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교류전의 시작 (3)>
루트비히는 자신의 학장실로 찾아온 중년의 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시오, 베하나스 경.”
“안녕하십니까? 학장님.”
짧은 갈색 턱수염이 인상적인 중후한 중년의 기사.
검왕 베하나스 마그레스.
비(非)케프렌 일족인 기사 중에서는 거의 정점에 도달한 대륙 굴지의 실력자이자 케프렌 원탁의 기사 중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한 인물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불편함은 없었는지?”
“산맥 입구에서부터 안내인을 보내주신 배려 덕분에 그런 건 없었습니다.”
사실, 있다 하더라도 그걸 내뱉어선 안 되었다.
자신들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광고하는 꼴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루트비히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허허허, 그렇구려. 산맥의 산세가 워낙 험해 고생하지 않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니 다행이오.”
“이런 뒷산에 오르는 걸 힘들어할 만큼 약골은 없지요.”
파지지직!
두 사람의 표정이 허공에서 얽혔다.
하지만 아무리 베하나스라 해도 짬으로는 대륙 최고를 달리는 루트비히와 계속해서 눈싸움을 벌일 수는 없었다.
결국 베하나스는 한 발짝 물러서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번 교류전은 사전에 총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케프렌의 직계 한 명이 끼어 있습니다.”
“이름은 들었소. 아네시스 케프렌이라고?”
“네. 거기에 더해 미리 말씀을 드리지 못했지만 방계의 아이 중 하나 역시 이번 사절단에 포함되었습니다.”
꿈틀!
루트비히의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사전에 논의되지 않은 일을 멋대로 벌이는 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방계라고요?”
“네. 이름은 시라스 루 케프렌. 검의 낙원 3년 차 생도 중에서는 가장 두각을 보이는 녀석이지요.”
“호오?”
루트비히의 표정이 살짝 뒤바뀌었다.
베하나스가 저렇게 칭찬하는 만큼 시라스라는 녀석은 평소라면 교류전에 참가할 리가 없는 케프렌의 ‘에이스급’ 기사가 분명했다.
“그만한 이가 포함되었는데 사전에 통보가 없었다라…….”
살짝 불쾌하다는 어조에 베하나스가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 점은 매우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이번 교류전에 참석하고 싶다고 뒤늦게 떼를 부렸는지라.”
마치 준비된 듯한 사죄에 루트비히는 속으로 비웃음을 머금었다.
아무리 떼를 부린다고 이미 결정된 일을 번복할 정도로 검의 낙원은 허술한 집단이 아니다.
단순한 기만이든, 아니면 무언가 수작질을 벌였든 시라스라는 인물이 대표에 포함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구려. 어차피 우리 쪽에서도 인원의 변화가 있었으니 이것으로 퉁 치면 되겠군.”
“……?”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30분쯤 전에 그쪽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이 충돌을 한 모양이라오.”
“충돌이라면?”
루트비히는 대답 대신 슬그머니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교류전 대련회 추가 인원 목록]
―네르하 라데우스(1학년)
―배커 라데우스(1학년)
―바스톤 페레이라(1학년)
베하나스는 네르하의 밑에 새롭게 추가된 배커의 이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스라는 3학년 생도가 리브라 외곽에서 1학년인 배커에게 시비를 걸었다더군. 그 맺음을 교류전에서 결정하기로 했고.”
루트비히는 한순간, 베하나스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열 받았구먼.’
완벽하게 무표정을 연기하고 있지만 노회한 루트비히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확실히 반대의 상황이라면 루트비히 역시 사고를 친 놈들을 갈아 마셨을 것이다.
“그렇군요.”
그렇게 한참이 지나.
베하나스에게서 담담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냉정해졌군.’
루트비히가 내심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서로 간에 그렇게 결정하기로 약속을 나누었다면 그대로 풀면 되는 일. 괜히 윗선에서 개입하는 건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일일 뿐이지요.”
“옳은 말이오.”
“이 일은 이대로 묻어두는 것으로 하시고,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순간, 살짝 느슨했던 루트비히의 정치적 감각이 빠르게 조여졌다.
