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암시장 (2)>
‘대단하다!’
아크의 마법사들이 네르하의 모습에 황당함을 표하고 있던 사이.
오직 대장인 엘림만이 네르하가 방금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했다.
‘그야말로 깔끔한 실력. 인간의 급소에 대해 정확히 통달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장담컨대, 어지간한 베테랑 기사를 데려와도 방금 전 네르하처럼 움직임을 보이는 건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탐이 나는군.’
엘림은 리브라를 졸업하고 라데우스 본가에 본격적으로 임용되면서 여러 직계 및 후계들과 함께 미션을 치른 베테랑이었다.
그런 엘림의 기억 속에서 네르하처럼 저렇게 깔끔하게 일 처리와 강력한 육체 능력을 보여 준 이는 그야말로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처지를 인지하고 아랫사람으로서 계책을 짜내는 모습은 직계 중에선 처음이지.’
직계 중 일부는 리브라의 생도 시절부터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위에 서려는 모습을 심상찮게 보이곤 했다.
‘직계가 아니라면, 하다못해 후계 경쟁에서 탈락했더라면 아크로 끌어들였을 텐데.’
네르하가 마법과 무술을 동시에 익혔다는 건 지난 무기 수여식 당시의 활약으로 널리 알려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수여식에서 큰 활약을 했음에도 네르하의 가치가 평가절하당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저걸 실제로 봤다면 절대로 그런 평가를 내리지 못할 것이다.’
라데우스에서 미덕은 강력한 마법 능력이지만 실전에서 그 마법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전에서 중요한 것은 정확한 판단력과 과감성, 그리고 그 판단을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적절한 능력치다.
그리고 엘림의 눈에는 네르하가 바로 그 실전에 가장 적합한 최고의 인재로 보였다.
“어서 갈아입으시죠, 엘림 대장님.”
“아? 아, 알겠다.”
한동안 네르하를 어떻게 이쪽으로 끌어올 수 있을지 고민하던 엘림은 자신이 실전에서 잠깐 딴생각을 했다는 것에 경악했다.
‘이, 이런. 이 내가 무슨.’
엘림은 자신의 뺨을 한차례 강하게 후려치며 정신을 차렸다.
옆에서 부하들과 생도들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엘림은 애써 그 시선을 모른 척했다.
그렇게 인부들로 위장한 마법사들은 주변의 눈을 피해 암시장의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번 작전은 어디까지나 흑마법사 놈들의 흔적을 찾는 것이다. 가능한 전투는 피하고 최대한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아크의 마법사들과 생도 세 명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가능한 주변 시선을 피하며 암시장의 중심부로 추정되는 곳으로 들어왔을 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저 멀리서 신경질적이고 꼬장꼬장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지, 진정하시지요, 두칸 님.”
“내가 진정하지 않게 생겼어? 왜 막 실험체를 늘리려는 시점에 시장을 폐쇄한다는 게야!”
검은 로브를 걸친 한 노인이 관리자로 보이는 자에게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실험이 이제 막바지인데 네놈들 때문에 실패하면 책임질 거야? 응?!”
“고, 고정하시고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십시오.”
관리자로 보이는 자는 얼굴에 긴 자상이 있는 흉악한 근육질의 사내였는데, 그런 그가 노인의 말에 꼼짝도 못 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두칸 님도 시장님께 들으셨다시피. 지금 이 도시 내에 라데우스의 잡것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지금 그놈들이 흑마법사를 잡겠다고 뒷골목을 쑤셔 댈 것이라는데 저희가 뭘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그게 우리 탓이라 이거야?”
두칸이라 불린 노인의 눈에서 흉흉한 광망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에 대경실색한 관리자는 대번에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외쳤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저희가 라데우스 놈들에게 털리게 되면 자칫 두칸 님과 다른 마법사분들의 행적 역시 노출될 가능성도 있다 이거지요.”
“흐음.”
관리자의 필사적인 변명이 먹힌 건지 두칸이란 노인의 기세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나름 일리는 있는 말이군.”
“그, 그렇지요! 하하핫!”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암시장이 폐쇄되는 건 곤란해. 좀 편법으로라도 몇 놈 데려가고 싶은데 말이야.”
