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경계 도시 아르지엔 (1)>
루트비히의 물음에 네슬렉이 답했다.
“나쁘진 않습니다. 아직 마왕의 영역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백작급 마족을 하나를 토벌하고 순조롭게 영토를 수복 중이라 하더군요.”
“뭔가 불안하군.”
루트비히는 가라앉은 눈으로 생각에 잠겼다.
백작급 마족을 토벌했다는 전공은 확실히 대단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북방에 강림한 마왕이 백작급을 소환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을 회복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루트비히의 모습에 시저가 호탕하게 웃으며 루트비히의 어깨를 두드렸다.
“뭘 그렇게 심각해? 북방에는 류레이라만이 아니라 그 할멈도 있잖아? 정 안 되면 운석이라도 왕창 떨궈서 영역째로 없애 버리면 되는 문제야!”
“그렇긴 한데…….”
수천에 달하는 마법사들이 모이면 운석 소환 정도는 아주 가볍게 저지를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짓을 했다간 대륙 협정을 위반한 라데우스는 많은 것을 상실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마족에게 패퇴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어째서인지 나는 네르하가 북방의 일을 해결할 열쇠로 보이는군. 시저, 현재 네르하의 수준은 어떻지? 6레벨에 도달하기까진 멀었나?”
“6레벨이라.”
시저는 루트비히의 물음에 애매모호한 웃음을 지었다.
“그 괴물 녀석의 역량은 단순히 레벨로 측정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무슨 뜻이지?”
“나중에 소식을 들어보면 알 거다. 우리 학파의 비전도 제대로 전수했고, 지난 시간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남은 건 결과를 기다리면 될 뿐.”
“네가 상대를 그렇게 고평가하는 건 처음 보는군.”
시저 본인부터가 대마법사의 영역에 들어섰다 보니 남을 평가하는 눈높이 자체부터가 범인과는 기준이 달랐다.
시저는 살짝 콧김을 내뿜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추측이지만?”
“네르하는, 어쩌면 가주와 같은 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몰라.”
“……!”
“……!”
그 말이 튀어나온 순간, 루트비히와 네슬렉의 동공이 급격하게 확장되었다.
“아니, 잠깐. 그 말인즉…….”
“아, 아, 너무 넘겨짚진 말고. 어디까지나 그냥 추측의 영역이니까. 그냥 그럴 수도 있다라고만 받아들이라고. 나도 말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그걸 입 밖으로 내뱉었다는 점에서 일말의 가능성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루트비히와 네슬렉은 시저의 허황된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며 입을 다물었다.
* * *
리브라를 나선 네르하와 일행들은 그대로 마차를 타고 경계 도시 아르지엔으로 향했다.
“우린 아르지엔에서 한차례 물자를 보급받은 뒤 전장의 정보를 취합한 후에 올라갈 거다.”
“네!”
모두가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외쳤다.
“그때까진 쉬면서 피로가 쌓이지 않게 신경 쓰기만 해. 휴식도 수련이니까.”
“너무 고생하니까 이런 편한 길이 도리어 익숙하지가 않네요.”
이젠 나름 근육이 잡힌 알페온이 실실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주변에서 은근하게 동조하는 기색을 보이자 네르하가 인상을 썼다.
“헛소리하지 마라. 내가 말했을 텐데?”
“네. 알고 있습니다. 지난 훈련들은 어디까지나 ‘단칼’에 죽지 않기 위해서라는 걸요.”
그럼에도 알페온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그만큼 네르하가 녀석들을 무지막지하게 몰아붙였다는 방증이었다.
네르하는 할 말이 많았지만 더 이상의 충고를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직접 겪어 보면 알겠지.”
이들의 눈앞에 놓여 있는 건 전투가 아닌 전쟁이다.
그 차이를 깨닫지 못하면 지난 두 달간의 수련은 대번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마치 네르하의 마음을 읽은 듯 알페온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절대로 죽게 두지 않을 겁니다.”
‘호오?’
네르하는 살짝 눈을 반개했다.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긴 싫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알페온 녀석, 첫 외부 미션 때 같이 나갔던 동료가 죽었다고 했지.’
