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복귀 (2)>
엘림이 말했다.
“일단은,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네 덕분에 목숨을 건진 것은 물론 과분한 공까지 같이 받아 버렸군.”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네르하는 손을 내저었다.
그런 초탈한 네르하의 모습에 엘림은 뭔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일단은…… 모두, 복귀하도록 하지.”
그렇게 아크와 실습생들은 마차에 몸을 싣고 귀로에 올랐다.
달그닥, 달그닥!
의외로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던 엘림은 귀환길에서도 딱히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리브라로 들어가는 팔라레스트 산맥의 입구에서 헤어지기 직전에서야 네르하를 불렀다.
“네르하 라데우스.”
“네. 엘림 대장.”
어째서인지 엘림은 다른 이들을 물리고 독대를 원했다.
엘림은 심유한 눈빛으로 네르하를 직시했다.
“만약.”
무언가 큰 결심을 한 사내의 눈빛이 보였다.
“만약 네가 리브라를 무사히 졸업하고 정식으로 후계 경쟁에 참전한다면.”
엘림이 자신의 애병을 가슴팍에 갖다 대며 이렇게 말했다.
“그때가 되면 나는 기꺼이 널 지지하겠다.”
네르하는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
도움이 되냐 마냐를 떠나, 지금 이 선언은 네르하에겐 꽤나 의미 있는 일이었다.
“물론 세력이 충분한 원로나 다른 전투단의 단주급 인물들과 비교한다면 나의 지지 따위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겠지.”
“그건 아닙니다.”
“네가 리브라를 졸업하는 4년의 세월 동안 나 역시 놀고만 있지는 않을 거다. 분대장에서 부대주를 넘어…….”
“…….”
“네가 졸업할 때가 되면 특수작전대 아크는 너를 지지하는 세력이 되어 있을 거다.”
단순히 인정만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엘림의 눈에서 활활 타오르는 야심을 본 네르하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너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다. 그거면 족해.”
아마 이 대화가 외부에 퍼지는 순간, 엘림은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엄청난 견제를 받게 될 거다.
그리고 리브라에 묶여 있는 네르하는 그런 엘림을 지켜 줄 수도 없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엘림은 과감하게 네르하에게 자신의 인생이란 판돈을 내건 것이다.
그야말로 배당률이 수백 대 일은 가볍게 넘어설 역베팅.
척!
그 마음을 전달받은 네르하는 그대로 엘림의 눈앞에서 중원식의 포권을 선보였다.
“엘림 대장의 지지에 걸맞은 후계로 성장하겠습니다.”
씨익!
네르하의 제스처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 살짝 당황했지만.
“절대로 절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해드리죠.”
이어진 네르하의 말에 엘림 역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네르하 도련님.”
엘림의 말투는 어느새 존대로 돌아와있었다.
“다시 만났을 땐, 주군이라 부르십시오.”
“물론입니다. 그렇게 되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그렇게 짧지만 긴 첫 번째 외부 미션이 끝났다.
* * *
그렇게 엘림과의 강렬한 마지막을 끝으로, 네르하는 리브라에 돌아와 복귀 절차를 마무리 지었다.
‘후우, 정말 오랜만에 귀환한 것 같군.’
거의 한 달 동안 자리를 비운 셈이니 오랜만이라는 건 분명 옳은 표현이었다.
‘한적하군.’
주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에 네르하는 살짝 어색함을 느꼈다.
기숙사 자체가 그리 시끌시끌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 자체는 나는 곳이었다.
‘외부 미션에 대한 남은 기간이 앞으로 일주일이랬던가?’
그런 만큼 복귀자가 적다는 건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 네르하의 귀로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네르하 라데우스로군.”
고개를 돌려 보니 상대는 이곳 기숙사의 책임자인 사감 에드발이었다.
“뭔가 오래간만에 뵙는군요.”
“그래. 죽지 않고 잘 살아 돌아왔군. 확실히 이번 기수는 희생자가 적어.”
툭툭!
에드발은 기특하다는 듯 네르하의 어깨를 두들겼다.
“벌써 희생자가 생겼습니까?”
“그렇지, 뭐.”
에드발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선 세 명 정도일까? 그래도 작년과 비교하면 아주 괜찮아. 작년, 네 선배들이 실습에 나갔을 땐 이맘때 들려온 부고 소식만 열이 넘었으니까.”
