장의 초대에 응했다.”
“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제 의견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임무는 실패다. 뭐라도 해 봐야지. 그보다 네 계획이 뭔지 궁금해지는데?”
“네. 일단 기존에 세운 대전략이 무너진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1안이 무너졌다고 2안 없이 들이박는 건 책략가로서 하수다.
“일단 세 가지 이유로 이번 미션은 진행이 가능합니다.”
“뭐지?”
“첫 번째로, 우리가 밑바닥부터 들쑤신다 해도 결국 언젠가는 시장에게 정체를 들켰을 겁니다.”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상대는 우리가 라데우스라는 걸 알고 있다.
“두 번째로, 이렇게 걸린 것을 보면 시장의 도시 장악력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걸 미리 알게 된 셈이고.”
네르하가 마지막 이유를 말했다.
“마지막으로, 설사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시장은 절대 우리를 훼방할 순 없다는 거죠.”
“하지만 네 말에는 모순점이 있다.”
엘림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처음에 예상했던 대로 이제 우리의 정보가 케프렌으로 넘어가는 건 막을 수가 없다. 또한 도시 상층부가 정말로 흑마법사와 연관이 되어 있다면 우리의 움직임은 놈들에게 일거수일투족 감지당할 텐데?”
“케프렌에게 정보가 넘어가는 건 어디까지나 좀 꺼림칙한 흠집일 뿐 이번 임무의 실패 조건은 아닙니다.”
“…….”
“이번 임무의 실패 조건은 흑마법사들을 놓치는 것. 놈들이 우리 생각보다 강대한 힘을 가져서 이쪽이 전멸하거나, 아니면 놈들이 우리에게 대항하는 걸 포기하고 이 도시에서 도망치거나.”
케프렌이 끼어들든 시장이 뭔 짓을 하든 이 실패 조건을 만족하지 않는 이상 임무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다만 임무가 어려워졌다는 건 확실하죠. 그러니,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입니다.”
네르하는 의아해하는 엘림에게 이렇게 물었다.
“엘림 대장께선 그 아녜스란 소녀와 기사들이 케프렌 소속일 가능성을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그놈들 말인가?”
엘림은 네르하의 물음에 입을 가리며 생각에 잠겼다.
“반반. 하지만 나는 아닐 거라 생각한다.”
“어째서입니까?”
“그 아녜스란 꼬맹이 때문이지.”
엘림의 설명이 이어졌다.
“만약 오르넬이란 놈이 우두머리로 있었다면 그들이 케프렌일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두었겠지. 하지만 그 아녜스라는 꼬마가 케프렌 소속이라면 절대 지금 상황에서 이런 외곽 지대에 나타날 수는 없다.”
“어째서죠?”
“그 나이대 케프렌 혈족들은 십중팔구 검의 낙원에 소속되어 있을 테니까.”
검의 낙원.
리브라와 경쟁 관계를 구축한 케프렌의 최고위 기사 육성 기관.
“게다가 내가 알기론 케프렌의 직계 중에 그런 인상을 가진 소녀는 없다. 물론 대외에 공개하지 않은 자식들이 존재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다만.”
확률로 따지면 낮은 편에 속하지만 가능성이 0은 아니라는 소리.
“일단은 그들이 케프렌 소속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들은 우리의 목적이 흑마법사라는 걸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순순히 제안을 받아들이고 물러갔죠.”
“……으음!”
“만약 그들이 케프렌 소속이 맞다면 설사 우리가 일을 벌여도 본가에 보고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유는?”
“마찬가지로 아녜스라는 녀석의 존재 때문이죠.”
네르하가 씨익 웃으며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들은 아니, 아녜스는 분명 개인적인 이유로 이 도시를 찾아온 것일 테니까요.”
“……!”
“공적인 일이 아닌 사적인 일. 그렇기에 이런 무법 도시에 아녜스라는 특이한 인물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겁니다.”
엘림은 네르하의 추측이 상당히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도시의 시장은 그들의 존재 역시 알고 있을 겁니다. 만약 그들이 케프렌이라면 우리와 접촉한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따로 본가에 연락을 넣어 정보를 판다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겠죠. 이미 두 세력이 합의를 봤다고 여길 테니까요.”
“그렇군!”
엘림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표정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다만 그들이 케프렌이 아닐 경우는 어떻게 하지? 사실, 이쪽일 확률이 더 높지 않나?”
“네. 그렇긴 하지만 딱히 이쪽이라도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어차피 시간 싸움이 된 이상, 케프렌의 병력이 이곳에 오기 전에 상황을 끝내야 하니까요.”
어차피 상대는 흑마법사다.
놈들이 와서 계획을 훼방 놓기 전에 미리 놈들의 실체를 수면 위로 올려놓으면 케프렌은 싫어도 이쪽에 협력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엘림과 다른 아크 마법사들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좋아. 원론으로 돌아와서, 구체적인 계획은?”
