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레이첼 루비아이 (2)>
“정보조직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면 이제 다른 정보 길드 같은 곳에 발품 팔지 않아도 돼.”
“하지만 이제 막 설립한 조직에 신뢰성이 있을지…….”
물론 미네르바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길드와 비교한다면 분명 손색이 있다. 하지만 그런 놈들과의 격차를 줄여 주는 게 바로.
“돈이면 다 돼.”
그리고 네르하는 충분할 정도의 돈이 있었다.
“과연!”
클로이아는 상당히 공감이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족들에게 안부를 전해 받는 것 외에도 클로이아는 주기적으로 정보 길드를 통해 북방의 소식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 비용이 일개 사서나 초임 교수 월봉으로는 쉽게 감당할 액수가 아니었으니 네르하의 말에 구미가 당기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문제는 녀석들이 올라오면 본격적으로 논의하도록 하고.”
다음으로 네르하는 흑마법사 및 마족들과의 싸움에서 자신이 부족했던 점을 털어놓았다.
“역시 이론을 배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만약 아크의 마법사들이 두칸의 힘을 빼놓지 않았다면 네르하가 과연 두칸을 죽일 수 있었을까?
이번에 상대한 마족 크루갈이 무투형이 아닌 일반적인 결계형 마족이었다면 수월하게 대응할 수 있었을까?
“아니겠지. 내가 아무리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해도 주제는 아니까.”
“그건 겸손인가요, 자만인가요?”
“겸손이지.”
어이가 없다는 그녀의 표정에도 네르하는 진지했다.
“내 약점 중 하나인 절대적인 마법 경지에 대한 부족은 어쩔 수 없어. 아무리 단축시킨다 해도 결국 시간만이 해결해 줄 문제니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지.”
“그렇죠. 아무리 도련님이 육체 능력으로 커버한다 해도 빈틈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게 대마법전에 대한 경험.”
“그래. 마도전(魔道戰)이지.”
상대가 불을 날리면 물로 응수하고, 바람을 날리면 땅을 일깨워 막아서는 고전적이고 기본적인 마법사들의 전투.
그것이 바로 마도전이다.
“솔직히 실전이라면 누구랑 붙어도 질 자신이 없지만, 순수 마법 역량으로는 아직 허점이 많은 게 사실이야.”
“하지만 그런 식의 대결은 이곳 리브라의 기조와는 맞지 않긴 하죠.”
리브라의 마도전은 철저한 실전.
파이어볼~을 날리면 그에 맞춰 워터볼~을 날려 상쇄하는, 그런 평화로운 마법 시연회가 아니다.
능력만 되면 마법 외에 활을 쏘든 창을 날리든 함정을 깔든,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이 바로 리브라의 마도전이었다.
클로이아는 떨떠름한 어조로 네르하를 바라보았다.
‘이 인간을 대체 누구랑 붙여야 하지?’
이곳, 리브라 내에서 네르하의 진짜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클로이아다.
‘어지간한 상급생과 붙인다 해도 순식간에 박살 내버릴 게 분명하고…….’
지금 네르하의 실력이라면 상급생…… 아니, 못해도 졸업반 정도에 속하는 최상급생 정도나 되어야 제대로 된 경험이 될 것이다.
다만 아직 초임 교수인 클로이아가 그런 이들과의 대련을 주도하기엔 아직 짬밥이 너무 모자라다.
“졸업반에서 도련님의 상대가 될 만한 아이들은 실력이나 연줄에서 꿀릴 게 없으니 반응해 줄 리가 없어요.”
“그 반대 아니야? 그 정도면 내 형제들에게 줄을 댄 녀석들이 많을 텐데. 날 꺾으면 대번에 입지 상승이 가능하잖아?”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요.”
클로이아는 난감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해도 직계에게 도전한다는 건 라데우스 내부에서도 꽤나 큰 리스크를 짊어지는 행위예요. 라데우스에서 직계는 절대적인 권력의 상징이고, 이기든 지든 그 결과물이 크게 찾아오니까요.”
배커와 제크론처럼 방계라도 되는 게 아닌 이상 일반적으론 보통 이상의 각오와 배짱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흠, 그래서 불가능하다?”
“재학생을 상대로라면 그렇죠.”
“응?”
“하지만 교수를 상대로 하는 지도 대련이라면, 도련님의 수준이라면 충분히 경험치를 쌓을 수 있어요.”
“교수?”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애초에 네르하 역시 5레벨에 이르기 위한 단서를 얻기 위해 한 번쯤은 리브라에 재직 중인 교수들을 싹 찾아가 볼 예정이었으니까.
