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크림슨 (2)>
시장의 화려한 대접을 받은 아크의 마법사들은 제법 얼굴이 풀어져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완전히 정신 줄을 놓을 정도로 미숙한 이들은 절대로 아니었다.
어차피 드러난 건 자신들의 소속일 뿐 라데우스 내에서 어떤 조직에 속해 있는지, 또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까지 알려지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장.”
“네. 말씀하시지요, 마법사님!”
시장은 도시 제일의 권력자라는 말이 무색하게 솔선수범하며 엘림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이 도시에 흑마법사 놈들이 숨어 있는 것 같소만,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있소?”
“흐, 흑마법사 말씀이십니까?”
“정확히는 대륙 공적 판데모니움. 분명 최초의 제보로는 이곳에 발견된 시체에서 그들이 사용하는 흑혈 마법의 흔적이 나타났다고 들었소만?”
흑혈(Dark blood).
특수한 가공을 거쳐 만들어진 피로, 주로 키메라나 육체 개조 등에 흔히 쓰이는 사법 중의 하나다.
“무, 물론 그런 보고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럼에도 우리가 정보를 얻은 것은 길드 쪽이었지. 대륙 협약에 따르면 시장이 직접 우리 쪽에 정보를 제공해 주어야 하는 게 원칙 아니었소?”
엘림의 추궁에 시장의 이마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그것이! 딱히 그것 외엔 단서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고… 또 그 후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또 괜히 들쑤셔서 흑마법사를 자극하느니…….”
평소 기름칠을 한 듯 혀를 놀리던 시장이라고는 놀랄 정도로 경직된 모습이었다.
‘흠, 시장과 흑마법사가 결탁한 것은 아닌가?’
저런 어설픈 변명에 오히려 시장에 대한 의심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이번은 경고로 끝나지만, 다음엔 어림도 없을 거요.”
“물론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이 도시가 본가와 케프렌 사이에 낀 무법 지대라고는 하나 협약을 너무 무시하는 건 삼가는 게 좋을 거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시장은 한숨 돌렸다고 생각했는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엘림에게 술을 권했다.
‘흠, 네르하는 시장과 흑마법사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일 거라고 추측했는데…….’
딱히 술이나 음식에 독이나 마비산을 타거나, 저주를 건 흔적은 없다.
철저하게 확인했음에도 걸린 게 없는 걸 보면 시장은 순수한 마음에 이쪽을 초대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지.’
굳이 네르하의 의견이 아니더라도 엘림은 저 시장이 무언가를 감춰 두고 있다는 쪽에 큰 무게를 두었다.
보통 라데우스의 수족이 나타나면, 그냥 조용히 넘어가길 기도하지 이렇게 괜히 초대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려고 하진 않으니까.
‘자, 네 의견대로 시장의 시선을 붙잡아 두고 계속 빈틈을 파 보겠다. 그 안에 네가 성과를 내면 좋겠군, 네르하 라데우스.’
엘림은 지금쯤 행동에 들어갔을 네르하를 응원했다.
* * *
“이, 이봐, 네르하. 아무리 그래도 이런 곳에 온 건 성급한 판단 아니냐?”
빈민가 거지굴로 가겠다는 네르하의 결정에 페텔과 헤젤은 큰 거부감을 느꼈다.
“자, 자랑스러운 리브라의 마법사인 우리가 왜 이런 곳에…….”
이젠 네르하의 말을 거역할 수 없기에 따라오긴 했지만 빈민굴… 슬럼가의 황량하고 구역질 나는 풍취는 귀족으로 살아온 두 사람에겐은 큰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네르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움찔!
네르하의 시선에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눈과 어깨를 떨었다.
“선배들, 선배들은 어디까지나 라데우스를 위해 일하는 자랑스런 전투 마법사가 될 거야.”
“그, 그렇지.”
“물론 선배들의 인생에서 이런 장소에 올 확률은 평생을 통틀어서도 몇 안 되겠지.”
“맞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 말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둬.”
네르하의 눈이 차갑게 두 사람을 훑었다.