“아이고, 저희 최고 우수 고객이신 두칸 마법사님의 요청이시라면 당연히 그래야죠! 몇 놈이나 필요하십니까?”
두칸은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건실한 장정으로 스무 명.”
움찔!
솔직히 이만한 규모에서 성인 노예 스물을 취급하는 건 절대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시장의 명령으로 암시장의 흔적을 최대한 지우고 있는 와중인데 저 흑마법사들이 무려 스물이나 데려가서 흔적이라도 노출시켰다간…….
“왜, 무리인가?”
“아, 아닙니다.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관리자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라, 모르겠다. 난 명령에 충실했을 뿐이야.’
이윽고 관리자와 두칸이 ‘노예 파트’라 명명된 건물로 향하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월척이군.”
그리고 그 대화를 모조리 엿들은 엘림과 라데우스의 마법사들은 눈에 살기를 품으며 이를 갈았다.
분노에 미쳐 뛰쳐나가려던 걸 네르하가 간신히 제지했을 정도였다.
“흑혈이 왜 발견되었는지 알겠군. 저렇게 대량의 노예들을 잡아다 키메라의 실험체로 써댈 테니 당연히 흔적이 노출될 수밖에 없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로 가서 뒤집을까요?”
부하 마법사들이 의기충천하며 엘림의 명령을 기다렸다.
하지만 엘림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곳은 저놈들의 본거지가 아니다. 놈들의 본거지를 찾을 때까지는 전투를 벌여선 안 돼. 지금은 조용히 놈들을 추적할 때다.”
네르하 역시 그 의견엔 동의하는 편이었다.
여기서 저놈들을 잡는다고 저 셋이 흑마법사 전체라고 속단하는 건 절대 엄금이다.
‘여기서 조용히 놈들의 뒤를 쫓아 일망타진하면 그대로 쉽게 이번 임무는 성공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사,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고 했던가.
“침입자다!!”
삐이이이이이익!
사방팔방에서 경비 마법이 울림과 함께 외곽 쪽에 있던 경비원들이 침입자의 존재를 알려 왔다.
“……!”
“……?!”
순간, 일행들은 당황했다.
나름 제압한 인원들을 신경 써서 숨기고 왔건만 설마 그걸 들켰단 말인가?
“흠, 설마 라데우스의 잡것들이 벌써 쳐들어온 건가?”
“바,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관리자의 당황한 말에 두칸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닐세. 오늘은 날이 아닌갑지. 상황이 수습되면 다시 올 테니 말해 둔 노예나 준비하고 있게.”
방금 전만 해도 노예를 내놓지 않으면 이곳을 뒤집어버릴 기세였던 두칸이었다.
그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관리자가 당황하는 사이, 두칸과 흑마법사들은 어느새 총총 자리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엘림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이런 혼란 상황에서 두칸과 흑마법사들을 추적하는 건 상당히 힘들다.’
저들은 영악하게도 무리 사이에 숨어 자신들의 존재를 지우려 하고 있었다.
“작전을 바꾼다.”
엘림은 냉철하게 플랜 B를 가동시켰다.
“나와 세다르, 넬슨은 저 흑마법사들을 추격한다. 마하타, 자네는 생도들을 이끌고 지금 혼란의 원인을 확인하고 만약 우리 때문이라면 곧바로 여관으로 귀환해라.”
“괜찮으시겠습니까?”
마하타라 불린 아크의 여마법사가 걱정스레 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우르르 몰려가 흑마법사들을 추적할 수는 없다. 금방 들키게 될 거야.”
확실히 엘림은 베테랑 지휘관이 맞았다.
대장의 명령에 마하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르하와 두 2학년들을 향해 손짓했다.
대번에 무리가 두 개로 갈렸다.
엘림과 두 마법사들은 상황이 이렇게 된 거, 본격적으로 은신 마법을 펼쳐 흑마법사들을 추적했고.
마하타를 비롯한 나머지 넷은 조용히 출입구 쪽으로 향하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네르하가 마하타를 향해 물었다.
현장까지 가지 않는 이상, 지금 상황의 원인을 파악하긴 힘들었다.
마하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반문했다.
