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마왕령 (1)>
심상각인 영역, 엘븐 하란 위그드라실.
‘저게 8레벨에 이른 대마법사의 영역인가?’
넓이는 대략 4, 500미터 정도?
킬로미터 단위로 늘어나는 마계 백작급의 영역과 비교하면 초라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르하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결이 다르고, 질이 다르다.’
마족들의 영역이 원래 존재하는 것을 중간계에 끌어들여 생성하는 ‘침식’이라면, 8레벨의 영역은 진정한 의미로 ‘창조’의 영역에 선을 걸친 궁극의 기초라 할 수 있었다.
‘이 안에선, 그녀는 사실상 무적(無敵)이나 다름없다.’
영역이 지속되는 동안엔 그야말로 무한에 가까운 마나를 휘두를 수 있다.
어째서 그렇게 많은 7레벨에 비해, 8레벨은 공식적으로나마 고작 다섯만이 존재하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자자, 빨리하라고. 너무 늦으면 내가 끝내 버릴 테니까.”
류레이아의 독촉이 이어졌다.
본격적으로 손을 쓰기 전, 네르하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총사령관이야 그렇다 쳐도, 족장께서 여기까지 오신 이유는 뭡니까?”
시선을 받은 엘로이아가 작게 웃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이 그리 이상한가?”
“언제나 지정된 구역을 떠나지 않으셨으니까요.”
3명의 마계 백작을 토벌할 동안 서리 일족에서 동원된 최고전력은 전사장 바실리뿐.
적어도 네르하가 보기엔 족장인 엘로이아는 단 한 번도 전장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그냥,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서네.”
확인?
“내가 정말로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지. 잘못된 선택으로 일족을 파멸로 이끌지는 않을지.”
그녀가 천천히 네르하의 표정을 살폈다.
“그 아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모양이군.”
“뭔가 있군요.”
“후후, 그 아이가 아직은 내 편이라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만.”
“…….”
“자, 보여 주게. 나는 자네의 가능성을 보고 싶어서 찾아왔으니까.”
“그러죠.”
네르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엘로이아가 지금 뭔가를 꾸미고 있는 건 분명하다. 어쩌면, 배신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녀가 말한 ‘가능성을 보고 싶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참 크기도 하군.’
위그드라실에 속박되어 더 이상 덩치를 키우지 못하고 있다곤 해도, 지금까지 성장한 크기만 거의 작은 언덕에 이른다.
네르하는 천천히 양팔을 뻗어 힘을 집중시켰다.
‘내가 속성 통합의 고유 계통을 선택한 건, 마기의 제어와 통합을 더욱 원활히 하기 위함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속성과 다양한 마법을 다루면서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해 봤지만, 결국 네르하가 노려야 할 건 하나뿐이다.
마기(魔氣)와 정기(正氣)의 융합.
그리고 그 두 기운의 충돌을 억제해 줄 윤활유의 역할로 마법을 택했다.
‘마기와 정기는, 태극의 음양과도 같다. 서로가 서로를 거부하는 듯하면서도 융화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
그 융화의 끝에는 둘 중 하나의 결과만이 남는다.
“호오?”
심상치 않은 힘의 발현을 느낀 두 대마법사의 시선이 네르하를 향했다.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크루갈과 대결할 때는 처음 실전에서 써 본 거라 미진함이 많았어. 하지만 지금은 충분히 계산대로의 위력을 낼 수 있을 거다.’
하물며 지금은 움직이는 적도 아닌, 덩치만 커다란 과녁이지 않은가?
네르하는 안심하고 현재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끌어올렸다.
오른손엔 마기. 왼손엔 금천진기.
이전엔 이 두 힘을 그저 무식하게 뭉친 탓에 허무하게 손실되는 힘이 많았지만.
네르하는 고유 계통인 속성 통합을 이용해 손실률을 극적으로 줄이고, 증폭률은 더더욱 올리는 데 성공했다.
6레벨, 발전의 단계.
금색과 검은색의 에너지가 융합한다.
‘태극도.’
원래의 능력인 속성 통합이 적용되었다면, 두 힘을 합쳐 버리는 순간 마기와 금천진기 둘 중 하나의 힘으로 통일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네르하는 이 ‘속성 통합’의 단계를 넘어선 ‘속성 융합’의 단계를 개척했다.
그 결과, 기존 법칙 하엔 존재하지 않았던 제3의 속성이 개화한다.
“어어?”
