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크어어억!”
쿠당탕!
네르하에게 얼굴이 직격당한 베하나스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워낙 충격이 컸는지 낙법조차 하지 못한 채 꼴사납게 널브러진 모습.
그 모습을 보며 루시아는 속으로 경악했다.
‘저 베하나스 경이 저렇게 허무하게?!’
케프렌에서 원탁의 기사라는 건 보통 의미가 아니다.
어설픈 갈래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 가문 내에서도 한 계파를 만들 수 있는 지위이며, 무엇보다 대륙에서 최강자들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런 클래스의 기사가 고작 라데우스의 ‘후계’에게 제압당해 널브러지다니!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상대를 쓰러뜨린 네르하는 표정과 자세를 풀지 않았다.
“마법사 나부랭이에게 당한 정신적 충격 때문에 잠깐 정신줄을 놓았을 뿐, 마지막 일격은 착실히 방어하더군.”
“크흑!”
네르하의 말마따나, 베하나스는 곧바로 눈을 부릅뜨며 빠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래도 대미지는 확실하게 입었는지 바로 일어서지 못하며 앉은 채로 다리를 떨었다.
“마, 마지막 일격에 사정을 두었구나.”
“여기서 당신이 죽으면 일이 복잡해지니까.”
이왕이면 산 채로 포획하는 편이 가장 좋다.
여유가 느껴지는 상대의 모습에 베하나스는 허탈한 실소를 내질렀다.
“방금 봐준 걸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글쎄다.”
육체의 단련 차이는 당연하지만 베하나스 쪽이 압도적이다.
아마 보유하고 있는 마나의 양 역시 베하나스 쪽이 두 배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전투 수치를 뒤엎을 정도의 기교, 그리고 압도적인 경험의 차이.
그걸 무의식중에 느낀 베하나스는 작게 실소를 내질렀다.
“인정하지. 너는 나보다도 기술적으로 훨씬 우위에 있다. 설마 팔룡검을 정면으로 파훼할 실력자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베하나스는 진심으로 방금 전 네르하의 움직임에 감탄했다.
“팔룡검 정도의 검술을 첫 조우에 파훼하는 건 가주님 정도나 가능할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설마하니 눈앞에 있는 네르하의 탈을 쓴 누군가(?)가 가주의 수준에 오른 고수라고는 생각되긴 힘들겠지만.
“너는 내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 네가 네르하 라데우스든 아니든 지금부터 나는 철저하게 승리만을 위해 싸우겠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베하나스의 검에 무지막지한 마나가 밀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명검이 분명할 베하나스의 검이 마나를 감당하지 못해 부르르 떨리고 있다.
꾸득! 꾸드득!
무언가가 뒤틀리는 괴기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소리가 무엇인지를 알아챈 네르하는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닫곤 살짝 혀를 찼다.
“그냥 힘으로 밀어낼 생각이군.”
“그 말대로다.”
육체와 마나. 즉 겉으로 보이는 스펙의 차이로 기술의 우위를 상쇄하겠다는 것.
아직 몸이 완성되지 않은 네르하로선 최악의 상황이다.
그런데 갑자기 베하나스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본가의 금지된 검술로 널 죽이겠다.”
“뭐?”
뜬금없는 베하나스의 선언에 네르하는 눈을 찌푸렸다.
보통, 검술에서 금기로 지정되는 경우는 두 가지.
유파가 추구하는 방향에서 지나치게 동떨어져 있거나, 혹은 익히는 데 커다란 리스크가 존재해 몸을 상하게 하거나.
‘아마 전자에 가깝겠지만…… 좀 어리석군.’
네르하는 인상을 찌푸리며 베하나스에게 말했다.
“너 정도의 검사가 기술이 처진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도리어 숙련도가 낮을 게 뻔한 다른 검술로 승부를 건다고? 지금 장난해?”
“정론이군. 하지만 직접 상대해 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검만이 아닌 육체 전체가 마나에 휘감겨 끈적한 갈색의 빛을 내뿜고 있다.