아마도 상급생이었을 테지만 그것만으로도 알페온에겐 어마어마한 정신적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리브레히트 공작가의 삼남.
비록 장남이 아니라 가문을 잇지 못해 리브라에 왔다지만 적어도 부족할 게 없는 삶을 살아왔을 거다.
그리고 누군가를 잃어 본 경험 역시 없었을 테지.
“그래. 그거면 된 거다.”
네르하는 쿠션에 기대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정보에 따르면 북방에서 형성된 전선은 크게 셋.’
전황이 나쁘지는 않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결정적인 타격을 먹인 것도 아니다.
마족들은 자신들의 특기인 마계영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일부러 세력을 뭉치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전선을 크게 넓혔다.
‘아마도 마왕이 힘을 회복하기까지 시간을 벌 요량이라고 했다지?’
저 추측이 진실이든 아니든 결과적으로 전쟁은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어졌다.
일점 돌파로 마왕의 영역까지 뚫을 수는 있다지만 곳곳에 펼쳐진 마계영역으로 잘못하면 퇴로가 막힌 채 고립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마왕을 반드시 죽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없는 이상 섣부른 일점 돌파는 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거점을 하나하나 없애가며 차근차근 공략해 나가는 것이겠지.’
네르하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다.
이런 자잘한 전투가 많아질수록 공을 세울 기회는 많아지니까.
* * *
며칠 후, 네르하와 일행들은 경계 도시 아르지엔에 도달했다.
라데우스 가문이 북방과의 연결을 위해 세운 일종의 교두보이지만 ‘도시’라는 이름답게 수만 단위의 인구가 거주하는 나름 중규모의 도시였다.
루시아가 아르지엔의 외곽 성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얼어붙은 성벽이 꽤 인상적이군요.”
“북방에 존재하는 도시나 성들은 대부분 저렇습니다. 다들, 뭔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돌죠.”
북방 출신인 바스톤이 뭔가 기묘한 감흥을 받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일행이 거대한 성문에 접근했을 때…….
“아르지엔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네르하 도련님!”
역시 라데우스의 영향권에 있는 도시답게 별다른 통과 절차도 없이 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일제히 네르하를 환영했다.
아마 네르하 일행의 도착을 사전에 공지받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도시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염소 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의 사내가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네르하에게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네르하 주인님. 미네르바 아르지엔 지부의 임시 지부장을 맡고 있는 나달이라 합니다.”
“그래. 네가 나달이군.”
세이라에게서 듣기로는 그렌 타운에서 데려온 인물 중 하나로 재정 부분을 책임지고 있던 인재라 하던데?
나달은 만면에 아부의 미소를 지으며 네르하에게 굽신대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가장 좋은 숙소를 잡아 놓았으니 거기서 노독을 푸시지요.”
“아니, 그 전에.”
네르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달에게 물었다.
“시장은 어디 있지?”
라데우스의 직계가 직접 도시에 들르면 응당 시장이나 그에 준하는 직위에 있는 자가 나서서 맞이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렌 타운 때처럼 신분을 숨길 이유도 없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루시아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러게요. 이곳은 라데우스가 직접 관리하는 도시. 성문 병사들의 모습을 보면 이미 사전에 통지도 이루어졌을 텐데요?”
네르하가 이런 면에서 그리 꼬장꼬장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권위를 세울 때는 세워야만 했다.
“그, 그것이…….”
나달의 표정이 급격히 흐려졌다.
“건방지군, 일개 시장 따위가.”
상황을 지켜보던 배커마저 나지막하게 개입하자 나달의 얼굴이 더더욱 창백해졌다.
배커만이 아니라 다른 일행들 역시 은은하게 분노를 쏘아내기 시작했다.
“그만. 기세 집어넣어.”
상황이 험악하게 흘러가자 네르하가 한숨을 쉬며 일행을 제지했다.
“허억! 헉!”
나름 실력자들의 기세를 한 몸에 받은 나달은 기세가 거두어지자마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장은 바쁜가? 움직일 수 없다면 이쪽에서 찾아가지.”