류레이아의 표정이 조금씩 변해 갔다.
“저거, 좀 위험한데? 제어할 수 있는 거, 맞아?”
파직! 파지지직!
처음엔 조금 흥미로운 시선이었지만, 힘의 규모가 예상치를 훨씬 초월하자 그 눈은 경악으로 뒤바뀌었다.
지켜보던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야! 할망구! 혹시 모르니까 너도 와서 도와!”
“뭘 도우라는 건가, 총사령관?”
“모른 척하지 말고 망할 년아! 저거 잘못 폭주하면 여기 날아가는 걸로 그치진 않을 것 같다고!”
한차례 역정이 있고 나서야 엘로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래 보이는군.”
두 노인이 연계하든 말든, 네르하는 자신의 할 일만을 계속해서 해 나갔다.
그렇게 마기와 금천진기의 융합이 끝나고.
네르하는 두 손바닥 위에 올려진 회색 구체를 보며 생각했다.
‘이건, 태극도가 아니다.’
결과물이, 예상을 빗나갔다.
‘억지로 융합한 태극도는 그 이름처럼 음양이 명확하게 나뉜 모양새였지. 하지만 이건…….’
지금 이것에겐 태극도가 아닌 다른 이름을 붙여 줘야 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구체를 제어하는 손아귀의 힘이 급격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 오래 유지하진 못하겠군. 벌써부터 제어를 벗어나려고 하니.’
네르하는 그 상태로 천천히 부유마법을 시전했다.
이전에 세운 공으로 류레이아에게서 뜯어온 레비테이션이 인챈트된 아티펙트의 힘이었다.
‘자, 간다!’
마치 강환(强環)을 제어하는 것처럼 의념의 아래에 놓인 회색 구슬이 베드리우스의 본체를 향해 날아갔다.
그렇게 날아간 공은 천천히 회전하며 놈의 본체로 파고들었고.
그렇게.
“어어!?”
공과 맞닿은 베드리우스의 본체 중앙이 급속도로 뒤틀린다.
그 모습을 바라본 두 노인의 입이 쩍 벌어지기 시작했다.
“허, 허허?”
“자, 잠깐! 저, 저거 설마!”
마치 시공간이 일그러지는 모습과 함께, 사상지평(事象地平)을 형성하는 거대한 천체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나타난 거대한 힘의 파동이, 네르하의 육체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대이적 마법? 아니,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세계수의 힘을 빌려도 불가능한, 진정한 신의 이적이자 권능.
그걸 7레벨에도 이르지 못한 애송이가 일으킬 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대이적 마법이든 뭐든 눈앞에 벌어진 상황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이 근방의 모든 생명체가 멸절할 거다! 빨리 도와!”
네르하를 집어삼킨 흑백의 영역은, 베드리우스의 육체를 먹어 치우고 세상을 향해 손을 뻗으려 하고 있었다.
엘로이아가 답했다.
“흠, 내 영역은 자네와는 상극이라 제대로 될지 모르겠군.”
“안 되면 빙정의 힘이라도 끌어와! 네 손녀 뒈지는 꼴 보기 싫으면!”
“그건 안 되지.”
이 근방엔 사랑하는 손녀 클로이아가 마족들과 대항하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정색한 엘로이아 역시 영역을 전개하며 위그드라실에게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8레벨의 대마도사 두 명이 영역을 전개하며 폭발을 억제하려고 했음에도, 상황은 어째서인지 점점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까각! 까가각!
‘안 돼! 영역에 금이 간다!’
세계수의 나뭇가지가 현상을 억제하는 걸 버거워하고 있다.
말 그대로 세계를 파괴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
‘빌어먹을 애송이! 대체 뭔 짓을 저지른 거야?!’
마실이나 나가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전장에 왔던 류레이아는, 자신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네르하의 행동을 욕하며 울부짖었다.
* * *
바깥에서 류레이아가 필사적으로 폭주를 제어하는 상황에서.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정작 이 일을 벌인 당사자인 네르하 역시 당황에 빠져 있었다.
‘뭐가 문제지?’
계산대로라면 이런 식의 힘의 폭주는 일어나지 않아야했다.
이런 폭주 대신 베드리우스의 육체를 완전히 집어삼키는 완벽한 대소멸이 일어나야 했다.
‘뭐가 됐든 의식은 있어. 손발도 움직인다.’
갑자기 터져 나온 힘에 휘말려 들었지만, 어째서인지 몸과 정신은 무사했다.