‘뭐지?’
그 순간, 네르하는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위화감에 눈을 찌푸렸다.
저 갈색의 빛이 위협적이어서? 아니었다.
뭔가 끈적한 기운에 더해 기수식을 잡은 베하나스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익숙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네르하의 생각을 자르며 베하나스가 외쳤다.
“이걸 쓴다는 건 너를 하나의 전사로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봐, 그 검법은 어디서…….”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극한의 쾌검이 네르하를 덮쳤다.
베하나스가 휘두른 갈색빛의 검이 빠르게 사선을 그었다.
두 번이나 말이 잘린 네르하는 인상을 구기며 발을 움직였다.
‘젠장, 더럽게 빠르군.’
이전 루시아가 시라스와의 싸움에서 힘과 속도가 다가 아니란 말을 했었다.
네르하 역시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이런 식으로 육체 스펙의 차이가 현격하게 나버리면 백 개의 이론도 무용이 되어 버린다.
핏!
베하나스의 일격을 완벽히 피하지 못한 대가로 팔뚝에 긴 자상이 생겨났다.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나왔으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목이 잘려 나갔겠군.’
처음 베하나스를 만났을 때, 네르하는 그의 육체와 걸음걸이를 통해 환(幻)과 변(變)에 치중된 검술을 구사하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설사 부딪치게 되더라도 승산이 있으리라 판단했던 것이었다.
‘젠장!’
방금 전과는 180도 달라진 베하나스의 움직임에 네르하는 대번에 수세에 몰렸다.
기본적으로 정파의 검이 추구하는 우직함과 화려함 등은 일절 찾아볼 수 없는 검.
힘과 빠르기에만 모든 것을 집중하며, 여기에 살인을 위한 한 줌의 변초만을 추가한 검식.
그야말로 살인검이라는 말이 더없이 어울리는 검이지만.
‘이 검법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당했겠지.’
아이러니하게도 이건 네르하에겐 무척 익숙한 검술 중 하나였다.
‘슬슬 눈에 익기 시작한다.’
“죽어라!”
네르하를 마무리하기 위해, 베하나스의 검이 다시금 일자의 궤적을 그렸다.
‘그대로 어깨를 크게 올리면서 목과 심장을 노리는 변칙 찌르기.’
수수숙!
찔린다면 바늘구멍이 아니라 대포 구멍이 생길 수 있는 일격을.
네르하는 아주 간단하게 피해 버렸다.
‘이, 이걸 피해?!’
우연인가? 아니면 실력인가?
필살의 일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베하나스와 네르하 사이에 약간의 거리가 생겨났다.
눈을 부릅뜨는 베하나스를 향해 네르하가 물었다.
“너, 지금 그 검술을 어디서 익혔지?”
네르하의 예상이 맞는다면 방금 이 검술은 너 아니면 내가 죽을 각오로 펼치는 필살의 연환검식이다.
그 정체는 바로 다른 어디도 아닌 ‘마교’의 ‘혈광패검(血狂敗劍)’.
마교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이 세계에서 혈광패검의 등장은 네르하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세계 자체가 다른 이런 곳에서 어떻게 마교의 검법이 굴러다니는 것인가?
‘저 갈색의 기운 자체는 정종무공이 분명해. 하지만.’
베하나스가 내뿜는 기운의 결, 그리고 무엇보다 단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혈광패검의 초식.
착각할 리가 없다. 정마대전 당시 수백, 수천 번은 상대해 봤을 그 검로를!
아무래도 베하나스는 대답할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아니, 정말로 저게 혈광패검이 맞는다면 대답할 여유도 없을 것이다.
“너, 내게 해 줘야 할 말이 아주 많을 거다!”
분석이 끝난 네르하는 그대로 몸을 움직여 공세로 전환했다.
베하나스에겐 안타깝게도, 네르하는 오히려 이전의 검술보다 훨씬 익숙하게 베하나스의 검을 파고들었다.
