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레이첼 루비아이 (1)>
네르하는 고개를 돌려 루트비히와 눈을 마주했다.
“원하는 것이라면?”
“너는 이번 외부 미션에서 최고점을 받을 거다. 하지만 네가 세운 공은 그걸로는 퉁 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지.”
사실, 그렇긴 했다.
네르하가 없었다면 크루갈은 온전한 상태로 부활했을 것이고, 같이 갔던 녀석들은 죄다 죽어버렸을 테니까.
“본가 차원에서도 충분한 보상이 내려질 테지만 최고점 외에 따로 원하는 것이 있는지 묻고 싶구나.”
네르하는 순간, 살짝 의구심을 가졌다.
본가의 상이나 최고점은 그렇다 쳐도 아무리 그래도 학장이 직접 찾아와서까지 원하는 게 있냐고 묻는 건 뭔가 이상하다.
그렇기에 네르하는 이렇게 반문했다.
“오히려 제게 원하는 게 있으신 것 같습니다만?”
“흐음.”
루트비히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분명 뭔가 원하는 게 있긴 한데 말하기엔 좀 꺼림칙하다는 기색이 팍팍 느껴졌다.
‘뭐가 있지? 학장이 굳이 날 찾아와서 아쉬운 소리를 할 만한 게?’
전대의 원로인 루트비히가 후계 경쟁에서도 가장 뒤떨어진 네르하에게 뭔가를 원하기란 진짜 쉽지 않았다.
그때.
네르하의 머릿속을 잠깐 스쳐 지나간 누군가의 한마디.
“사마자(四魔子)가 되어 주기로 약속했거든.”
네르하는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내뱉은 당사자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시저 루드벡?”
“크흠!”
정곡을 찔렸는지 루트비히가 크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맞군.’
라데우스의 혈족이 아님에도 그 혈족들보다 훨씬 위대한 마법적 소양을 쌓은 3인의 대마법사, 삼마자(三魔子).
시저 루드벡은 그런 삼마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마법사이며, 당연히 라데우스의 스카우트 대상 1순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글러브도 그 영감탱……. 아니, 그분이 가져다준 것이었죠.”
네르하는 이젠 상시 착용하고 다니는 글러브, 본인 명명 마령수투(魔靈手套)를 바라보며 말했다.
“끄응!”
루트비히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사실, 말이다.”
그는 얼마 전 있었던 시저와의 대담을 떠올렸다.
“며칠 전에 그놈이 날 찾아와서 널 자신의 후계자로 삼겠다고 공표하더구나.”
‘와.’
네르하는 속으로 감탄했다.
영감탱이가 행동력 하난 끝내줬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가문 소속은 되지 않겠다고 배 째라는 식으로 나와서 말이지. 이전 가주와의 약속은 리브라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억지를 부리더군.”
“와!”
네르하는 더더욱 감탄했다.
그 라데우스를 상대로 이렇게 배짱을 부릴 호걸이 존재했었다니!
“그와 관련해 현재, 녀석과 의견을 조율 중이다. 아마 정식으로, 그리고 비밀리에 리브라에 초빙될 거다. 뭔가에 꽂히면 무슨 손해를 입든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놈이라서.”
역시 중원이나 여기나 실력이 있으면 이렇게 막 나가도 되는구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러니 그 나이에 그 실력을 처먹고도 아직도 자리를 못 잡고 있지. 빌어먹을 놈.”
“네? 방금,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니다.”
방금 귓가에 아주 차진 욕설이 들려온 것 같은데?
그것도 대륙에서 명성이 드높아 대현자라고 불리는 루트비히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데?
네르하의 불신 어린 시선을 마주한 루트비히는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가문의 어른이자 너의 작은할아버지로서 하는 명령이다. 잊어라.”
“네.”
힘없고 연약한(?) 네르하로서는 루트비히의 말을 순순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큼큼! 아무튼 간에.”
루트비히는 살짝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나는 네가 시저 놈을 라데우스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는 데 협조해 주었으면 하는구나.”
