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두칸 (2)>
엘림의 표정이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신을 잃은 것은 마찬가지였고, 앞으로도 족히 몇 달은 꼼짝없이 정양해야 할 중상을 입었다.
‘엘림까진 아니더라도 두 사람도 위험해.’
회복 마법 하나 쓰고 나서 피를 토할 정도면 한동안 마법의 ‘마’ 자도 꺼내지 못할 정도로 타격을 입은 셈이었다.
네르하는 여전히 숨을 헐떡이는 두칸을 노려보았다.
“이게 네놈의 노림수였군.”
“크, 크하하하! 맞다. 즉흥적인 계획이었지만 결과는 썩 쓸 만하구나.”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네르하의 옆에 있던 마법사가 힘겨운 와중에도 고함을 내질렀다.
분명 두칸 역시 막대한 타격을 입은 것은 확실하다.
엘림이나 다른 마법사들처럼 두칸 또한 한동안 마법을 쓰지 못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고위 마법은 엄두도 못 낼 것이다.
네르하는 천천히 두칸의 진짜 목적을 입에 올렸다.
“저 녀석의 목적은 이쪽 고위 마법사들의 무력화였습니다.”
“어, 어째서?”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제 놈들의 본거지를 칠 수 없게 되니까…라고 판단했겠죠.”
“클클클, 정확하다. 아주 쓸 만한 눈치를 가졌구나.”
자신의 목적이 까발려졌음에도 두칸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영민한 놈이로고. 어떠냐? 라데우스를 버리고 내 제자가 되지 않겠느냐?”
난데없는 두칸의 스카우트에 네르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
“이제 곧 이 도시는 지옥이 될 것이다. 네놈들은 남김없이 죽게 될 것이고. 그럴 바엔 살길이라도 찾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
“그리 눈치가 빠르니 앞으로 일어날 일이 어떻게 될지도 알겠지? 내 제자가 되면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물론 널 흑마법의 대가로 만들어 줄 수 있다.”
네르하는 지금 두칸이 뭐라 씨불이는지 잠깐 이해하지를 못했다.
약간의 정지 과정을 거쳐 두칸의 말을 모두 이해한 네르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너, 내 이름이 무엇인지 아나?”
“그거야 지금부터 알아가면 되겠지. 건방지지만 스승이 될 자에게 그 정도 관용은 있으니.”
안타깝게도 네르하에겐 이미 예비 스승이 존재했다.
아직 그 존재를 인정한 건 아니었지만, 상대의 집념으로 봐선 곧 스승이 될지도 모르는 인물.
물론 아직 가르침이라고는 1도 얻지 못했지만 적어도 스승으로서의 격으로 따지면 두칸은 시저의 발끝도 따라오지 못했다.
“내 이름은 네르하 라데우스다.”
“아, 그래. 네르하 라데우스… 좋은 이름이…… 뭐?”
자신의 이름을 처음 밝힐 때마다 하나같이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물론 그만큼 라데우스 직계가 가지는 이름의 무게가 바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지, 지금, 뭐라고…….”
“네르하 라데우스라고 했다, 이 빌어먹을 늙은이야.”
탁!
네르하는 그대로 공황 상태에 빠진 두칸을 기습했다.
‘큰 기술은 필요 없다.’
놈이 대처할 순간도 주지 않고 빠르고 정확하게.
“다, 다크 미스트……!”
“늦었어.”
―블레이즈 피스트!
아스트랄 보디인지 뭔지를 만들려면 어두운 안개를 뒤집어써야 하니 그걸 쓰기도 전에 타격을 주면 그만이다.
화륵!
불꽃의 나선이 그대로 미약한 방어막을 부수고 어깨를 관통했다.
“크아아아악!!”
* * *
“크악! 캬아아악! 끄으아어아!”
어깨 부근이 완전히 뚫려 버린 두칸은 바닥을 구르며 괴로워했다.
네르하는 그런 두칸을 바라보며 살짝 당황해했다.
‘끝내지 못했어?’
두칸의 육체는 그냥 늙어빠진 일반인일 뿐이다.
나선경이 섞인 블레이즈 피스트에 적중당한다면 강력한 실드나 호신강기를 두르지 않는 이상 상반신이 완전히 갈려 나가도 이상할 게 없었다.
‘어째서지?’