아무리 속도가 빨라졌다 해도, 올 곳을 예측할 수 있다면 파훼하는 건 아주 손쉽기 마련.
‘분명 이 상황에서 선택할 방어 초식은 하단에서 이어지는 다리 베기.’
그 생각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베하나스의 등이 굽어지며 날카로운 오러가 하반신을 노리고 들어왔다.
예상과 너무 같아 도리어 소름이 돋는다.
홱!
네르하는 가볍게 보법을 밟으며 공격을 피해냈다.
그것도 모자라 그대로 움직임의 빈틈을 찔러 놈의 얼굴에 발차기를 날렸다.
빠르게 턱을 향해 날아오는 움직임에 베하나스는 속으로 기함을 내질렀다.
‘뭐, 뭐냐, 이건!’
이 검술은 한번 전개하면 상대가 죽기 전까진 거두는 게 불가능하다.
강제로 거두려 한다면 오히려 시전자의 마나 흐름이 뒤엉켜 폐인이 될 가능성이 높기에 가문에서도 금기로 지정한 게 아니던가?
그만큼 뒤가 없기에 검술의 위력 자체는 무지막지하게 강력하지만 오히려 네르하는 이전보다도 훨씬 능숙하게 검술의 빈틈을 찌르며 들어왔다.
“크윽!”
베하나스는 침착하게 검로를 이으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네르하는 어떻게 알았는지 약점만을 정확하게 찔러 들어왔다.
‘서, 설마 이 검술을 알고 있다고?’
말도 안 된다.
이 검술이 창안된 지는 수백 년이 지났지만 익힌 자는 가문의 역사를 통틀어 수십 명이 채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바깥에 공개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망설임 없이 이 검술을 꺼내 든 것이 아닌가?
‘이건 말도 안 돼!!’
모든 검로가 단 한 번도 상대의 몸에 닿지 않은 채 철저하게 파훼되고 있다.
그 악몽과도 같은 광경을 지켜본 베하나스는 평정심이 완전히 흐트러진 채 비명을 내질렀다.
“말도 안 된다고!”
“뭐, 그 마음은 인정한다만.”
스스슥!
또다시 검로의 빈틈을 정확하게 파고든 네르하가 그대로 가볍게 베하나스의 단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냥 운이 없다 생각해라.”
퍼억!
가벼운 주먹질과 함께 그대로 베하나스의 마나 운용이 완전히 헝클어져 버렸다.
“쿨럭!”
가뜩이나 익숙하지 않은 마나 운용법인데 그걸 정면에서 파훼당했으니 아무리 화경에 발을 걸쳤다 해도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다.
털썩!
아까 전보다도 훨씬 타격이 큰 듯, 베하나스는 입과 코는 물론 눈과 귀에서도 피를 줄줄 흘리며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쿨럭! 커걱!”
그야말로 완벽한 패배.
하지만 그 패배감을 느낄 새도 없이 베하나스는 네르하에게 멱살이 붙잡혀 그대로 제압당했다.
“이제 승부가 완전히 난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질문하지.”
“크, 크헉! 무, 무엇을…… 말이냐?”
싸늘한 네르하의 눈빛이 베하나스를 내려다보았다.
“그 검술, 어디서 배웠지?”
* * *
마기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시라스가 마검을 사용했을 땐 그럴 수도 있을 거라며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혈광패검은 다르다.
비록 그 파훼법이 정파에 널리 알려진 탓에 마교에서도 하급 무사들이나 사용하는 것이지만 그만큼 검로(劍路)만큼은 확실하게 알려진 마공.
‘비록 한 쌍인 혈류마공이 아닌 다른 심법을 운용한 것 같지만 그렇다 해도 형(形)이 소름 끼치도록 똑같다.’
의외로 베하나스는 네르하의 그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이, 이건 아까 말했던 대로 가문의 비전 검술이다. 지나치게 극단적이긴 하지만 엄연히 가문의 선조께서 창안하신 검술이란 말이다!”
“지랄.”