지금까지의 모든 대화는 전부 잡담이자 사담.
지금부터 입 밖으로 나올 말이 베하나스와 검의 낙원의 본론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게 베하나스에게서 나름 골치 아픈 주제가 튀어나왔다.
“현재, 리브라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본가의 루시엘라 엘 케프렌을 이번 교류전이 끝나면 다시 검의 낙원으로 데려가려 합니다.”
“…….”
“…….”
아주 잠시지만,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루트비히의 머릿속이 아주 복잡하게 휘몰아쳤다.
이런 중차대한 일을 이제 와서 의논도 아니고 갑자기 통보하듯 말하는 것은 상당한 외교적 결례였다.
무엇보다.
검의 낙원 총장인 아센시오가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루시엘라를 아무리 원탁의 기사라지만 아센시오의 밑 직급에 있는 베하나스가 언급하는 건 뭔가 이상했다.
그렇기에 루트비히의 대응은 지극히 단순했다.
“허허, 그게 무슨 말인지?”
“말 돌리실 필요 없습니다. 루시엘라가 지금, 리브라에 있는 것은 이미 확인한 사안이니까요.”
베하나스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언젠가 케프렌의 가주가 될 수도 있는 아이. 아네시스처럼 하위 서열도 아니고, 무려 계승 서열 2위에 있는 아이입니다. 계속 라데우스의 품에 두는 건 옳지 않은 일이지요.”
“옳지 않다?”
“그러니 이번 일이 끝나면 루시엘라를 데려가겠습니다. 리브라에 계속 두는 건 그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위험한 일이니까요.”
아무래도 어디에서 정보를 얻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루시엘라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루트비히는 깔끔하게.
“거절하겠네.”
그 제안을 잘라 내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거절하겠다고 했네.”
그 말에 지금까지 무표정을 고수하던 베하나스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설마, 두 가문 사이에 전쟁을 원하시는 겁니까?”
“전쟁이라…….”
전쟁이란 말을 조용히 읊조린 루트비히가 싸늘한 눈빛으로 베하나스를 옭아매었다.
“건방지군.”
“크윽!”
아무리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검왕급 기사라고는 하나 루트비히는 그런 베하나스보다도 한 수 위에 있는 실력자.
루트비히가 본격적으로 기세를 발산하자 베하나스는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는 인질이 아니네. 애초부터 알아서 우리 품에 안겨 온 아이이니 우리는 그 아이를 소중히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지.”
“그 아이가 라데우스의 품에 있는 것만으로도 일이 복잡해진다는 걸 모르십니까!”
“모를 리가 있나? 하지만 자네는 그 아이를 우리에게 보낸 이가 누구인지 알기나 하나?”
“큭!”
베하나스의 어깨가 대번에 움츠러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루시엘라를 리브라에 보낸 이는 케프렌 내부에서 베하나스보다도 까마득하게 높은 서열에 있는 이였으니까.
“평생 부탁 한 번 하지 않았던 ‘그 친구’가 내게 부탁을 해왔네. 그런 만큼 나는 케프렌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든 그 아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어.”
당장 베하나스가 어느 파벌에 속해 있는지에 따라 루시엘라를 건네주는 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과도 같을 수가 있었다.
베하나스가 이를 갈며 말했다.
“후회하실 겁니다.”
“원탁 따위가 내게 협박이라니, 참 많이도 컸군.”
루트비히는 코웃음을 쳤다.
부들거리는 베하나스의 모습을 즐겁게 지켜본 루트비히는 슬슬 떡밥을 던질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럼 우리, 내기나 한번 해 보겠나?”
“내기라니요?”
뜬금없이 내뱉어진 말에 베하나스의 분노가 일순간 흔들렸다.
루트비히가 느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 내기지. 그 아이는 아무래도 우리 리브라의 교육에 아주 잘 적응하고 있거든. 마법사로서 장래가 아주 유망해.”
으드득!
루트비히의 그 말은 베하나스에겐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겁니까?”
“방금, 자네가 장래 운운하지 않았나? 솔직히 말해 그 한마디에 내 심사가 좀 뒤틀렸거든.”
루트비히의 고개가 살짝 삐딱하게 꺾였다.