두칸의 육체가 딱히 튼튼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깨 부근이 꿰뚫린 것으로만 끝났다.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 네르하는 눈에 마나를 집중해 자신의 시야를 한 차원 높이고 두칸을 바라보았다.
천지신통의 신안(神眼)까지는 아니지만, 이 정도라도 이유를 알아낼 수는 있을 터.
“다른 곳에서 힘을 끌어오고 있었군.”
네르하는 두칸의 전신에 무언가가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매개체로 어딘가에서 끝없이 마나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그렇기에 두칸 본인도 모르게 전신의 방어력과 재생력이 상당히 올라 있었던 것이다.
“이, 이 빌어먹을 애송이가……!”
“그래도 치명타인 점은 변하지 않지. 어깨와 함께 심장 부근도 갈려 나갔을 테니까.”
그 말마따나, 두칸의 호흡이 급격히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끄, 끄허헉!”
네르하는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두칸을 향해 천천히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꺼헉! 이대로…… 꺽! 이대로 끝낼 것 같으냐!”
갑자기 두칸이 무너진 자리에서 그림자가 치솟아 오르더니 그대로 두칸의 몸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
네르하가 다급히 수도를 휘둘러 두칸의 목을 날리려고 했지만, 그림자가 먼저 두칸을 집어삼킨 게 빨랐다.
“절대, 절대 이대로 끝내진 않을 것이다!”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두칸은 그 말을 끝으로 마치 그림자에 침식되듯 사라져 버렸다.
다 잡은 고기를 놓친 네르하는 두칸이 사라진 자리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마법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군.’
차라리 환술이나 진법에 걸려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억울함이라도 덜할 텐데 아직 마법적인 소양이 부족하다 보니 이런 면에서 대응하는 법이 서툴다.
네르하는 엘림을 부축하고 있는 마법사들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놓쳤군요.”
“아, 아닐세. 아마 그자는 미리 탈출 수법을 짜놓은 상태에서 우리와 상대한 것일 거야.”
“맞아. 우리가 건재했다면 그림자를 이용하지 못하게 대응했을 텐데 이 꼴이 되어 버렸으니…… 자네가 잘못한 건 없네.”
확실히 두칸은 살아온 나이가 있는지 전투의 전개는 물론 마무리까지 확실하게 설계하는 노련함이 엿보였다.
마지막에 네르하에게 불의의 기습을 당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모든 목적을 달성하고 유유히 이 장소에서 빠져나갔을 것이다.
전투가 마무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서 전투를 벌이던 기사들과 마하타가 돌아왔다.
“에, 엘림 대장님!”
마하타는 리더인 엘림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자 기함했다.
“다행히 목숨에 지장은 없다. 다만 네르하의 판단으로는 상처가 상처인지라 깨어나려면 이틀은 족히 걸릴 것 같다더군.”
“그, 그럼.”
“이곳에 온 목적 자체는 달성했다고 볼 수 있겠군.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일행의 시선이 구석에서 여전히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시장 켈릭스에게로 향했다.
분대의 2인자격인 마법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상황을 수습하지.”
* * *
안타깝게도 상황은 생각만큼 수월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목숨을 부지한 시장이 얌전히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한 것까진 좋았는데, 엘림과 함께했던 마법사 둘 역시 시간이 지나자 바로 앓아누워 버린 것이었다.
“어, 어쩌지?”
자연스레 아크의 다섯 마법사 중 마하타와 다른 한 명만이 남았는데, 남은 한 명은 마하타처럼 전투원이 아닌 후방 지원 역할이라 전투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마하타에게 남은 건 고작 생도 세 명.
또 이쪽의 전력이 약화된 만큼 케프렌의 기사들이 또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지금 전력으로 흑마법사의 본거지로 향하는 건 자살행위야.”
흑마법사는 자신의 공방에서 레벨 하나 정도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우위를 얻는다.
두칸 역시 그걸 알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함정을 파훼할 능력이 있는 6레벨의 마법사들을 무력화시킨 것이 아니었던가?
‘분명 본가에서 전력이 오기 전에 움직인 건 정답이 맞았어.’
다만 상대가 생각 이상으로 강하고, 또 영악했을 뿐이었다.
소심한 성격이었지만 마하타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놓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뭔가, 뭔가 해야 하는데…….”
다만 이런 극한까지 몰린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을 만한 역량은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스윽!
