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베하나스는 네르하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지원군이라고 불러온 게 고작 라데우스의 꼬맹이인가?”
방금 전의 기습은 분명 대단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네르하는 베하나스의 모습을 보고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가장 확률이 높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만큼 허황된 듯싶어 고려 대상에서 빼놓았더니 곧바로 뒤통수를 얻어맞았군.”
네르하가 뒤를 흘겨보며 말했다.
“살아 있냐?”
“보면 몰라요?”
루시아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정말 괜찮겠어요? 상대는 검왕 베하나스. 오직 실력만으로 원탁의 기사에 임명된 최고의 실력자 중 하나입니다.”
네르하는 그런 루시아의 충고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그래 보이는군. 기도가 생각보다 더 출중해.”
처음에는 초절정 정도로 보였었는데 상대는 벽을 어느 정도 허물고 화경의 초입에 들어서 있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상황이 급하지만 한번 말해 보세요.”
“케프렌에서 저놈보다 강한 녀석이 몇이나 존재하지?”
저놈의 기도는 분명 이전, 만났던 마계 백작 크루갈이란 녀석이 생각날 정도였다.
물론 크루갈이란 놈의 부활이 불완전했다는 것도 고려해야겠지만 그만큼 상대의 수준이 인간적인 면모를 넘어섰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뜬금없이 말인가요?”
“나름 진지한 질문인데.”
루시아는 그 말에 살짝 고민하더니 나름 자신의 추측을 내놓았다.
“전대의 인물까지 포함해도 스무 명은 넘지 못할 거예요.”
“그래도 열 명은 넘는다는 소리군.”
화경급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최소 열이라?
라데우스의 규모에도 놀랐지만 케프렌이란 집단 역시 생각보다 훨씬 거대하고 강대한 세력인 것 같았다.
“좋아. 그럼 계산도 끝냈으니 어디 한번 놀아볼까?”
“정말로 혼자 상대하시게요?”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거든. 나름 벽도 뚫었겠다, 마나도 충분하겠다. 조금 벅찬 상대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승산이 없는 건 아니야.”
네르하가 호기롭게 말하며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민 순간이었다.
“웃기는 소리로군.”
번쩍!
베하나스의 나지막한 말이 들림과 동시에 네르하의 목덜미에 하얗게 빛나는 실선이 그어졌다.
“안 돼!”
한순간, 루시아는 네르하의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방금 전, 베하나스가 휘두른 일격은 그만큼 치명적이었고 또 무척이나 정교했다.
그러나.
스윽!
목에 선이 그어진 네르하의 신형이 마치 벚꽃 잎이 휘날리듯 사라지더니 그대로 베하나스의 뒤편에서 다시 나타났다!
“환영 마법? 아니, 설마 발재간만으로 만든 환상이었나!”
“그래도 눈썰미는 제법 있군.”
금천각(金穿脚)!
황금의 기운을 휘감은 네르하의 발길질이 그대로 베하나스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갔다.
“황금빛 기운… 케프렌의 골든 글로리? 아니, 느낌이 좀 다르군!”
역시 화경급에 도달한 고수답게 베하나스는 가볍게 머리를 움직여 네르하의 공격을 피했다.
“신기한 존재로군. 라데우스의 혈족이 분명한데도 그들 특유의 백금색이 아니라 케프렌에 가까운 황금색을 발현하다니?”
“그런 말, 많이 들었지.”
네르하의 공격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마치 유수(流水)처럼 면면부절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끊임없이 베하나스를 몰아쳤다.
“제법 괜찮은 연격이로군!”
잔상을 흘리며 다가오는 네르하의 연격에 베하나스는 즐거운 웃음을 흘리며 그 공격들을 받아쳐 나갔다.
‘그런데, 이놈은 분명 마법사가 아닌가?’
분명 일반적인 마법사처럼 거리를 두고 강한 화력이 담긴 마법을 쏘아내야 정상이거늘 이건 마치 전장을 질주하는 숙련된 권사와 싸우는 느낌이었다.
베하나스는 쉴 새 없이 들어오는 네르하의 공격을 걷어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공격이 이어질수록 무거움이 더해지고 있다!’
