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복잡한 상황 (1)>
하늘을 메운 십여 척의 라데우스 비행선들.
두말할 것 없이 이번 작전에 투입된 지렌 라데우스와 그 병력들이 탑승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스타로스가 혀를 찼다.
“너무 놀았나? 아무리 그래도 이대로 돌아가면 좀 위험할 것 같은데.”
북방의 거친 환경 때문에 라데우스 가문은 비행선을 잘 운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들도 나름 모험을 건 모양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애초에 나는 놈에겐 버린 패니까.”
그렇다면 굳이 여기서 날뛰어서 자신의 전력을 깎아 먹을 필요는 없었다.
“오르가쉬, 물러서라.”
“네, 아스타로스 님.”
충직한 수하인 오르가쉬는 군말 없이 영역을 회수했다.
“조금 아쉽군. 라데우스와 케프렌의 혈통을 손에 넣을 기회였었는데.”
움찔!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루시아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알고 있었나?”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거두었다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을 텐데 말이야.”
‘쓸모라.’
네르하는 그런 아스타로스의 말투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재능이 아닌 ‘혈통’ 그 자체에 쓸모가 있다는 어조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마기 제어에 실패하는 걸 원하지 않았지.’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일까? 욕망에 충실해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속으론 꽤나 복잡한 계산을 두들기고 있었다.
“곧 다시 보도록 하지.”
“곧이라고?”
“그래, 곧.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하늘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괜찮은가?!”
쩌저저적!
쿠웅!
대기가 얼어붙는 소리와 함께, 네르하의 눈앞에 거대한 장한이 하늘에서 추락(?)했다.
“바실리 님.”
“삼촌!”
“미안하네.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
작은 크레이터를 만들며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서리 일족의 전사장 바실리 블루벨벳이었다.
그는 원래 이번 타격대에 합류하여 북쪽으로 향했었지만 아스타로스의 계략에 철저하게 물을 먹었다.
“완전히 속았어. 설마하니 영역을 바꿔칠 수 있을 줄이야.”
네르하는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비행성들을 힐끔 바라보았다.
“무리하셨군요. 비행선을 띄우다니.”
“라데우스의 장로도 멍청이는 아니지. 군이 괴멸하는 건 반드시 막아야 하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비행선에서 수백의 인영이 튀어나와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지렌 라데우스를 비롯한 이번 타격대의 최정예들이었다.
“감히, 잔머리를 굴리다니.”
아스타로스에게 한 차례 물을 먹은 지렌 라데우스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네년을 반드시 씹어 먹어주마.”
“후후, 후후후…….”
아스타로스는 그런 지렌을 향해 고혹적인 미소를 흘렸다.
“미안하지만 그럴 기회는 없을 거다. 그 엘프가 직접 나왔다면 또 모르겠지만.”
스윽!
아스타로스가 살짝 손을 휘젓자마자, 주변에서 조용히 대기하던 마물들이 일제히 네르하와 일행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 이런!”
지렌은 당황했다.
중간에 조우한 군의 통솔자인 마엘론에게 대강 상황은 들었다.
군을 보호하기 위해 네르하와 아르바가 얼마나 날뛰면서 선전했는지를 말이다.
“저 아이들을 지켜라!”
“예!”
지금까지 줄곧 전투를 지속해 왔다면, 체력과 마나 모두 고갈되어 있을 게 분명할 터.
‘내 눈앞에서 직계가 죽었다간 가주가 날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애초에 눈 밖에서 전사했다면 모르되 이런 식으로 직계들을 허무하게 잃는다면 지렌이 아무리 장로라 해도 끝장이었다.
지렌의 명령을 받은 수하들이 지상을 향해 마법을 난사하면서 마물들을 일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사이 아스타로스를 비롯한 마족의 중추들은 유유하게 나머지 인원들의 포위를 뚫고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 * *
“황당하네. 영역을 버린 채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이라고?”
전투의 결과를 전해 들은 총사령관 류레이아는, 한껏 표정을 구기며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그렇다고 제대로 죽인 귀족급은 단 한 마리도 없어? 결국은 물자만 날린 셈이네?”
“면목이 없습니다, 총사령관.”
지렌 라데우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영역 바꿔치기’를 뒤늦게 깨달았다곤 하지만, 속전속결에 매몰되어 상대의 의도에 완전히 농락당하고 말았다.
“그나마 적의 목표였던 군대의 분쇄는 후방에 있던 네르하와 아르바가 막아냈으니, 이 작전에서 그나마 공이라는 걸 세운 건 그 둘뿐이군.”
그 말에 자리에 있던 다른 직계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흐려졌다.
의기양양하게 공을 세울 생각으로 전선에 나섰는데, 결과적으로는 가장 처진다고 생각한 그 둘이 가장 큰 공을 세웠으니까.
“그나마 교두보를 확보한 건 나쁘지 않아. 지렌 장로, 아스타로스가 점유하고 있던 영토에 안티 이블 필드(Anti evil field)를 설치하고, 혹시 모를 침식을 대비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총사령관.”
안티 이블 필드는 라데우스가 개발한 공간 계열 마법의 침식을 억제하는 마법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해.”
류레이아는 현재 상황을 정리하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분명 적들은 ‘백작’이라는 먹이를 던져주며 단기전으로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 백작을 비롯해 적의 주 전력은 아무 피해 없이 빠져나갔어.”
이렇게 되면 상황이 상당히 묘하게 흘러가게 된다.
“적의 실질적인 전력 누수는 없으니 결국 우린 단기전을 피해 조심스럽게 나아갈 수밖에 없지. 이게 정말로 마왕이 의도한 것일까?”
참모진을 비롯해 장내에 모인 이들에게선 별다른 응답이 없었다.