“네르하, 아까처럼 지위가 좀 되어 보이는 놈 하나를 제압해서 데려올 수 있겠어?”
“가능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네르하는 30초도 되지 않아 나름 준관리자로 보이는 녀석을 제압해서 데려왔다.
대번에 상대의 목덜미를 질질 끌고 온 네르하를 향해 마하타가 눈을 깜빡였다.
“……빠르구나.”
“별말씀을. 내부 상황이 혼잡해서 작업하기 좋았습니다.”
나름 지위가 있어 보이는 남자를 향해 마하타가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네르하는 보았다.
마하타의 손가락 끝에서 수십 줄기에 달하는 마력의 실이 흘러나와 남자의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정신계 마법!’
네르하의 마음속에 마하타에 대한 경계도가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음! 크으으음!”
혈교, 혹은 배교의 술법 중에 인간의 정신을 조종한다는 사법이 존재한다고는 들었는데 이 세계에 와서 비슷한 것을 볼 줄이야!
‘잘 봐둬야 한다.’
정신계 마법은 네르하가 이 세계의 대략적인 마법 체계에 대해 배우면서 가장 경계한 것들 중 하나다.
쓸 수 있는 자도 극히 적고, 난이도 또한 극명해서 고레벨의 정신계 술사는 손에 꼽힌다고 하지만, 지금 눈앞에 그 손에 꼽히는 자들 중 하나가 있다.
‘이런 마법을 내 눈앞에서 보이는 건 다른 형제자매들의 사주를 받은 자는 아니라는 뜻인가?’
설사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마하타는 어째서인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향해 말했다.
“자, 아가, 엄마의 말에 잘 대답해 주렴.”
……뭔가 심문 방법이 좀 거시기하긴 한데.
“네. 엄마.”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걸 보면 실력 자체는 좋은 게 맞는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에게서 침입자들에 대한 정보가 주렁주렁 딸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이가 없게도 그 침입자의 정체는 자신들이 아니었다.
“엥?”
“기사라고?”
약 십여 명에 달하는 기사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이곳 암시장을 무차별적으로 습격한 것이었다.
숫자 자체는 그리 많지 않아도 상대의 실력들이 너무나 출중해서 대기 중인 인력들이 전부 소집되었다고 했는데?
‘설마.’
네르하의 뇌리에 얼마 전 만났던 금발의 소녀가 떠올랐다.
숫자도 그렇고 기사라는 말도 그렇고 더 이상 다른 용의자가 생각나질 않았다.
“어이가 없네. 그 망할 놈들 때문에 우리 임무가 실패할 뻔했다니.”
마하타는 정신계 마법을 거두며 이를 갈았다.
“어쩌지?”
엘림의 명령은 어디까지나 이 사건의 원인이 ‘자신들’일 경우에 귀환하라고 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상황에선 귀환하는 게 맞았다.
그때, 네르하의 귓가에 약간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페텔기우스 소튼, 무슨 일이지?”
마하타가 페텔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번 임무에서 원래의 자신감을 많이 잃었던 페텔은 그래도 완전히 자존감을 잃지는 않았는지 소신껏 자신의 계책을 밝혔다.
“지금 상황이 기사들이 벌인 일이라면, 오히려 기회가 아닐까요?”
“무슨 기회?”
“반대로 이곳 암시장의 중심부로 파고들어, 시장의 약점을 파헤칠 기회 말입니다.”
“……!”
페텔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이곳 시장이 흑마법사들과 손을 잡았다는 걸 안 이상, 그를 벌할 수 있는 증거를 획득하는 건 큰 공훈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나마 기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 아닐지.”
페텔의 말은 상당히 그럴듯했다.
마하타 역시 깊게 고민하는 티가 역력했으니까.
“으, 으음! 확실히!”
만약 그 증거를 얻을 수 있다면 이번 흑마법사 소탕 이상으로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라데우스가 케프렌의 영향력을 밀어내고 이곳 중립지대의 주도권을 얻을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하지만 결정권자인 엘림이 없는 상황에서 이걸 단독으로 결정하는 것은 마하타로서 큰 모험이었다.
“네르하, 네 생각을…… 알고 싶은데?”
결국 마하타의 시선은 엘림이 자주 조언을 요청했던 네르하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