공격 하나하나가 무겁기 그지없고, 또 정묘한 무리를 담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가볍게 놀아주려던 마음이었지만 보면 볼수록 네르하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완벽해지고 있었다.
‘호흡, 중심, 힘의 배분……. 모든 것이 완벽하다!’
베하나스는 이대로 가다간 결말이 어떻게 될지를 예측하고는 전율했다.
‘이, 이 내가 말리고 있다고?!’
콰앙!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네르하를 떨쳐내기 위해 베하나스는 일부러 거대한 오러를 내뿜으며 막대한 화력을 펼쳤다.
“쳇.”
워낙 기본 베이스 차이가 거대하다 보니, 네르하의 신형이 대번에 밀려났다.
네르하가 물러선 자리에 기다란 참격이 잔상처럼 그어졌다.
역시 화경급 고수가 내지르는 오러의 위력은 쉽게 흘려낼 수가 없었다.
“명색이 최고의 검수라는 놈이 검술이 아니라 오러로 승부를 보려고 하다니. 쪽팔린 줄 알아.”
네르하의 핀잔에 베하나스의 표정이 살짝 붉어졌다.
그가 네르하를 향해 말했다.
“당신은 누구시오?”
“누구냐니?”
“네르하 라데우스의 모습을 하고선 나를 기만할 생각인가? 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고 루시아를 보호하고 있는 거지?”
베하나스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네르하가 한순간 보인 무예가 너무나 고절했기에 역으로 상대가 네르하 라데우스 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해 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뭔가 좀 이상하군.’
베하나스는 세밀하게 네르하의 몸을 살폈다.
‘얼굴은 마법으로 바꿀 수 있다 해도 육체 전체를 숨길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 육체는 단련이 끝나지 않은 미완성의 육체가 분명하거늘?’
아쉽게도 베하나스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내가 마법사가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큰 오산이야.”
번쩍!
네르하의 손에서 순식간에 칠채색의 구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벨카서스 학파 비전.
엘리멘탈 볼텍스!
그 안에 담긴 힘의 크기를 느낀 베하나스가 다급하게 검을 들었다.
‘최소 5레벨!’
원래라면 그냥 마법 채로 갈아버릴 수도 있었지만, 상대는 무술의 달인.
그런 만큼 일반적인 마법사를 공략할 때처럼 했다가는 낭패를 면치 못할 터!
계산을 끝낸 베하나스는 네르하에게 덤벼든다기보단 곧바로 회피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그 판단은 옳았다.
콰과과광!
5레벨? 아니, 못해도 6레벨은 되어 보이는 광범위 파괴 광선이 베하나스가 있던 자리를 쓸어버렸다.
‘생각보다 위력이 괜찮은데?’
지금까지 파괴 마법과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던 네르하였지만 시저 루드벡은 벨카서스 학파의 비전을 가르치면서 네르하의 그런 생각을 확실하게 깨주었다.
‘마법사란 존재가 화력과 인연이 없다면 그건 마법사가 아니지!’
비록 체술과 연계하여 근접전을 펼치는 것이 네르하의 스타일일 뿐.
고화력의 마법을 습득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었다.
“네가 각성한 고유 계통이라면 이 마법을 배우는 것이 딱이겠군!”
네르하가 각성한 고유 계통은 다름 아닌 ‘속성 통합’.
본격적으로 마기를 제대로 다룰 수 있도록 내면의 소우주를 조정한 결과물이며, 결과적으로 네르하는 자연에 속한 속성이라면 어떠한 것이라도 자유자재로 변화할 수 있는 다양성을 얻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속성을 다루는 단계가 어려울 뿐, 술식의 구성 자체가 레벨에 비해 단조로운 엘리멘탈 볼텍스는 네르하에게 딱 맞는 마법이라 할 수 있었다.
‘정말 저자의 정체가 뭐지?’
베하나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네르하의 정체에 혼란을 느끼며 당황했다.
‘6레벨에 근접하는 마법에 나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권법. 세상에 저 정도 수준의 마권사가 존재하긴 했었나?’
그리고 그 마권사가 케프렌이 아닌 라데우스의 편을 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죽여야 한다!’
베하나스의 마음에 살심이 들끓어 올랐다.
“오호, 이제 제대로 해 볼 생각이 들었나?”