확실히 이곳은 일반 교육기관과는 달랐다.
“너와 함께 어울리던 놈들은 모두 단련실에 박혀 있을 테니 그쪽으로 가 보면 될 거다.”
“감사합니다, 사감님.”
네르하는 에드발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후에 신형을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네?”
“이전, 배커 녀석을 제압할 때 쓴 수법. 누구한테서 배운 거냐?”
꿈틀!
네르하의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알아차렸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미 몇 달이나 된 이야기를 다시 꺼낼 줄은 몰랐다.
네르하는 웃는 표정을 만들어 내며 이렇게 말했다.
“수법이라뇨? 그저 배커가 갑자기 쓰러진 것이었을 텐데요?”
피식!
네르하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에드발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흠, 그렇게 얼버무리겠다? 나도 딱히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에드발에게서 제법 흥미를 발하는 정보가 튀어나왔다.
“다만 네가 썼던 기술이 궁금해서 좀 찾아봤지. 라데우스에서도 극비의 정보만을 취급하는 첩보 부대, 그들 중에서도 극히 소수의 마법사들만 쓰는 기술이라더군.”
“…….”
“다만 그 기술은 라데우스 쪽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게 아니라, 이전 케프렌의 일부 기사들이 전장에서 사용했던 수법을 카피한 것이라더군.”
의외의 사실에 네르하가 살짝 표정을 굳혔다.
“케프렌?”
“그래. 다만 그쪽에서도 주류 기술은 아니라던데? 케프렌 가문 정도의 재력이면 속박형 아티펙트 정도야 흘러 넘칠 테니 굳이 시간을 내서 익힐 필요는 없겠지.”
제법 흥미로운 정보다.
점혈 수법은 무림에선 꽤나 대중적인 수법이었지만 반대로 이 대륙에선 그다지 발전하지 않은 편이었으니까.
당연히 그 이유는 방금 에드발이 언급한 ‘도구’의 발전 때문이었다.
“뭐, 그래서 물어봤다. 어차피 개인적인 흥미였으니까 신경 쓰진 마라.”
“네. 꽤 재밌는 이야기였습니다.”
최고의 검술 명가 케프렌.
그들이라면 점혈에 대한 수법을 개발해도 이상하진 않다.
다만 그 수법을 개발한 자들이 있는데, 정작 점혈의 유용함을 이해하지 못해 사장되어 가고 있다는 점은 좀 씁쓸했지만 말이다.
‘확실히, 기회가 된다면 케프렌이란 곳에 한 번쯤 들러보고 싶군.’
루시아나 아녜스조차도 점혈에 대한 지식이 없는 걸 보니 에드발의 말마따나 주류 무학은 아닐 것이다.
‘뭐, 나중에 루시아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지금은 무사히 살아 돌아온 녀석들과의 재회가 먼저다.
* * *
“네르하 도련님!”
“형님!”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처음, 단련실에 발을 들이밀 때만 해도 내부의 분위기는 상당히 무거웠다.
바스톤은 얼굴에 기다란 자상이 생긴 것으로 보아 네르하만큼은 아니더라도 꽤나 생사를 넘나든 것 같았고.
알페온 역시 바깥에서 호되게 당했는지 분위기가 상당히 처져 있었다.
그나마 루시아가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녀 역시 바깥에서 무언가를 얻어왔는지 열심히 단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네르하는 흐뭇하게 웃었다.
“다들, 표정이 좋아졌군.”
우거지상이 아니라?
그 생각을 한 루시아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좋아진, 건가요?”
뭔가 힐난이 섞인 말투였다.
“단순히 표정이나 혈색을 말하는 게 아니야. 어디까지나 무인으로서의 의미이지. 역경과 고난, 생사를 넘나드는 사이에 사람은 성장하는 법이니까.”
“뭐, 틀린 말은 아니네요.”
무인이란 말에 딴지 걸 줄 알았더니 루시아는 의외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마음에 큰 짐을 지지 않는 게 좋다. 너흰 아직 햇병아리고, 실수를 할 수밖에 없는 나이와 실력이니까.”
그 햇병아리라는 말에 네르하의 이름이 슬쩍 빠진 것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설사 희생자가 바로 옆에서 나왔다고 해도 말이지.”
그 말에 알페온의 표정이 살짝 꿈틀거렸다.
특히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더니 네르하의 말처럼 실습에서 누군가 희생자가 생긴 모양이었다.
