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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29화 (129/237)

129화

<복잡한 상황 (2)>

제국 중앙지역에 위치한 성지 ‘판테온’.

감히 만신전이란 이름을 그대로 써서 만든 이 돔 형태의 건축물은, 3년에 한 번 대륙 13개의 국가와 124개의 가문들이 모이는 장소로서 대륙에서 가장 신성한 곳으로 추앙받는 곳이기도 했다.

“하하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카이젤 가주님!”

대륙 회합에 참여하기 위해 만신전에 들어온 카이젤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리브레히트 공작. 오랜만이군.”

카이젤에게 다가온 이는 다름 아닌 동방의 대가문, 리브레히트 공작가의 가주인 루시우스 리브레히트였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언제나 같지. 그대는 어떻소?”

“못난 아들이 북방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심초사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아, 그쪽의 셋째가 내 다섯째와 함께 북방으로 갔지. 보고는 받았소.”

알페온 리브레히트 정도면 카이젤에게 직접 보고가 올라갈 정도의 신분이다.

이전 알페온을 함부로 다뤘던 배커가, 네르하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경을 쳤을 정도로 말이다.

“다섯째 녀석이 공작의 아들과 상당히 친한 모양이더군. 보고에 따르면 거의 친형제나 다름없다고 하던가?”

“하, 하하하…….”

카이젤에게 있어선 나름 칭찬의 의미로 한 말이었지만, 리브레히트 공작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허탈하게 웃을 뿐이었다.

아마 그로서도 네르하가 받았던 최악의 평판은 여전히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지.

아들에 대한 언급이 잠시 지나간 뒤, 공작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북방의 상황이 쉽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분명 이번 회합에서 케프렌 측이 이 부분을 걸고넘어질 텐데, 어떻게 대응할 생각이십니까?”

“흠.”

사실 이 부분은 카이젤로서도 고민이었다.

아르바의 패퇴까진 그렇다 쳐도 문제는 충분한 전력을 쥐여 주고 보냈는데 아직도 큰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진 괜찮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케프렌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닐 것 같군.”

“그 말씀은?”

“북방의 상황에 맞춰 갑자기 회합이 열렸지. 주최자의 권위와 성향을 생각하면 회합 자체의 안건은 ‘마족’이 될 가능성이 높소.”

“……!”

“안으로 들어가 보면 알겠지. 주최자가 설명해 줄 테니.”

이번 대륙 회합은 제국의 황제가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제국은 이곳 만신전을 회합의 장소로 제공할 뿐, 회합의 중심을 잡고 이끄는 역할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안쪽으로 들어서자, 원형으로 둘러진 만신전의 삼백여 석의 좌석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원형의 중앙에서, 토가(toga)를 걸친 금발의 미청년이 카이젤을 반겼다.

“3년 만이군, 카이젤.”

“아그란바드 공.”

아그란바드라 불린 그는 분명 겉으로 보면 뛰어난 미남이었지만, 신체 일부분에서 눈에 띄는 특이점이 존재했다.

머리와 등에 기다란 뿔과 날개를 달고 있는 아인종.

그건 아인종 중에서도 최강종이라 칭송받는 용인(龍人)의 증거였다.

“의외로군. 지그하트도 아니고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던 당신이 우리를 불러 모을 줄이야.”

하지만 눈앞의 존재는 용인이 아니었다.

그 용인조차 눈앞의 존재와 비교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이나 다름없었다.

“위대한 골드 드래곤의 로드여.”

골드 드래곤 로드, 아그란바드.

그는 현재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알려진 위대한 옛 용의 일원이었다.

아그란바드는 희미하게 웃으며 카이젤의 인사를 받았다.

“그만한 사안이니까.”

“역시 마족에 관련된 일이었나?”

카이젤의 눈이 한순간 사납게 빛났다.

“혹시나 북방의 일을 언급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라 충고하지. 거긴 내 자존심을 걸고서라도 확실하게 정리할 테니까.”

“오, 물론 자네의 실력과 라데우스의 힘을 의심하는 건 아니네.”

“그렇다면?”