여전히 말투 속에 놈, 놈 운운하는 게 해결되지 않은 느낌이지만 하여튼.
“그걸 위한 선심성 보상입니까?”
네르하의 뼈가 있는 물음에도 루트비히는 기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만한 실력자가 여전히 소속이 없다는 건 라데우스의 행사에 큰 불안 요소지. 네게도 나쁜 일은 아니다. 녀석이 네 후견인이 되면 가문 내에서 큰 힘이 될 테니까.”
“…….”
그건 맞는 말일 거다. 시저의 존재는 네르하에게 정말 큰 힘이 되겠지.
다만 그와는 별개로 네르하는 루트비히의 그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문의 패권을 위해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이 과거, 자신이 미숙한 시절에 겪었던 하북신가의 직계 형제들과 뭔가 겹쳐져 보였으니까.
그때, 그런 네르하의 불편한 심기를 읽었는지 루트비히가 피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굳이 녀석을 적극적으로 설득할 필요는 없다. 아니, 그냥 설득 자체를 할 필요도 없다.”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네 재능이 나와 시저 놈의 예상대로라면 굳이 설득하려 하지 않아도 놈은 라데우스에 붙어 있을 게 뻔하니까.”
아주 찰나의 순간, 날카로운 루트비히의 눈빛이 네르하와 마주쳤다.
“앞으로 가주직을 노리는 너를 녀석이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않느냐?”
“…….”
나름 치명적일 수도 있는 말임에도 네르하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럴 수도 있겠죠.”
루트비히는 제법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루트비히나 부학장 네슬렉에게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각오는 이미 하고 있었다.
‘수여식에서 그렇게 난리를 피웠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아무리 보물전의 관리자인 인공 정령 페레스가 외부와의 중계를 차단했다고 해도 리브라의 학장인 루트비히는 그 차단된 중계를 다시 열어젖힐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이 있었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마.”
루트비히가 말했다.
“원하는 것을 말해 보거라.”
자신을 이용하려고 하는 상대의 모습에도 네르하는 지그시 그 분노를 억눌렀다.
무작정 분노를 표출하기엔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쪽도 적극적으로 상대를 이용해야 했다.
“상시 외출권을 주십시오. 그리고 대련장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 역시 필요합니다.”
“상시 외출권이라. 너무 노골적이구나.”
“숙조부께서 제 야심을 알고 계시다면 굳이 줄다리기를 할 필요는 없지요.”
“그렇긴 하지.”
루트비히는 나지막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해 주마.”
설마 곧바로 이 제안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기에 네르하는 상당히 의외라는 눈빛을 보냈다.
특별한 시험이나 대결이 있을 때나 사용 가능한 대련장이야 그렇다 쳐도 상시 외출권은 사소해 보이지만 리브라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는 혜택이었다.
“흠, 원래라면 사손과 좀 더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만.”
루트비히의 시선이 저 밖으로 향했다.
“바깥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으니 이만 물러나야겠구나.”
네르하 역시 그 ‘이’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끌끌, 그럼 나중에 또 보자꾸나.”
루트비히는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네르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루트비히가 떠나간 입구로 서릿빛 머리카락의 한 여인이 문 구석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어, 저기.”
“클로이아.”
그녀는 지금껏 루트비히의 눈치를 보고 있던 것 같았다.
클로이아는 루트비히가 사라진 것을 확신할 때까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헤프게 웃으며 네르하에게 다가왔다.
“다, 다녀오셨어요?”
“뭘 그렇게 할아범 눈치를 보고 있어?”
“월급 주는 사장님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으니까요. 아니, 회장님인가?”
“…….”
뭔가 직장인의 한이 느껴지는 듯한 대답이었다.
네르하는 그런 클로이아를 향해 살짝 헛웃음을 짓고는 그대로 그녀의 한쪽 어깨를 부여잡았다.
“다녀왔다.”