저 말이 정말로 맞는다면 이렇게 쉽게 파훼될 리가 없지.
“너, 인마. 제대로 이실직고하는 게 좋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음?”
베하나스를 압박하려던 네르하는 순간, 주변에서 수많은 인영이 돌입하려고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엘리멘탈 볼텍스를 날렸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니 올 게 온 셈이었다.
‘젠장.’
네르하는 아쉬움을 삼켰다.
그러고는 베하나스의 멱살을 쥔 채로 주제를 바꿨다.
“잘 들어라.”
“무, 무엇을?”
“이대로 내 손에 죽을 것이냐, 아니면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냐?”
“제, 제안이라고?”
“길게 생각할 시간이 없다. 이대로 바깥에서 리브라의 전력이 몰려온다면 난 네놈을 죽이고 자리를 뜰 수밖에 없어. 그러니 빠르게 선택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이윽고 네르하의 입에서 베하나스가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약 5분 뒤.
“퇴로까지 완벽하게 차단했습니다. 돌입할까요?”
붉은색의 로브를 걸친 한 중년의 마법사가 선두에 선 이에게 물었다.
선두에 선 노인 역시 붉은 로브를 걸치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보단 조금 더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노인이 말했다.
“상대는 그 대륙에서 이름 높은 검왕 베하나스다. 포획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절대로 손에 사정을 두지 마라.”
“예. 그라갈 님.”
마법사들이 일제히 답했다.
그라갈 라데우스.
7레벨 후반대의 실력자이자 리브라의 수호를 맡은 전투 마법사단 ‘오딘’의 총단장.
대륙에선 적뢰(赤雷)라는 별명이 붙은 굴지의 실력자이기도 했다.
그라갈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가늘게 눈을 떴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인질이 있을 수도 있다. 만약 그 인질이 라데우스의 혈족이라면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그 ‘라데우스의 혈족’이 누군지 이곳에 있는 이들이 모를 리가 없다.
애초에 그 혈족이 리브라 수뇌부에게 요청한 것 때문에 이만한 난리가 났는데도 출동이 지연된 것이었으니까.
“가지.”
그 말을 끝으로 수십에 달하는 마법사들이 일제히 숲을 향해 돌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투 의지가 충만한 그들은 그대로 숲을 가로질러 현장에 도착했는데…….
“……응?”
그들이 목격한 건 목이 잘린 시체 하나와 그 앞에서 피투성이로 앉아 있는 검왕 베하나스.
그리고 상대적으로 멀쩡해 보이는 네르하와 루시아의 모습이었다.
‘뭐지?’
그라갈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늦었군. 리브라의 방위 체계가 이리도 허술할 줄이야.”
“뭐라고?”
현 사태의 범인임이 유력한 베하나스가 적반하장으로 나오자 그라갈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베하나스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내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딱히 그쪽을 탓할 수는 없나? 이번 사태의 책임은 관리를 못 한 나에게 있으니까 말이야.”
“지금 그게 무슨 소리지?”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라갈이 막 분노를 터트리려는 찰나, 네르하가 빠르게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네르하 라데우스?”
“베하나스 경은 우리를 구해 주셨습니다. 저 사악한 마검을 들고 우리를 습격한 시라스 루 케프렌에게서요.”
“뭐? 마검이라고!”
“네. 저것을 보시면 바로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네르하는 시라스의 근처에 널브러진 마검 다인슬라이프를 조심스럽게 들어 그라갈에게 건넸다.
“허어?”
비록 수투의 마옥(魔玉)이 마기를 전부 뽑아냈다고는 하지만 고위 마법사가 면밀하게 살핀다면 그 잔향 정도는 발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시라스의 몸에도 마기의 흔적이 있을 테니 더더욱 누명을 씌우기 편하지.’
네르하가 베하나스에게 제안한 것의 그 첫 번째.
그건 바로 이 모든 일을 벌인 것을 모조리 시라스 루 케프렌에게 뒤집어씌워 버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