“상황이 라데우스 혼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는 게 문제이지.”

“그건 무슨 뜻이지?”

라데우스가 감당할 수 없는 건 없다.

제국이든, 케프렌이든.

라데우스는 대륙 최강이고, 또 최강이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아그란바드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안은 그 완고한 카이젤조차도 생각을 돌리게 만들 만큼 충격적이었다.

“동방 사막의 끝자락에도 마왕이 강림했다네.”

“리브레히트 공작이 좀 고생하겠어. 하지만 그 정도로 라데우스가 감당할 수 없다는 건 좀 어폐가 있군.”

“그리고 남쪽 대수림에서도 마찬가지지. 그 거대한 정글이 가로막은 덕에 소식이 늦었지만 남쪽 끝자락은 이미 개판이 났다고 하더군.”

“…….”

“서쪽의 교국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들어오고 있네. 위장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고. 아직 급수는 측정되지 않았지만, 마왕급이라고 보는 게 편할 걸세.”

“지금, 설마…….”

“그래.”

아그란바드의 우묵한 눈이 표정이 변한 카이젤을 직시했다.

“3차 인마대전(人魔大戰)이 현실로 다가왔어.”

* * *

“아르바를 제거할 생각은 없나?”

엘로이아가 건넨 뜻밖의 제의에도, 네르하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되물었다.

“도와주실 겁니까?”

“생각이 있다면.”

네르하는 고민했다.

지금까지 아르바를 내버려 두었던 엘로이아가 갑자기 이렇게 나온다는 건, 그녀 역시 이번 전투에서 무언가 느낀 것이 있다는 소리겠지.

“조금 고민할 문제로군요. 솔직히 쉽지는 않으니.”

아르바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놈은 교활하게도 만만치 않은 전력을 지금까지 몰래 숨겨 왔었다.

‘족장이 도와준다면 가능성은 충분하겠지만, 그렇다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건 별개의 일.’

중원 식으로 암살을 시도한다 해도, 놈이 갖고 있는 아티펙트로 인해 생기는 변수 때문에라도 쉽게 시도할 수는 없었다.

“시도한다면 전투 중 자연스럽게 전사를 유도하는 방법밖엔 없겠군요.”

“자, 자, 잠깐만! 지금 무슨 소리예요! 암살이라니?!”

“클로이아.”

어째서인지 아르바에게 가장 큰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클로이아가 격하게 분노를 토해 냈다.

“아무리 아르바 그 새끼가 천하의 바람둥이에, 개자식에, 상종 못 할 쓰레기라고는 해도!”

“개인적인 감정이 많이 보이는군.”

“그렇다 해도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지 않고 암살을 하겠다뇨!”

의외로 클로이아는 네르하가 정면으로 아르바를 넘어서는 걸 기대하고 있었다.

“클로이아, 아르바와 함께 싸웠으면서 눈치채지 못했나?”

“뭐, 뭐가요?”

“아르바가 엄청 수상하다는 걸 말이야.”

“……?”

아무래도 클로이아는 진심으로 아르바의 위험성을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일단 이것 하나만 확실하게 하자고.”

“그러니까 뭘요?”

“아르바는 사전에 이미 알고 있었어. 마계 백작이 후방에 나타날 것이라는 걸.”

“아!”

아르바의 성향과 방침상, 원래라면 전방 타격대에 합류해서 북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르바는 그러지 않고 아주 적절한 때에 후방에 나타났다.

“그렇게 아주 자연스럽게 활약해서 나와 공을 나눠 가졌지. 물론 아르바의 도움이 없었다면 군의 희생자가 많이 일어났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자체를 노렸다고 볼 수밖에 없어.”

공을 세우기 위해 철저히 전력을 숨기고 와신상담하던 아르바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비장의 호위대까지 꺼내면서 후방에 나타났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클로이아가 아르바와 합류해 공중전을 벌였을 당시, 네르하가 느꼈던 위화감.

“그렇게 격렬하게 싸웠는데,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았지. 적이든 아군이든.”

“……!”

클로이아 역시 그제야 무언가를 느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의도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나?”

“화, 확실히.”