“그러니 ‘마법사’로서의 그 아이와, 그래. 시라스라는 그 청년을 이번 교류전에서 붙여 보는 건 어떠한가?”
“……!”
지금, 이 노친네가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지?
베하나스는 순간, 얼이 빠진 얼굴로 이렇게 되물었다.
“진심이십니까?”
“내가 자네 상대로 농담 따먹기나 할 위치로 보이나?”
시라스 루 케프렌의 기량이 검의 낙원에서도 최상위권에 들 정도이긴 하나 루시엘라 엘 케프렌의 기량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검을 든 ‘기사’로서 비교하면 그렇다는 거지. 뭐? 마법사로서 어쩌고 저째?
여기서 루트비히가 기막힌 도발을 날렸다.
“아아, 물론 어느 정도 기본적인 ‘체술’을 써도 상관은 없겠지? 검술로 싸우는 건 아니까 말이야.”
“…….”
“그 정도 핸디캡도 안지 못한다면야 얘기는 할 것도 없겠지. 이만 물러가게.”
“하, 하하, 하하하하…….”
베하나스는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루시엘라와 마법의 조합.
비록 괴물처럼 성장한 대공자에게 밀려 서열 2위가 되었다지만 루시엘라는 한때 수백 년 만에 여성 가주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 기대된 검의 귀재였다.
평생 검을 잡아 온 그녀가 마법 이론을 배웠을 리가 만무했으며, 설사 배웠다 해도 리브라에 입학한 지난 6개월 정도가 다일 것이다.
‘시라스와 루시엘라라.’
시라스의 위치는 현 3학년 ‘수석’.
아직 졸업반이 아님에도 검기를 뽑아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다.
리브라로 따지면 5레벨에 도달한 수준.
그런 시라스가 검술을 배제한 루시엘라와 대결을 한다?
“좋습니다.”
베하나스는 루트비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애초에 이건 승산을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이쪽에게 유리한 승부였다.
설사 마법이 아닌 체술로만 승부를 건다고 해도 검을 든 시라스가 훨씬 더 유리할 테니까.
“저희가 이기면 당연히 루시엘라를 데려가는 것으로. 만약 그쪽이 이긴다면 저희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루트비히의 말문이 열렸다.
“그렌 타운을 라데우스에게 넘기게.”
움찔!
베하나스의 표정에 당황이 서렸다.
“꽤나 큰 걸 바라시는군요.”
“역배당이 큰 만큼 판돈도 커야지.”
“배당률과는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그렌 타운이라니요? 그곳은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중립 지역이지. 돌고 있는 자금은 제법 탐이 나나 ‘고귀하신 케프렌’이 직접 손대기엔 또 자존심이 상하는 곳. 그야말로 닭의 갈비와도 같은 곳이 아닌가?”
루트비히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그 정도면 원탁의 기사인 자네 선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보내만? 왜, 질까 봐 겁이 나나?”
베하나스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값싼 도발은 둘째 치더라도 확실히 그렌 타운 정도야 본가의 장로인 베하나스라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래. 지지만 않으면 되는 문제다. 그리고 설사 진다 해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그렌 타운 정도야 얼마든지 넘겨줄 수 있다.
마음을 정한 베하나스는 고개를 들어 루트비히를 직시했다.
“좋습니다. 만약 리브라 쪽이 이긴다면 그렌 타운을 라데우스에게 넘겨드리죠.”
“화통해서 좋군. 그럼 계약서를 작성해 볼까?”
그래도 도시 하나의 운명을 정하는 일인데 구두계약만으로 처리하기엔 확실히 불안하긴 했다.
그렇게 루트비히가 만든 계약서에 서명을 한 베하나스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학장실에서 나갔다.
“흐흠!”
루트비히는 자신에겐 별다른 이득도 없는 그렌 타운을 건 계약서를 바라보다가 학장실 구석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래. 이제 만족하느냐, 네르하야?”
스윽!
마치 공간이 일그러지듯,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서 은갈색 머리카락의 청년 네르하의 모습이 튀어나왔다.
네르하는 씨익 웃으며 루트비히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숙조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