“교수라면 더 힘든 것 아닌가?”
교수라면 졸업생 이상으로 실력 및 연줄이 튼튼한 자들 아닌가?
아무리 교수라도 자기 수업을 듣는 것도 아니고 무작정 지도 대련을 요청한다면 거절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렇긴 하죠, 일반적으로는.”
그나마 눈앞의 클로이아야 언제든지 어울려 줄 수 있겠지만 그녀 하나만으론 다양한 경험을 원하는 네르하에겐 모자라다.
“그, 일단 추천하는 인물이 하나 있긴 한데…….”
“그게 누구지?”
“첫 시작으로서는 꽤 강렬한 경험이 될 거예요. 이곳 리브라에서도 무려 ‘파괴 마법’ 담당인 분이니까.”
그 말에 네르하 역시 상대가 누구인지 대충 감을 잡았다.
다만 상대의 성격이 워낙 지랄 맞아 제대로 된 설득이 가능한지에 대해선 좀 회의적이었다.
클로이아는 살짝 식은땀을 흘렸다.
‘어, 어떻게 떼를 쓰면 뭐라도 되겠지?’
* * *
“미쳤냐?”
“…….”
그렇게 클로이아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지도 대련 요청에서 상대에게서 들려온 반응은 아주 심플했다.
“나보고 이 애송이에게 지도 대련을 해달라고? 내 짬이 얼만데 이년이 지금?”
“아, 서, 선배! 진정 좀 하시고!”
클로이아는 땀을 줄줄 흘리며 눈앞에서 불길을 뿜어내는 붉은색 머리카락의 여인을 뜯어말렸다.
“무엇보다 교수가 정해진 수업 외에 지도 대련을 해 주는 건 교칙 위반이야. 그걸 알 년이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교수실 내부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네르하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첼 루비아이.’
이곳 리브라에서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파괴 마법의 담당 교수이자 리브라 최연소 교수직에 임명된 천재 마법사.
그 재능과 실력은 능히 직계들과도 비교될 정도라고 하며, 한 30년 정도가 지나면 자신만의 일가를 이루거나 라데우스에서도 초고위직에 올라설 거란 평가를 받는 이였다.
“선배에~! 불쌍한 후배 하나 살려 주신다 치고 좀! 어떻게 한 번만! 아니, 다섯 번만!”
“아니, 이년이 어디서 앙탈이야? 당장 안 꺼져?!”
질척하게 들러붙는 클로이아를 냉정하게 까버리는 레이첼의 모습에 네르하는 헛웃음을 흘렸다.
“후우! 이봐, 네르하 도련님.”
“말씀하시죠, 교수님.”
“이 망할 년이 무슨 계산으로 나한테 앵기는지는 몰라도 대련은 불가능해. 싸워 줄 이유도 없고, 괜히 라데우스의 직계에게 상처라도 입혔다간 나만 손해니까.”
“…….”
“그리고 무엇보다 난 대련이라고 절대로 손대중을 하지 않아. 크게 다쳐서 의무실로 실려 나가고 싶지 않다면 이만 돌아가.”
“호오오…….”
그 순간, 네르하의 눈썹이 살짝 들썩거렸다.
“전 지도 대련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
“실전. 즉, 일반적인 마도전을 원합니다.”
“지금, 뭐라고?”
뭔가를 잘못 들었다는 듯 레이첼의 눈이 귀신처럼 변했다.
“장난해?”
“장난 아닙니다만.”
“고작 수여식에서 허접한 흑마법사 놈들 몇 죽였다고 내가 우습게 보여?”
주단과의 전투는 비공개가 되었지만 주단의 부하들을 상대했던 모습까진 확실하게 외부에 노출되었다.
뭐, 아직 네르하가 백작급 마족까지 처리한 사실은 교수진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지만.
“안 될 게 있습니까? 그 정도면 충분히 뻗대도 괜찮은 실적일 텐데요.”
“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넘어 허탈해하는 레이첼에게 클로이아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이었다.
“선배가 이기든 지든 아무런 이득도 없는 건 알지만 그래도 어떻게 좀…….”
그리고 그 말이 마른 장작에 기름과 횃불을 던진 셈이 되었다.
“뭐? 이기든, 지이이든!?”
화아악!
싸늘한 냉기가 교수실에 감돌기 시작했다.
클로이아의 말은 레이첼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렸다.