“선배들이 진정으로 라데우스 안에서 신분 상승을 꿈꾼다면 이런 더러운 곳에도 충분히 익숙해져야 한다는 걸.”
“무, 무슨 소리냐?”
네르하는 다시 고개를 돌린 채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말은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다른 곳도 아니고 라데우스야. 자기 가문에서 팔려 온 신세나 다름없는 선배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과연 높은 자리에 오를 만큼 만만한 곳일까?”
움찔!
대번에 두 사람의 표정에 굴욕감이 나타났다.
이 말을 하는 당사자가 바로 그 라데우스의 직계이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2학년이 되면 대부분 라데우스 윗선에 줄이라는 것을 잡는 모양이더군. 하지만 별다른 특출 난 재능도, 성과도 없는 선배들이 가지는 가치가 얼마나 될까?”
네르하가 판단한 페텔과 헤젤은 약 3레벨 정도의 마법사.
특출 난 것도 아니고 뒤떨어지는 것도 아닌 딱 그저 그런 평균 수준에 불과했다.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네르하.”
“그러니까 선배들이 내 다른 형제들이나 윗선의 눈에 띄려면 재능이나 성과 둘 중 하나를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소리지. 지금은 그 성과를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고.”
이 가문과 이 리브라라는 교육기관에서 성과를 보이기 위해선 적어도 품위와 계급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쓰레기통을 뒤져서라도 원하는 걸 얻어내겠다는 절박함. 자신의 몸을 분뇨 구덩이에 던져서라도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간절함.”
“…….”
“그런 마음가짐과 실천이 있어야 비로소 윗사람들의 눈에 뜨일 수 있는 거야. 그게 설사 재능이 특출하지 않더라도 말이지.”
어느새 세 사람은 빈민굴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자, 귀족적인 삶만을 살아온 선배들에게 뼈와 살이 되는 조언 하나를 해 주지.”
“……?”
“그게 뭐냐?”
사실, 이 둘보다 훨씬 귀족적인 삶을 살아온 이가 바로 눈앞의 네르하이긴 했지만.
어느새 분위기에 압도된 두 사람은 조용히 네르하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를 경청했다.
“이런 범죄 도시에서 빈민굴이란 단순히 못사는 놈들이 모여 있기만 한 곳은 아니야. 실력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하다못해 팔다리가 떨어져서 이런 곳에 있다 해도…….”
저벅!
“이런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어도 뭔가는 해야 하는 법이거든.”
“헉! 어느새!”
페텔과 헤젤은 어느새 자신들을 둘러싼 거지들의 모습에 기함을 했다.
그 수는 최소 오십.
무려 오십이나 되는 숫자가 주변에 어슬렁거릴 동안 페텔과 헤젤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에 경악했다.
이전, 기사들의 경우엔 그들의 실력이 좋았다는 변명거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허를 찔려 버린 것이다.
“내가 왜 선배들을 데리고 이런 쓰레기통에 찾아왔는지 계속 그 이유를 말하자면.”
그런데도 네르하는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계속해서 입을 나불거리고 있었다.
“이런 빈민가는 보통 낙오자들의 온상이지. 보통은 암흑가에서 밀려난 놈들이 주를 이루어. 하나하나는 그야말로 쓰레기나 다름없는 놈들이지만 그래도 그런 놈들이 하나둘씩 쌓이다 보면 무시 못 할 세력이 된다 이 말이지.”
“바로 맞혔다, 마법사.”
허름한 몰골을 한 거지들 사이에서 제법 체격이 다부진 장년인 하나가 튀어나왔다.
팔 하나가 없는 게 흠이었지만, 네르하는 놈이 풍기고 있는 분위기에 제법 괜찮은 평가를 내렸다.
양팔이 멀쩡했을 때라면 절대 이런 곳에서 뒹굴 놈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제, 뒷골목에서 기사들에게 린치당한 풋내기 마법사 둘. 그리고 그 일행이로군.”
“선배들 행적이 이쪽까지 쫙 퍼졌나 본데?”