나달이 뭐라 대답하기 전에 대번에 뒤쪽에서 반발이 튀어나왔다.
“이봐, 네르하. 우리가 뭐가 아쉽다고 그놈을 먼저 찾아가?”
“맞습니다, 주군. 이곳은 체면을 세워야 하는 자리입니다. 직접 시장에게 찾아오라 통보해야 합니다.”
“나도 두 사람의 말에 동감이에요.”
배커, 바스톤, 루시아가 한마디씩을 내뱉었다.
그들 역시 마법사 이전에 귀족.
권위와 자존심을 구기는 일에는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네르하는 단호하게 그들의 의견을 잘라냈다.
“조용히 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평범한 여행도 아니고 이 도시를 벗어나면 그때부턴 전장이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려 굳이 감정을 소모할 필요는 없었다.
나달이 호흡을 고르며 네르하에게 말했다.
“수, 숙소에 계시면 도시 경비대장이 직접 도련님께 사죄를 올리러 찾아올 겁니다.”
“뭐? 시장도 아니고 일개 경비대장 따위가? 보자 보자 하니까!”
배커가 막 폭발하려던 찰나.
“조용히, 하라고 했지?”
사아아아!
네르하의 어마어마한 살기가 그대로 배커를 직시했다.
“흐읍!”
그 살기를 정면으로 직시한 배커의 정신이 한순간 아득해졌다.
지난 훈련 동안 놈이 발산하는 살기에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정말 커다란 오산이었다.
“아, 알겠다.”
“대장은 나다. 적어도 이번 북방행이 끝날 때까진 내 의견에 토 달지 마라.”
“…….”
배커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서 미안하군.”
“아, 아닙니다! 사실, 배커 도련님께서 당연한 말씀을 하셨는데요!”
“시장이 움직일 수 없는 이유가 있나?”
나달은 황송해하며 이렇게 답했다.
“사실, 요즘 도시 내의 민심이 상당히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게다가 최근 들어 외부에서 이교도들이 흘러 들어와 포교 활동을 벌이는 바람에 시장이 직접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제어하고 있습니다.”
“이교도라고?”
뜬금없이 튀어나온 키워드에 네르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 사교는 아닙니다. 동부에서 나름 긴 역사를 지닌 소규모 교단인데 갑자기 이 도시에 나타나 막대한 양의 재물을 뿌려대고 있습니다.”
“재물? 분명 소규모 교단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시장이 경계하고 있죠. 지금도 그들의 연설을 벌이는 곳에 직접 가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호오, 직접 발로 뛰어다니는가? 괜찮은 사내로군.”
“…….”
다른 이들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네르하는 시장이 보이는 행보에 나름 호감을 느꼈다.
그렌 타운의 켈릭스처럼 자기 보신에 환장한 종자가 아닌 이상 이 정도의 무례 정도는 충분히 넘어가 줄 수 있었다.
“짐을 풀고 시장을 찾아가 보도록 하지. 그리고 그 전에…….”
“넵!”
“이 도시에 갑자기 흘러 들어온 사교도들의 정보를 정리해서 제출해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후 네르하 일행은 도시에서 가장 비싼 호텔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나달이 자료를 가지러 간 사이, 배커와 루시아가 네르하를 찾아왔다.
“할 말이 있나?”
“당연히 있다.”
아까 전 살기를 흘려보낸 것에 항의라도 하려나 싶었지만 의외로 배커는 그 일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왜 사교도의 정보를 얻으려는 거지? 보급만 받고 곧바로 출발하는 거 아니었나?”
“당연히 정상적이지 않으니까.”
네르하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전 수여식에서 리브라에 쳐들어온 흑마법사 집단, 판데모니움.
수많은 계파가 존재한다는 판데모니움에서 분명 리브라에 잠입한 놈들은 ‘암흑 교단’이란 이름을 가진 종교쟁이들이었다.
‘북방에서 마족과의 전쟁이 벌어지는 이때, 갑자기 정식으로 인정받은 놈들도 아닌 사교도가 나타났다라?’
당연히 의심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