하지만 그녀 역시 십 년을 넘게 이곳에서 굴러먹은 베테랑. 임계점을 넘었어도 쉽게 터지진 않았다.
“네 잠재력은 인정한다만, 가문의 이름값을 믿고 너무 나대지 않는 게 좋아. 특히나 저년이 막아줄 거로 생각하지는 마라.”
이것은 레이첼이 네르하에게 날리는 최후통첩이었다.
하지만 네르하는 그런 그녀의 최후통첩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럼 내기는 어떻습니까?”
“내기라고?”
“만약 제가 진다면 교수님에게 뭐든 한 가지 요구를 들어 주겠습니다. ‘리브라의 신입생’ 네르하가 아닌, ‘라데우스의 후계’ 네르하 라데우스의 이름으로요.”
“무엇이든?”
“네. 무엇이든. 설사 후계 경쟁에서 발 빼라고 하셔도 기꺼이 받아들이죠.”
“…….”
설마 이렇게까지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레이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자신의 후계 지위까지 걸었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가 이번 일에 진심을 다하고 있다는 뜻.
레이첼은 허탈한 한숨을 터트렸다.
“만용인지, 자신감인지 모르겠군.”
“하시겠습니까? 교수님에겐 승률과 배당금이 꽤 괜찮다고 생각됩니다만.”
“끄으응!”
레이첼은 지금까지 화끈한 모습을 보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상당히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만약 내가 라데우스 본가. 그중에서도 특수한 곳으로 소속을 옮긴다고 한다면, 네가 그걸 가능하게 도와줄 수 있나?”
레이첼이라면 지금 실력으로도 충분히 본가의 요직을 차지할 수 있다.
다만 그녀가 굳이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지금 그녀의 실력과 입지로도 차지하기 힘든 무언가 특수한 보직이나 지위가 존재한다는 뜻.
네르하는 잠깐 생각 후에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가능하게 만들죠.”
“좋아. 받아들이지.”
레이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을 대비해서 묻겠어. 정말, 정말로 그런 일은 일어나진 않겠지만, 만약 네가 이긴다면 내게 원하는 게 있나?”
네르하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이긴다면 이후로도 언제든 제가 원할 때 지도 대련을 해 주시죠.”
레이첼이라면 앞으로 얻어낼 게 꽤 많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또한 교수님의 영향력이 미치는 한도까지 다른 교수님과도 지도 대련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손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좋아. 상급 교수나 선임 교수들은 무리지만 비슷한 짬이나 아래 녀석이라면 어떻게 가능하지.”
레이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짱 하나는 마음에 들어. 뒤에서 수작질 없이 이렇게 정면에서 패기를 부리는 후계는 네놈이 처음이군.”
“확실히 권력의 망자보단 낫죠.”
퍽!
“끄으으윽!”
시답잖은 추임새를 넣은 클로이아의 정수리를 응징한 레이첼이 네르하에게 손짓했다.
“따라와라.”
* * *
리브라의 대련장은 마치 콜로세움과도 같은 거대한 구조를 가진 시설이었다.
보통은 실기, 혹은 졸업반 생도들의 대련에 사용되는 만큼 일반 생도들은 함부로 이용하지 못하는 곳이기도 했다.
뭐, 루트비히에게서 사용권을 받아낸 네르하는 좀 사정이 다르지만.
“대련장의 실제 넓이는 200미터 정도에 불과하지만 라데우스의 공간 공학 기술이 총동원되어 체감 넓이는 1킬로에 달하지.”
환진(幻陣)이라기엔…… 지나치게 현실감이 있었다.
그야말로 실제로 공간을 늘려 버린 마도의 정수.
그 공간의 한가운데에서, 레이첼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네게 가르침을 내려도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겠지?”
철컥철컥철컥철컥!
“……!”
무언가가 장전되는 소리와 함께 네르하의 시야 전체가 새빨간 적색으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이건, 상상 이상인데?’
“내가 리브라에 교수로 임용되기 전에는 몇 년 정도 전장에서 구른 적이 있었거든?”
레이첼은 그 시절을 잠깐 회상하며 말을 이었다.
“잿불의 귀녀, 멸망의 마녀, 요새 파괴자. 당시, 전장에서 내게 붙은 별칭들이다.”
“그만한 위용이군요.”
“부디 내게 배짱을 부린 만큼의 실력이 있길 빌겠어.”
그 말을 끝으로, 레이첼이 손에 쥔 단봉을 가볍게 휘둘렀다.
쿠과과과광!
그리고 그 결과, 네르하의 눈앞에 거대한 불꽃의 파도가 몰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