아무리 상대가 마족들이라고는 해도 상대는 어디까지나 귀족급이 아닌 자들이었다.

그와 비교해 이쪽은 전원이 빵빵하게 아티펙트를 장비한 7레벨의 마도사들.

상대를 압도하진 못할망정, 피해 하나 없이 백중세를 유지했다는 건 명백하게 이상했다.

‘그 전력이라면 당시 자리에 있던 마계 백작도 때려잡을 수 있었지.’

물론 아스타로스의 휘하 전력들은 제외한 가정이었지만, 전력 자체로 평가하자면 분명 그랬다.

그 모든 사정을 이해한 클로이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떨었다.

“설마, 아르바가, 적과 내통했다는, 건가요?”

“확신은 아니지만 가능성은 있지.”

“대체 왜?”

“글쎄? 이유야 찾으면 한없이 많지만, 아직 확신은 금물이야.”

엘로이아가 조용히 말을 더했다.

“설사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행적으로만 봐도 미리 제거해 두는 편이 좋다.”

“하, 할머니.”

“아르바의 존재는 너희에겐 장애물이야. 처음에는 서로 협력 관계가 될 수 있는지 고민해 봤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안 될 것 같더구나.”

“으으으!”

개인적인 감정으로도, 일족의 입장으로도 클로이아는 아르바를 배제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걸 보면, 그녀로서도 아르바에겐 나름 미운 정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일단은 그냥 내버려 두죠.”

“괜찮겠나? 공을 나누는 건 그렇다 쳐도, 계속 녀석을 가까이 두다가는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네.”

“아르바가 아직 배신했다는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섣부른 움직임은 오히려 독이 될 겁니다. 더군다나 현재 상황은 아르바로서도 원하는 흐름이니 당분간은 잠잠하겠죠.”

만약 아르바가 이런 흐름을 얻기 위해 조작을 가했다고 주장한다면, 처벌은 받을지언정 제거의 명분으로는 부족했다.

“그리고, 아르바에겐 얻어야 할 게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가능하면 살려 두려고 합니다.”

“얻어야 할 것이라고?”

“네에, 뭐.”

네르하는 미처 대답하지 못한 채 살짝 딴청을 피웠다.

라데우스의 직계가 라데우스의 마나 연공법을 타인에게 얻을 계획이라는 걸 말할 정도로, 아직 네르하의 낯짝이 두껍진 않았다.

“자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따르겠네. 하지만 난 여전히 아르바를 제거하자는 입장이야.”

“물론입니다. 가능하면 아르바를 더욱 가까이하며 감시할 생각이니까요.”

누군가가 말했다.

친구는 가까이, 그리고 적은 더 가까이 두라고.

‘놈을 제거하는 건 그렇다 쳐도, 문제는 그 전에 놈에게서 어떻게 마나 연공법을 얻어 내느냐겠군.’

의심받지 않게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놈이 연공법에 수작을 부리는 걸 방지할 방법이 필요했다.

“일단은 몸이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 격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들어가서 빨리 쉬게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족장님.”

네르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확실히 마나 통합으로 마기를 다룬 후유증이 아직 몸을 좀먹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네르하의 휴식은 조금 더 후에 이루어졌다.

* * *

그렇게 네르하가 자신의 침소에 돌아왔을 때.

“아, 왔느냐 그대여?”

“…….”

자신의 애검을 움켜쥐고 발검 자세를 취하고 있는 루시아야 그러려니 했다.

왜 루시아가 자신의 침소에서 이러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루시아의 맞은편, 침대에 앉아 이쪽을 향해 도도한 시선을 보내는 검은 머리의 소녀는 정말 의외다.

지난번에 보았던 기다란 뿔도, 고양이 같은 눈동자도, 흑백이 반전된 눈의 자위도 사라진.

아주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왜, 네가 여기 있지?”

그렇다 해도 네르하가 그 모습을 보고 착각할 리가 없었다.

검은 머리의 소녀, 아스타로스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말했잖느냐? 곧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네르하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시 만난다고는 해도 그건 전장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헤어진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적진에 기어들어 올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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