류에이아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참모진들의 실질적 수장이나 다름없는 둘째 루드빅이 있었다.
“루드빅, 이렇게 되면 전황이 어떻게 변할 것 같지?”
“결국엔, 장기전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루드빅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애초에 이 작전의 진행 자체가 루드빅을 비롯한 참모진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던 계획이었으니까.
“그럼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루드빅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며 침묵했다.
‘확실하게 밀어 버리려면 본가의 증원이 필요하다.’
몇 달 동안 백작급 마족과 휘하 귀족급 마족들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상태로 마왕령까지 총공세를 진행했다간 적의 저항 앞에 공세가 돈좌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대륙 회합이 끝날 때까지 버티다가 가주님께서 직접 나서시는 게 확실하다.’
마왕이고 나발이고 가주인 카이젤이 직접 나선다면 그대로 끝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소가주 자리를 위해 북방으로 온 모든 후계들이 물을 먹게 된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렇기에 루드빅은 소극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천천히 전선을 올려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들의 움직임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네.”
움찔!
전략적 목표가 충족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다음 행동에 나서는 건 하책이었다.
하지만 류레이아가 이런 식으로 불쾌감을 표시하는 건 이유가 있었다.
“하나 공지할 게 있다.”
뜬금없는 총사령관의 공지에 장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은, 다음에 이어진 그녀의 말에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방금 전 대륙 회합이 끝나고 회합에서 북방에 대한 지원이 결정되었어.”
“지원이라 하신다면?”
“북방에 영역을 뻗고 있는 서른 개의 가문에서 지원군을 보내겠다더군.”
원래 지원군이 온다고 한다면 누구나 반색할 소식이었겠지만, ‘라데우스’라는 자존심에 금이 가는 상황이니만큼 불편함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리고 그 지원군을 이끄는 건, 케프렌 원탁의 기사들로 결정이 났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가라앉았던 회의 분위기가 대번에 달아올랐다.
“감히 누가 누구에게!”
“케프렌 놈들이 우리에게 동정을 던져준다고요?”
“믿을 수 없습니다! 가주님께서 그걸 받아들이셨단 말입니까?!”
케프렌의 지원.
이건 천여 년 동안 이어진 두 가문의 경쟁을 생각하면, 굴욕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주가 결정한 일이야.”
그 말 한마디에 모든 소란이 가라앉았지만, 표정에 새겨진 불만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계책을 내. 그 잡것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이 북방의 상황을 끝내버릴 계책을.”
“…….”
당연한 말이지만 아랫사람을 들볶는다고 바로바로 계책이 나올 정도로 상황이 유리한 건 아니었다.
주변에 별다른 반응이 없자 류레이아는 살짝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상황이 이렇게 돌아갈 줄이야. 그 마계 백작 놈만 죽였더라도 전황이 좀 편해졌을 텐데.”
지렌 라데우스의 고개가 더더욱 내려갔다.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 * *
라데우스 원정대 수뇌부들의 표정이 대부분 죽상으로 변했지만.
그 와중에도 현재 상황을 격하게 반기는 이가 존재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네르하였다.
“상황이 네게 유리하게 돌아가는구나.”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되었죠.”
네르하는 서리 일족의 족장 엘로이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북방의 상황이 길게 이어질수록 제 사람들을 키울 기회가 늘어나니까요.”
네르하가 볼 땐, 앞으로 몇 달 동안은 진부한 소강상태가 이어질 것이다.
마계 백작 아스타로스가 어째서 별다른 행동 없이 뭉그적거리다가 도망갔는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그녀가 생존해 있는 이상 원정대는 경거망동할 수 없다.
“게다가 본진은 이제 ‘영역 바꿔치기’라는 적들의 속임수마저 신경 쓸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움직이는 데 있어 한층 더 신중해지겠죠.”
“마족들이 오히려 이쪽의 경계심만 키워 준 꼴이구나.”
“…….”
네르하는 어째서인지 아스타로스가 이런 흐름을 유도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첫 마계 백작을 토벌할 때 입었던 피해는, 본가의 마법사만 수십여 명에 가깝게 죽었고, 일반 병력 또한 오천이 넘게 희생되었다지?’
하지만 이번 작전에선 일반 병력 수백 정도가 사상자로 집계되었을 뿐, 허점을 찔린 것치고는 피해가 어마어마하게 적었다.
엘로이아가 물었다.
“그래서, 논공행상은 결정되었나?”
“아직입니다. 본진의 분위기가 워낙 어수선한 데다 사실상 이번 작전은 실패나 다름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 작전에서 공을 세운 건 자네들이 유일하지. 류레이아로선 어쩔 수 없더라도 사기 진작을 위해 자네들을 띄워 줄 걸세.”
그녀의 말은 딱히 틀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공을 치하하지 않고 회의를 물린 건, 제대로 된 무대에서 공을 치하하겠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잘 받아먹게나. 뭐가 됐든 자네에게 불리한 건 아닐 테니.”
“네, 기대하고 있습니다.”
명색이 총사령관이 제대로 된 각을 잡고 치하하는 자리일 테니, 애매한 상을 주지는 않겠지.
“자, 그럼 대충 사담은 끝났고,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엘로이아가 막 작전을 끝내고 돌아온 네르하와 클로이아를 불러온 이유는 애초부터 단 하나였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이, 점차 싸늘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강자들의 기세는 웃으면서 받아넘길 만큼 강해진 네르하조차도, 살짝 긴장했을 정도로.
“자네.”
엘로이아의 입에서 절대로 밖으로 흘러나가선 안 될 치명적인 제안이 흘러나왔다.
“아르바를 제거할 생각은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