‘그런데 여기, 뭔가 좀 익숙한……데?’
을씨년스러운 회색빛의 풍경.
생명체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 이곳은, 어째서인지 자신이 와선 안 될 곳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이곳은 네가 만들어 낸 원초의 혼돈 속이다. 네르하 라데우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근엄한 목소리가 네르하의 귓가를 때렸다.
―설마 심연 속에 묻혀 버린 자아의 파편이 이런 식으로 깨어날 줄이야.
‘누구냐?’
비록 목소리는 나지 않고 있지만, 네르하는 염상만으로도 상대가 알아들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스슥!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무(無)의 공간에서.
이마에 기다란 뿔이 튀어나온 검은 머리의 청년이 나타났다.
그 청년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마계의 암룡(暗龍) 이자카르. 신이 되고 싶어 했던 망령이니라.
갑자기 튀어나온 상대의 정체에 네르하는 적지 않게 놀랐다.
이자카르.
네르하가 오른손에 착용하고 있는 마령수투에 담긴 힘의 근원이자, 일천여 년 전 중간계에 강림했다던 마왕급 마족.
‘죽은 게 아니었나?’
―죽었지. 육체는 오래전에 사멸했고, 정신은 봉인에 침식당해 결국 자아를 잃어버렸지. 지금의 나는 방금 전 말 그대로 망령에 불과하느니라.
‘내 말은 어떻게 자아의 조각이 튀어나왔냐는 거다.’
―어떻게라, 네 덕분이지 않느냐?
‘뭐?’
―이 몸이 깨어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힘을 듬뿍 먹여 주지 않았더냐? 거기에 ‘경계’를 부수는 원초의 혼돈 덕분에 심연 속에 가라앉았던 내 자아가 경계를 넘어올 수 있었던 것이지.
‘아니, 네가 깨어난 게 내 탓이라고?’
그냥 네가 마기만 보면 환장해서 처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네르하가 조금만 더 미숙했다면 억울한 마음에 복장이 터졌을 것이다.
현재 상황이 어쩐지 알 수 없는 지경인데 쓰러뜨려야 할 적은 늘어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리 억울해하지 말거라. 내 자아가 깨어난 덕에 네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니.
‘그건, 무슨 말이지?’
네르하는 무언가 걸리는 게 있음에도 반문했다.
―네가 어떻게 원초의 혼돈을 재현했는지는 몰라도, 질서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생명체는 이 속에서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느니라.
그나마 이자카르가 자신의 힘으로 생존 영역을 만들어 주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폭주의 여파가 덮치던 순간, 그것에 반응할 수 없었던 네르하로선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왜 날 살렸지? 내 육체를 차지하거나 하진 않는 건가?’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어째서인지 이자카르의 입술이 댓바람만큼 튀어나왔다.
―하나는 지금 깨어난 나는 어디까지나 자아의 파편, 불완전한 권능으론 여전히 나를 옥죄는 봉인을 깨는 건 불가능하다.
스윽!
그의 손가락이 갑자기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또 하나는, 네가 살아남아야 내 복수가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복수?’
―안 그렇더냐? 비슈나르여.
비슈나르.
―…….
네르하가 시선을 돌린 그곳에는, 어느새 몸을 검은 불꽃으로 감싼 한 여마족이 나타나 있었다.
‘그놈이다.’
마족 뮬란의 목숨을 거두어 가며 나타났던 자!
얼굴은 여전히 흑염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전체적인 몸의 굴곡을 보아 여성체라 추측이 가능할 뿐.
―크흐흐흐, 내 뒤통수를 치고 자리를 앗아간 증오스러운 적이여. 잘 살아 있는 모양이구나.
‘뭐?’
뜬금없이 튀어나온 과거의 비사(祕史)에 황당해하던 찰나.
―그래, 조각이나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구나, 과거의 동지여.
비슈나르는 냉랭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저 파편에 불과한 탓일까? 그녀는 이자카르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했다.
비슈나르가 네르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시 만났구나, 현재의 적이여.
“…….”
네르하는 대답을 피하며 놈을 노려보았다.
상대는 마왕. 그리고 어쩌면 마계 백작들의 힘을 흡수하여 전성기에 가까운 힘을 회복했을지도 모르는 강자.
―베드리우스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었다. 마지막 파국을 앞두고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니까.
비슈나르가 천천히 네르하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권하지. 나의 것이 될 생각은 없느냐?