네르하가 알페온을 직시하며 말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건 전투 마법사다. 최전선의 선봉에 서서 라데우스의 적을 분쇄하고 피를 흩뿌리는 걸 업으로 삼는 자들이지.”
“크으윽!”
“고작 이 정도에 마음이 무너진다면 진지하게 퇴소를 고려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상처를 후벼 파는 냉정한 말에 알페온이 이를 악물었다.
“그게 아니라면 빨리 훌훌 털고 일어나. 죽은 놈에게 술 한 잔 뿌려 주고 털어 버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형님.”
알페온의 표정은 여전히 괴로워 보였지만 나름 후련한 기색이 얼핏 보였다.
네르하는 그런 녀석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괜찮은 놈이야.’
리브레히트 가문의 적자. 즉,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최고위 귀족이란 뜻이다.
보통, 리브라에 입소한 고위 귀족 놈들의 태도를 보면 금방 알겠지만.
그런 놈들은 누군가가 죽든 말든 관계없이 ‘내 발목만 잡지 마라’는 마인드가 대부분인 놈들이었다.
즉, 타인의 고통과 상처에 아주 무감각한 놈들이란 소리인데, 알페온은 고위 귀족의 일원이면서도 여정을 함께한 동료의 죽음에 괴로워해 주는 바른 인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놈들이라면 슬슬 비전(祕傳)을 풀어도 괜찮을 것 같군.’
마법적인 소양이야 아직 네르하가 누군가를 가르칠 수준은 아니지만 적어도 생존을 위한 비전 정도는 충분히 주입해 줄 수 있었다.
어쩌면 리브라가 가르치는 것 이상으로 말이다.
‘루시아나 바스톤은 바로 시작해도 되겠지만 알페온은 육체를 좀 더 완성한 다음에 시작해야겠군.’
네르하가 그렇게 결심하고 있을 때였다.
“허허허.”
“……!”
네르하는 순간, 뒤에서 들려온 노인의 목소리에 화급하게 자세를 잡았다.
그 목소리가 익숙한지 아닌지는 둘째 치더라도 자신의 감각을 속이고 여기까지 접근할 정도라면 절대로 보통 실력자가 아니었다.
그런 기민한 대응에 상대가 부드러운 어조로 네르하를 타일렀다.
“경계가 지나치구나. 실습에서 막 돌아왔다지만 조금 긴장을 푸는 건 어떠하냐?”
“학장님이시군요.”
네르하는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천천히 자세를 풀었다.
리브라의 총책임자, 루트비히 라데우스가 갑자기 네르하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 * *
“마신강림(魔神降臨)이란 사건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지. 내가 널 부르는 것보다 내가 먼저 널 찾아갈 만큼의 가치가.”
저벅, 저벅.
두 사람은 마치 산책을 하듯 건물 안쪽을 맴돌았다.
“네르하야.”
“예. 학장님.”
“편히 말하거라.”
루트비히는 항렬상 네르하의 작은할아버지에 속했다.
네르하가 공손히 답했다.
“예. 숙조부.”
“이번에 큰 공을 세웠다고 들었다.”
그 말에 네르하는 눈을 살짝 반개했다.
‘벌써 그쪽 소식이 여기까지 들려온 건가?’
출발할 당시엔 이제 막 조사단이 파견 나온 상태였을 텐데 본가도 아니고 리브라에 있는 루트비히에게까지 정보가 들어갔을 줄이야!
그것과는 별개로 네르하는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았다라. 마계 백작 크루갈을 처치한 것이 운만으로 될 일은 아니지.”
“…….”
루트비히에게서 ‘크루갈’이란 이름이 나오자 네르하는 속으로는 적잖게 당황했다.
‘유명한 놈이었나?’
지금 수준으로는 확실히 벅찬 놈이 맞았지만 전생의 전성기로 보면 크게 거슬릴 만한 놈은 아니었다.
“물론 네 손에 쓰러졌다면 그 부활에 치명적인 허점이 존재했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허허허허!”
‘아니, 이 영감탱이가?’
은근슬쩍 자신의 위업을 깎아내리는 모습에, 찰나이지만 네르하의 표정이 구겨졌다.
하지만 방금 전의 발언은 단순한 장난이었는지 진지하게 표정을 바꾼 루트비히가 네르하에게 물었다.
“원하는 것이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