네르하가 피식 웃으며 베하나스를 조롱했다.
그런 조롱에도 베하나스는 천천히 자세를 잡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이미 저자가 네르하 라데우스든 다른 인물이든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어졌다.’
중요한 건 상대가 어설픈 마음가짐으로는 죽일 수 없는 실력자라는 것!
그리고 저자를 넘어서지 못하는 이상 루시아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며 사태가 수습이 불가능한 지경까지 갈 수 있다는 것!
이 생각들이 베하나스의 마음속 잡념을 제거하고 전력을 다할 수 있게 만들었다.
‘반드시 죽인다!’
고오오오!
모든 일념을 네르하에게 집중한 베하나스는 마치 검과 하나가 된 듯한 날카로운 기세를 쏘아내기 시작했다.
‘훌륭한 신검합일이로군.’
저 정도의 검수가 필사적으로 내지르는 일격은 분명 엄청날 것이다.
네르하는 그런 베하나스를 향해 자세를 잡았다.
“원래라면 나 역시 마법을 동원해 현재의 전력으로 상대해 주는 게 예의다만.”
상대가 마법사나 초능력자 같은 이능력자도 아니고 순수한 검수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너는 무공만으로 상대하는 편이 훨씬 편하겠군.”
자신보다 훨씬 하수를 상대로 굳이 마법까지 동원해 가며 싸울 필요가 없었다.
번쩍!
그 말에 분노를 한 것일까?
네르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번에 베하나스의 검이 네르하를 향해 번뜩였다.
최초의 일격보다도 더욱 은밀하고 정확한 쾌검.
“보통, 쾌(快)는 유(流)를 끊는다고 하지.”
네르하는 베하나스의 검로를 흔들림 없이 노려보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천신문의 유는 쾌를 붙잡는다. 그걸 지금부터 네게 알려주지.”
케프렌 비전.
팔룡초극참(八龍超極斬)!
이전, 시라스가 펼쳤던 사룡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여덟 마리의 용.
“시라스란 놈에게 검술을 가르쳐 준 건 바로 네놈이었군.”
대답은 없었다.
그저 쾌검과 환검에서 경지에 이른 베하나스의 일격이 그대로 네르하를 덮쳤을 뿐.
네르하는 그런 용의 쇄도에 오히려 한 발자국 앞으로 발걸음을 내밀었다.
“잘 봐라, 루시아. 이번 공방에서 네가 얻는 것이 있길 바란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네르하는 루시아가 그 소리를 들었기를 바라며 그대로 전진했다.
‘어떤 무공이든, 어떤 검술이든 흐름이란 것이 존재한다.’
고급 검술로 향할수록 그 흐름은 읽거나 구현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워질 정도로 복잡해진다.
하지만 반대로 그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아무리 강력한 초식이라도 이런 식으로 파훼하는 것이 가능했다.
“말도 안 돼.”
루시아가 나지막하게 말을 흘렸다.
조금만 실수해도 육체가 갈가리 찢겨나갈 텐데도, 네르하는 거침없이 검격의 폭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케프렌 직계들만이 익힐 수 있는 팔룡검의 흐름.
눈앞에 있는 네르하는 그 흐름을 정확히 읽으며 그대로 상대를 향해 접근해 나갔다.
베하나스는 그런 네르하의 모습에서 공포를 느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팔룡검을 순식간에 파훼한 네르하가 비릿하게 웃었다.
“말 돼.”
번쩍!
한순간 권강을 휘감은 네르하의 주먹이 복잡한 궤도를 그리던 베하나스의 검을 강하게 때렸다.
콰앙!
대포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케프렌 비전인 팔룡검이 그대로 무력화되었다.
“이, 이럴 수가.”
그런 만큼 케프렌에 대한 베하나스의 믿음은 절대적이고 맹목적이었으며, 그것이 깨졌을 때의 충격 역시 다른 이들보다 훨씬 강할 수밖에 없었다.
“무적의 검술이 고작 마법사 나부랭이에게 깨지다니!”
“무적은 무슨.”
“……!”
“어금니 꽉 깨물어라.”
네르하의 대포알 같은 주먹이 이번에야말로 베하나스의 안면에 제대로 직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