마하타는 본능적으로 네르하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작전에 있어 절대적인 도움을 주었던 네르하였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네, 네르하.”
“네. 마하타 님.”
“혹시, 뭔가 좋은 방법이 있어?”
일개 생도에게 이렇게 묻는 것은 아크의 마법사로서 수치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마하타에게 지금은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네. 있습니다.”
“……!”
마하타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그게 뭔데?”
“지금 당장 흑마법사의 본거지로 쳐들어가는 겁니다.”
“…….”
마하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표정 변화가 한순간에 극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이 썩 신기했다.
“나름 근거는 있습니다.”
“말해 봐.”
네르하는 자신이 생각한 근거를 늘어놓았다.
“일단 그 흑마법사 늙은이는 당분간 전투가 불가능합니다. 엘림 대장이나 다른 두 분만큼이나 무력화되었다고 봐도 좋죠.”
“그렇긴…… 하지.”
“그럼 사실상 남은 전력은 그 흑마법사의 제자라는 6레벨의 마법사입니다. 그자의 수준은 마하타 님이 직접 상대해 봤을 테니 아실 겁니다.”
“으응 그놈은 솔직히 상대할 만했어. 6레벨이긴 하지만 나처럼 이제 막 5레벨에서 올라온 수준이었으니까.”
그때의 전투는 집단전인지라 명확하게 판단하지는 못해도 마하타는 일대일로 붙어도 그리 밀리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네르하가 말을 이었다.
“그 외에 남은 전력은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실제로 몇몇은 외곽 전투에서 기사들에게 당했을 정도이니 더더욱…….”
두칸이 시장을 붙잡기 위해 투입한 흑마법사는 모두 여섯.
그중 셋이 마하타를 비롯한 케프렌의 기사들에게 죽음을 맞이했다.
“결국 놈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본거지에서 시간을 끄는 것뿐입니다. 게다가 마족의 육체를 완성해야 하는 작업을 진행해야 할 테니 온전히 방어에만 집중할 수도 없죠.”
“하지만 문제는 우리만으로 공방의 함정을 뚫을 수 있을지 여부야.”
“뚫을 수 있습니다.”
“뭐?!”
네르하는 품속에서 이전, 쿨리크가 꺼냈던 것과 비슷한 지도 하나를 꺼내었다.
“이, 이건?”
“흑마법사 놈들이 만든 본거지에 대한 대략적인 구성도입니다.”
“뭐라고!”
쿨리크의 지도보다는 훨씬 조잡하고 정확성이 떨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추측과 예상이 섞인 것이라도 지금 상황에선 천금보다도 귀중한 최고의 정보였다.
“이, 이걸 어디서?”
네르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흑마법사와 어느 정도 접촉할 수 있으면서 서로 공생 관계를 가지던 자가 만든 거지요.”
끼이익!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하타와 네르하가 있던 방 안으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 저기…….”
“어? 당신이 왜 여기에?”
마하타는 당황했다.
쭈뼛거리며 들어오는 중년의 배불뚝이 사내.
그는 다름 아닌 이곳, 그렌 타운의 시장 켈릭스 라구엘이었다.
* * *
“망했어. 난 망했다고!”
라데우스의 마법사들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켈릭스는 이윽고 그들의 압박으로 현재, 시내에서 벌어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눈코 빠지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래서야 다음 선거엔 나가는 것도 불가능하고… 가진 거 다 토해 내고 이 도시를 떠나야 할 판이라고! 으헝헝헝!”
한참 피해 복구 관련 서류를 처리하던 켈릭스는 갑자기 올라온 서러움에 머리를 박고 울어 대었다.
뭐가 되었든 시에서 일어난 일은 악재이든 호재이든 그 시의 시장인 켈릭스가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켈릭스에겐 하나라도 감당하기 힘든 악재가 연이어 터진 상황이었다.
달칵!
그때, 노크도 없이 갑자기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누, 누구냐!”
켈릭스는 기겁하며 미리 준비해 둔 칼을 집어 들었지만, 배불뚝이 사내가 집어 든 칼을 무서워할 이는 오로지 일반인뿐이었다.
그렇게 문을 열고 나타난 이는 갈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10대 후반의 청소년이었다.
“잘하고 있나?”
“헉! 네, 네르하 도련님!”
켈릭스의 집무실에 난입한 이는 다름 아닌 네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