* * *
클로이아와 재회한 네르하는 자신이 그렌 타운에서 있었을 때의 일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그 모습을 소리 없이 동작으로만 보면 마치 엄마에게 성적 자랑하는 아들내미(…)와도 같은 모습이라, 멀리서 지켜보던 이들은 조금 떨떠름했지만 말이다.
“마, 마족? 그것도 북방에……!”
클로이아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렌 타운에서 일어난 일보단 그 이후, 아르바와 조우하고 일어난 일이었다.
“그건 걱정 마. 형님과의 거래에서 북방 서리 일족에 대한 정보도 함께 얻어냈으니까.”
아르바의 말에 따르면 북방의 치안을 담당하던 서리 일족은 마왕급 마족의 대두와 함께 착실하게 세력을 수습해 남쪽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지금은 아르바가 이끄는 라데우스 세력과 합류해 반격을 준비 중이라나?
“그건 다행이지만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다는 소리이기도 하군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아르바가 정신이 나간 게 아닌 이상 서리 일족을 방패막이로 쓰진 않을 거야.”
다만 지금 중요한 건 북방이 아니다.
아르바는 분명 뭔가 반전의 수를 쓸 것이고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진 먼 곳에 있는 우린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세이라가 그렌 타운의 일을 마무리하고 올라오면 어머님의 세력과 연합해 새로운 정보 조직을 만들 거야.”
그 정보 조직의 역량이 첫 번째로 발휘될 지점은 당연히 북방이 될 것이다.
그런데 기뻐하거나 안심해야 할 클로이아가 왠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이라?”
“응. 순혈 뱀파이어긴 한데 그리 강하진 않아. 다만 수완이 제법 좋은 인재이긴 하지.”
“예쁘던가요?”
클로이아가 뜬금없이 세이라의 외모를 묻자 네르하는 살짝 고개를 갸우뚱한 후에 답을 해 주었다.
“외모? 아니, 뭐 아름답긴 하지. 뱀파이어 특유의 창백한 피부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긴 한데.”
“그렇……군요.”
그녀는 뭔가 번뇌에 빠진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간신히 납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그게 도련님의 선택이라면 믿고 따라야겠죠. 나중에 좀 따로 얼굴을 보는 건 그때 일이고요.”
“어? 어. 믿어주니 고맙긴 한데.”
뭔가 뉘앙스가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어쨌든 네르하는 클로이아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했다.
“그 정보 조직의 관리는 네가 맡아 줬으면 좋겠어.”
“제가, 말입니까?”
네르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학장에게 상시 외출권을 받긴 했는데 그렇다고 내가 관리를 위해 주도를 들락거릴 수는 없어. 하지만 너는 예외겠지. 이런 일에선 내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신뢰.”
“그렇지.”
클로이아는 네르하가 말한 신뢰라는 말이 마음에 든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자주 갈 필요도 없어. 시간이 날 때마다 나가서 엇나가지 않게 가끔씩 관리 감독만 해 주면 돼.”
너무 방치하면 그 세력이 어머니 로젤리아의 휘하에 잡아먹힐 수도 있었다.
아무리 초기 자금을 그녀에게 빌린다고는 해도 지금 만들려는 이 정보 조직은 오롯이 네르하 본인만의 것이 되어야만 했다.
“맡겨 주세요. 착실하고, 또 확실하게 관리해 드릴 테니까.”
“든든하군.”
차후 라데우스 후계 간의 권력 싸움이 어떤 식을 진행될지는 몰라도, 적어도 정치판에서 정보전에서 뒤진다면 뭘 해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조직의 이름은 생각해 두셨나요?”
네르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림슨이란 이름을 계속 써도 되겠지만, 네르하는 조금 더 의미 있는 이름을 정보 조직의 이름으로 쓰고 싶었다.
“미네르바(Minerva). 지혜의 여신 중 하나라더군.”
“괜찮군요.”
클로이아 역시 이 이름에 동의했다.
그렇게 차후 수십 년 동안 네르하의 밑에서 죽어라 구르고 고생한 정보조직, 미네르바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