네르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페텔과 헤젤을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은 극한의 쪽팔림에 얼굴이 벌게져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네르하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털었다.
“하긴, 이 정도 정보력은 되어야 찾아온 보람이 있지.”
“……!”
중얼거리듯 스쳐 지나간 그 한마디에 장년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일은 일이었다.
장년인이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진 걸 모두 내놓고 사라져라. 그렇다면 목숨은 살려 주도록 하지.”
“이런 건방진 놈들이!”
방금 전 느꼈던 쪽팔림의 반동이라고 해야 하나?
페텔과 헤젤은 그야말로 활화산처럼 분노를 터트리며 마력을 모았다.
“우리가 네놈들 정도를 어찌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나!”
“고작 너희들 따위를 쓸어버리는 덴 마법 한두 번이면 충분하지!”
“좀 진정해. 또 임무를 말아먹을 셈이야?”
빡!
네르하는 한숨을 내쉬면서 두 선배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윽!”
“으윽!”
“한번 실수를 저질러서 마음이 조급해지면 계속해서 실수를 연발하기 마련이지. 마음을 좀 가다듬어, 이 화상들아.”
바로 어제만 해도 기사들에게 정체를 숨기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던 두 사람인데 어느새 그 마음가짐은 조급함에 의해 사라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설사 마법을 사용한다 해도 이긴다는 보장은 없지. 아마 선배들이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저 구석이나 창문 안쪽에서 대기하는 놈들에게 벌집이 되어 버릴 거야.”
“……!!”
페텔과 헤젤은 네르하의 말에 경악하며 주변을 샅샅히 살폈다.
그제야 그들의 눈에 활이나 석궁을 들고 숨어 있는 존재들이 하나둘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 이런!”
그제야 자신들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깨달은 두 사람이었다.
“눈썰미가 대단하군.”
장년인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네르하는 직시했다.
“뭘, 은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놈들이 내 눈을 속일 수는 없다.”
“상황을 알았다면 주제 역시 알았으면 좋겠는데.”
“너희야말로 주제를 좀 알았으면 하는데. 손님으로 왔는데 강도로 돌변하지 않게 해 줬으면 좋겠군.”
“손님이라.”
딱!
장년인이 손가락을 튕기자 무리 중에서 나름 체격이 건장한 놈들이 튀어나왔다.
“손님을 자처했으면 그에 걸맞은 자격을 보여야지.”
“후, 뭐, 좋아. 아쉬운 쪽이 증명해야겠지.”
앞으로 나서기 전, 네르하는 선배들을 돌아보았다.
“실드를 펼쳐서 보호하고 있어. 상황이 돌변하면 저격이 날아올지도 모르니까.”
“아, 알겠다.”
페텔과 헤젤이 주문을 영창하는 걸 보고 나서야 네르하는 천천히 덩치들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리고.
“큭큭, 영악한 놈들.”
“……!”
패앵!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숨어 있던 저격수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조, 조심해라, 네르하!”
파파파팟!
페텔과 헤젤은 마치 덩치들과 상대를 붙이는 척하면서 시작부터 화살을 날리는 상대의 행위에 경악했고.
별다른 방어 마법 없이 몇 번의 발걸음만으로 그 화살을 모조리 피해 버린 네르하의 모습에 더더욱 경악했다.
“이, 이럴 수가!”
장년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이 ‘의외’라면 방금 전 보여 준 모습은 ‘놀라움’이었다.
“먼저 수작질을 벌였으면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겠지?”
네르하의 신형이 방금 전 날아온 화살처럼 튕겨 나가며 덩치들에게 향했다.
“주, 죽여 버려!”
“너, 너무 빨라!”
뭘 어떻게 대응하기도 전에 네르하의 신형이 덩치들 사이에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주먹 한 방에 한 명씩. 그대로 놈들의 급소를 빠르게 가격하기 시작했다.
“컥!”
대번에 십여 명의 덩치들이 제압당해 그대로 기절해 버렸고, 장년인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순식간에 장내를 지배한 네르하가 서슬 퍼런 눈으로 장년인을 노려보았다.
“자, 다음은 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