네르하는 짧은 시간 동안 짜낸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그 계획을 모두 들은 엘림의 표정에 약간의 당황이 묻어났다.
“그게 계획대로 되겠나? 아무리 봐도 무모한 일인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이 라데우스의 직계인 존재이죠. 또한 이런 상황을 뒤집는 거야말로 직계의 이름에 걸맞다고 볼 수 있겠죠.”
“크, 크크큭!”
엘림은 황당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유쾌하게 웃었다.
“좋아. 어차피 다른 대책을 짜내기까진 시간이 없으니. 한번 너의 활약에 기대보도록 하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아, 그리고.”
네르하의 시선이 페텔과 헤젤,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움찔!
네르하의 시선을 받은 두 사람이 어깨를 움츠렸다.
“이제 상황이 여의치 않은 이상 두 선배님께서도 제 계획에 전적으로 협조해 주셔야 하는데, 설마 비협조적인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겠지요?”
네르하의 뒤로 엘림과 아크의 마법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다.
페텔과 헤젤은 그 시선을 받고선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네르하의 말에 동조했다.
“무, 물론이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네 손과 발이 되어 열심히 구르겠어!”
“아주 만족스러운 대답입니다, 선배님들.”
네르하는 흡족스럽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엘림과 다른 이들은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참, 라데우스는 라데우스로군.’
* * *
“아이고오오오! 어서 오십시오, 영웅님들! 라데우스의 귀빈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갑소, 시장.”
켈릭스 라구엘.
벌써 10년이 넘게 이곳 그렌 타운의 시장직을 맡고 있는 인물이자 이삼 년 후면 무려 4선에 도전하게 되는 베테랑 정치인이었다.
“자,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여러분들을 대접하기 위해 메르비뉴 22년산 최고급 포도주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호오, 메르비뉴 22년산!”
한 병에 백만 실링이 넘어가는, 라데우스의 직계들도 쉽게 손에 넣지 못하는 최고급 포도주였다.
‘크, 크흠!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잠시 포도주에 정신이 팔렸다는 걸 자각한 엘림은 헛기침을 하며 시장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시장, 우리가 미리 목적을 밝히지 않고 찾아온 건 미안하게 됐지만, 어떻게 우리의 정체를 벌써 알아채었소?”
엘림으로선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엘림의 물음에 켈릭스 시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허허허! 라데우스의 영웅들을 몰라뵙고 어찌 시장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내가 원한 답은 그게 아니오만.”
정색하는 엘림을 향해 시장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사실, 제 휘하에 뛰어난 마법사가 한 명 있습니다. 아, 오해하진 마십시오. 흑마법사는 절대로 아니니까요! 그가 라데우스의 마법사분들이 이 도시를 방문했다고 사알짝 귀띔해 주었습니다.”
“……마법사?”
엘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네. 아주 실력이 좋은 마법사지요. 그자 덕분에 제가 이렇게 마음 편히 시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하하!”
흑마법사는 아니라지만 변수를 줄여야 하는 입장에서 그런 마법사의 존재는 썩 달가운 게 아니었다.
‘우리의 정체를 바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라면 본가의 정보망에 걸려도 한참 전에 걸렸을 텐데? 뭔가 수상하군.’
그렇다면 시장과 도시 암흑가가 밀접한 관계라는 네르하 라데우스의 추측은 빗나간 건가?
엘림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시장이 은근한 얼굴로 엘림에게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기사를 자처하는 못된 놈들과 부득이한 일을 당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잘 해결되셨는지?”
라데우스와 친교를 맺기 위한 말도 아니고 곧바로 그 일부터 꺼낸다?
엘림은 무언가 수상함을 느꼈다.
“케프렌이었소.”
“아, 역시 상종 못 할 놈들……. 네?”
“케프렌이라고 했소. 그 못된 놈들의 정체가.”
“…….”
그 순간, 엘림은 보았다.
시장의 표정이 아주 짧은 순간 굳었다가 펴지는 것을.
* * *
“자, 그러면 우리 역시 할 일을 해야겠죠?”
엘림과 아크의 마법사들이 시장의 초대를 받아 외출한 이후.
네르하는 페텔과 헤젤을 이끌고 아주 조심스레 여관에서 빠져나왔다.
“그, 네 말에 토를 다는 건 아니다만 지금 어딜 가는 거냐?”
이젠 네르하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페텔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빈민가로 갑니다.”
“비, 빈민가?! 거긴 왜!”
그런 위험한 데는 왜 가느냐는 페텔의 말에 네르하는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답했다.
“뒷골목에서 암흑가 이상으로 정보를 얻기에 가장 제격인 곳이 바로 거지굴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